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야고보서 2장 / 사랑과 믿음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믿음의 이러한 양면성이 본 장에서 논의된다. 근본적인 개념은 진정한 성경적 믿음이란 죽은 것이 아니며 사랑으로 나타나고(2:1-13), 행함으로 나타난다(2:14-26)는 데에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믿지 가슴으로 믿지 않는다. 이들은 기독교의 사실을 믿는 역사적인 신앙은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구원받는 신앙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1. 믿음은 사랑으로 입증된다(2:1-13)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사실상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해야만 한다.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으며, 사단도 일반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믿는다(19절).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격적인 믿음을 말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명확한 위탁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원문에는 “영광의 주”로 되어 있지 않음)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다(히 1:3). 이 서신을 읽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광”이라 하면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에 거했던 하나님의 영광인 바 신적 현현(Shekinah)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제 그 영광은 믿는 자와 교회 안에 거한다(골 1:27/골 3:4/롬 8:30/요 17:2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한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함으로써 사랑을 표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을 더 존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무서운 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부요하도록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이다(롬 2:11/딤전 5:21 참조).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이 회당에 오면 사랑으로써 영접해야 할 것과 부자에게 한 것과 같은 그런 똑같은 은혜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임을 담대하게 주장한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금가락지를 낀 사람”(여러 개의 “번쩍거리는” 금가락지를 끼고 있음을 암시한다)이 초라한(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훌륭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높임을 받는 자리(눅 14:7-11)와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좋아했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를 좋아한다.
과연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그처럼 죄악된 일인가? 한 가지 예로, 그렇게 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자가 되나, 하나님만이 사람을 정직하게 판단하실 수 있다(4절). 여기서 “구별한다”는 말은 “나눈다”는 뜻이며, 그것은 1장 8절에서 제시한 두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 이런 류의 판단은 거짓된 가치관을 보여 준다(5-6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가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눅 6:20/마 5:3).
야고보는 부자들이 성도들을 압제하며 그들을 법정으로까지 끌고 간다고 상기시킨다. 가난한 자를 높이지 않음으로써 이 신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였다(잠 14:31).
7절에서 야고보는 부자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하기조차 한다”고 상기시킨다. 더구나 신자를 위한 “최고 법”(황금률)은 사랑의 법이다. 야고보는 레위기 19장 18, 34절을 인용하나, 마태복음 22장 34-40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롬 13:8-10/갈 5:14 참조).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죄이며, 계명 하나를 어기는 것은 율법 전체를 범하는 죄가 된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을 주셨으며 모든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물론,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을 모세의 율법 아래로 다시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새 언약 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도덕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모세의 법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기록된 사랑의 법, 보다 준엄한 “자유의 법”으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2.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된다 (약 2:14-26)
야고보가 바울과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로마서 4장 1-5절에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의로운 신분을 가지게 되는가)를 말하고 있는 반면에, 야고보는 우리의 구원을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에 나타난 변화를 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만(엡 2:8-9), 행함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믿음이다(엡 2:10).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에 달려 있지 않고 생활에서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인 것이다. 14절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말은 “그와 같은 종류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겠느냐?”고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작은 일, 실제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믿음을 보여 주게 된다(14-16절/ 요일 3:16-18). 행위로 인도하지 않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다(17, 26절). 18절에 하나의 도전이 나온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이것은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믿음이 표현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적인 사랑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데에 있다. 마귀도 죽은 믿음은 가지고 있다(19절). 마태복음 8장 29절과 사도행전 16장 17절을 읽고 귀신이 그리스도를 무엇이라고 인정했는지 알아보자. 그러나, 이러한 류의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가 없다.
야고보는 구약으로 돌아가 행함으로 이끄는 믿음의 실례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아브라함이다(창 22:1-19). 아브라함은 아들 얻기를 열망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기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매 이것이 그를 구원하는 데 필요한 의가 되었다(창 15:1-6/롬 4:1-5).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이삭을 통하여 그가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들과 같은 수 많은 자녀들을 갖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음을 믿었다고 히브리서 11장 17-19절은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의 믿음을 입증하였다. 말씀에 대한 그의 순종은 말씀을 믿는 믿음의 증거였다. 그의 믿음은 그의 순종의 행위로 온전해졌다(성숙하게 되었다). 역대하 20장 7절과 이사야 41장 8절에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한 것을 보라.
야고보의 두번째 예화는 라합이다(수 2:1-/수 6:17-27). 이 여인은 소문난 죄인이었으나, 그 이름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게 된다(마 1:5). 히브리서 11장 31절은 그녀가 믿음의 여인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저주받은 여리고 성에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대하여 자세히 전해들은 그 보고를 믿었는데(수 2:10-11), 이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또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도 유의하자(수 2:9/수 2:21).
라합은 두 정탐꾼이 그녀의 집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였음을 명심하라! 그녀는 두 정탐꾼을 받아들이고 보호한 행위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입증하였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행위로 입증된 믿음 때문에 여리고의 심판과 불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24절은 전체의 문제를 요약한다. 행함으로 이끌지 않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비통한 일이지만,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즉, 교회 회원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이들은 그들의 입술로는 고백하지만(14절) 생활로는 고백한 것을 부인한다. 이것은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쓸 때 설명한 것과 똑같은 진리이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 1:16).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들이다”(딛 2:14). 이것이 바로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바울이 경고하는 이유이다.
이 말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요일 1:5-10).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서 습관적으로는 죄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에서 행보한다.
이 전반의 문제가 에베소서 2장 8-10절에 요약되어 있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구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②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성화-“우리가 그의 만드신 바라...”
③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일:봉사-“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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