5. 에베소서 5장 / 놀라운 신부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관한 설명을 계속한다.
1.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엡 5:1-6)
“본받는 자”란 “흉내 내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범은 우리를 감동시킨다(요 15:3/요 15:12/요일 3:16-18). 여기서 바울은 죄인을 위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신 향기로운 제물로서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물론, 올바른 사랑에는 우리가 어떤 것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성도들(구별된 자들)은 그 이름도 말하지 말아야 할 죄들도 있다. 4절은 유우머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지 못하고 부정한 농담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입술로 의문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으로 맛을 고르게 함같이 말해야 하므로”(골 4:6) “대강 줄잡아서 들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자들도 습관적으로 살며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가 있다. 바울은 이들의 가르침을 “허탄한 이야기”라고 불렀다(5-6절/갈 5:21-/고전 6:9-10 비교).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으나(2:1-10),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여야만 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정결하게 지켜 주리라는 것이다.
2. 빛 가운데서 행하라 (엡 5:7-14)
“참예한 자”란 말은 공동으로 갖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어서, 종종 “교제” 또는 “협력”으로 번역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벧후 1:4), 하나님의 약속(엡 3:6), 그리스도의 고난(벧전 4:13), 거룩함(히 12:10), 하늘의 부르심(히 3:1)과 하나님의 영광(벧전 5:1)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이러한 놀라운 교제를 이루면서 어떻게 죄와 어두움에 속한 일들에 짝이 될 수 있겠는가?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빛과 어두움이 어찌 공존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므로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어두움은 죄와 거짓말을 만들어 내며,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산출한다. 빛은 어두움과 타협할 수 없다. 다만 드러낼 뿐이다(요 3:19-21/요일 1:5-10).
3. 주의깊게 행하라 (엡 5:15-17)
“주의하여”란 말에는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것은 지혜롭게 행하려는 뜻이며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에 걸려 넘어져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는지 모른다. “정확하게”, “주의하여” 행하는 대신 목표를 잃고 길을 잃고, 마침내는 우회하는 괴로움을 당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와서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기회를 사는 것”(시간을 구속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간과 힘과 재물과 재능을 낭비하는 일이 없으며,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4. 조화있게 행하라 (엡 5:18-6:9)
이 부분은 6장에까지 이어져 있으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일꾼과 주인 사이의 조화에 대하여 다룬다. 가정과 직업에 있어서의 조화와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에 있다. 교회의 일치와 가정의 조화는 둘 다 성령에 의존한다(4:3/5:18). 즉, 외적인 강압이 아닌 내적인 능력에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증거는 기쁨(19절)과 감사와(20절) 희생적인 순종(21절)이다. 골로새서 3장 15-17절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한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절을 받는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감정적인 동요나 기적, 방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에서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는 그러한 증거들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있다.
머리됨의 원리가 가정을 통솔한다. “그리스도께 하듯”이 동기가 된다. 아내들은 그리스도께 하듯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하며,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고, 자녀들은 주님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가정이 분열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고 있다. 교회가 성경의 첫 신부인 하와에 비유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창 2:18-25 참조). 그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취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옆구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찔림을 당했다. 그녀는 아담이 잠들어 있을 때에 만들어졌으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쉬고 계실 때에 형성되었다. 하와는 아담의 본성을 나누어 가졌는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예한 사람들이 되었다(30-31절).
하와는 자기의 짝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대상이었는데,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돌보신다(딤전 2:11-15). 아담은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죄를 범하였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인한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죄 있는 자가 되셨다. 하와는 죄가 인간의 가족에 끼어들기 전에 창조되어 아담에게 인도되었다. 교회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심중에 있었다. 로마서 7장 4절과 고린도후서 11장 2절을 살펴보면 이 결혼의 진리가 개별적인 신자에게, 그리고 지교회에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지금 교회에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성결케 하시며 깨끗하게 하고 계신다. 주님은 그가 선택하신 종들을 통하여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신다(4:11-16).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영광으로 인도해 가실 때 교회는 완전하며 점도, 흠도 없을 것이다(요 17:22-24).
말씀은 교회를 정결케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양육한다(29절). 이것은 신자들의 새로운 본성을 위한 영적인 음식이다.
6장 1-9절에서 바울은 자녀와 종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진리를 적용시킨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즉, 순종함이 옳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명령이며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아버지는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아내의 충실한 사랑을 얻는 데에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바울은 4절에서 아버지에 대해 경고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의 자녀를 불필요하게 노엽게 꾸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황금률을 가정에 적용하며 자녀를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훈계(양육)하며, 주 안에서 조언(권고)을 주어야 한다.
종들은 그들이 모든 것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거나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마 6:24). 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에 마음을 고정시키며, 세상적인 소득을 얻는 데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눈가림”이란 주인이 보고 있을 때에는 일하고 그가 없을 때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면 눈가림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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