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베드로전후서1 - 개효 및 서론 / 벧전 1장(그리스도의 수난)

JORC구원열차 2009. 8. 3. 08:54

베드로 전서 개요

 

▣ 주제:

 

하나님의 은혜 /5장 12절

 

▣ 인사말 / 벧전 1장 1-2절

 

1.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 벧전 1장 3절-2장 10절

 

소망 가운데 사는 삶/1장 3-12절

거룩한 삶/1장 13-21절

화합된 삶/1장 22절-2장 10절

 

2. 복종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 벧전 2장 11절-3장 12절

 

권위에 대한 순복/2장 11-17절

주인에 대한 순복/2장 18-25절

가정에서의 순복/3장 1-7절

교회에서의 순복/3장 8-12절

 

3. 고난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 벧전 3장 13절-5장 11절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삼으라/3장 13-22절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4장 1-11절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4장 12-19절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라/5장 1-6절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라/5장 7-11절

 

▣ 문안과 축도 / 벧전 5장 12-14절

 

 

베드로 후서 개요

 

▣ 주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 거짓 선생들의 위험

 

1. 설명 :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 벧후 1장

 

이 지식의 은사/1장 1-4절

지식의 성장/1장 5-11절

지식의 터전/1장 12-21절

 

2. 검토 : 거짓 선생들 / 벧후 2장

 

그들의 정죄/2장 1-9절

그들의 특성/2장 10-17절

그들의 주장/2장 18-22절

 

3. 권면 : 참 그리스도인 /벧후 3장

 

사랑하는 자들아... 기억하라/3장 1-7절

사랑하는 자들아... 잊지 말라/3장 8-10절

사랑하는 자들아... 힘쓰라/3장 11-14절

사랑하는 자들아... 삼가라/3장 15-18절

 

 

베드로 전 .후서 서론

 

▣ 저자:

 

사도 베드로는 그의 이름으로 된 두 서신서의 저자이다. 이 서신들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바, 양떼와 어린 양들을 “치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었다(요 21:15-17).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나오는 “바벨론”은 아마도 로마일 것인데(계 17:5/계 17:18) 그는 죽기 직전에 고통받는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그 곳에 갔었다(벧후 1:12-15).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설립하고 “교황”으로서 25년간 섬겼다는 데에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로마에는 몇 개의 교회들이 있었다(16장을 보면, 몇개의 “집에서 모이는 단체들”이 언급되어 있다). 만일 베드로가 먼저 거기에 가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목회하기 위해 로마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방침은 다른 사도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롬 15:20).

 

▣ 주제:

 

베드로전서의 주된 주제는 은혜(5:12)로서, 이 “은혜”라는 단어는 각 장마다 사용되었다(1:2/1:10/1:13/2:19-20/3:7/4:10/5:5/5:10/5:12). 2장에서 “아름다우나”와 “아름다우니라”의 헬라 원어는 “은혜”이다. 베드로가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의 충분하심에 대하여 경험으로부터 증거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첫 편지를 쓴 후에 체포되어 시련을 당하였으며,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두번째 편지를 썼다(벧후 1:13-21). 두번째 편지의 주제는 확신과 신령한 자식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그는 교회 내에 거짓된 교리의 위험이 있음을 보고 조심하라고 신자들을 경고한다(3:17). 다른 말로 하면, 두 편지는 모두 교회의 위험을 강조하고 있다. 사단은 박해로 사자처럼 다가올 수 있으며(베드로전서), 또는 거짓 교리로 뱀처럼 올 수도 있다(베드로후서). 그는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이다(요 8:44-45).

 

그리스도인은 불 시험을 통과하는 동안 그를 살피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면 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교회에서 일어날 거짓 선생들을 정복할 것이다(벧후 2장). 베드로전서는 은혜로, 베드로후서는 “지식”으로 요약된다.

 

▣ 상황:

 

주후 64년 10월, 네로 치하의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로마에서 가장 극심했고, 심지어 네로는 자기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밤에 그리스도인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몇몇 연구자들은 바울이 64년 봄에 석방되자, 그 도시의 신자들을 베드로에게 맡긴 후 서바나로 갔다고 생각한다(롬 15:28). 실라와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언급되어 있으므로(벧전 5:12-13)바울은 그들을 떠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서바나로 여행한 것이 틀림없다.

 

네로는 7월에 로마를 불사르고 10월에 성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는 “불 시험”(4:12-)이 로마시로부터 로마의 각 지방에 퍼져 나갈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 곳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이 일을 할 만큼 가까이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바울이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들에게 이 두 서한을 썼다(벧전 1:1/벧후 3:1). 이 신자들은 이미 지역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핍박을 겪어 왔지만(1:6-7/3:13-17), 그는 그들이 이제 시작될 맹렬한 시련에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4:12-/5:9/5:10).

 

▣ 에베소서와의 비교: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씌어진 베드로전서와 에베소서를 주의깊게 읽어 보면 그 교훈과 단어들에 있어 백 가지 이상의 유사점을 보게 된다. 베드로와 바울이 신령한 진리들에 대하여 일치한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듯하다. 사실상, 베드로 자신이 바울의 글들을 지적하고 있다(벧후 3:15-16 / 히브리서를 가리키는 듯함). 예를 들어, 두 개의 송영을 비교해 보라(엡 1:3/벧전 1:3). 그리고 다른 유사점들도 비교해 보자.

 

베드로전서 에베소서

1:12 3:5/3:10

4:11 3:6/3:21

1:8 3:8

3:9 4:2

4:10 4:7/4:11

2:2 4:13/4:15

 

 

1. 베드로전서 1장 / 그리스도의 고난

 

1-2절에 있는 인사는 사도(보내심을 받은 자) 베드로가 저자임을 밝힌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다른 칭호를 붙이지 않으며 5장 1절 이하에서도 그렇다.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창설하였으며 초대 “교황”으로 봉직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여기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했음직하다.

 

그의 독자들은 “나그네들”, 즉 이방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도 진리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민권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다. “흩어진”이란 말은 농부가 씨를 뿌리듯 “분산시킨다”는 뜻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씨이며(마 13:38),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원하시는 곳에 그들을 심으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씨를 흩뜨리기 위하여 박해를 사용하신다(행 8:1/행 11:19- ).

 

2절은 구원의 계획을 요약한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에로 구별되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택하셨다(엡 1:4). 성자 하나님이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그가 당신을 위하여 죽었을 때 당신을 구원해 놓으셨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성령께 대한 당신의 복종이 필요하였다.

 

베드로는 이제 이 대적하는 세상에서 어떤 류의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기록한다.

 

1. 소망 중의 생활 (벧전 1:3-12)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소망이 없다”(엡 2:12). 그러나, 신자는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구세주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시며(딤전 1:1), 우리는 그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소망을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망은 그의 신령한 상속권에 속한 일부이다. 우리는 이 산 소망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요 3:5).

 

이 소망은 살아 있는 소망일뿐만 아니라 또한 지속적인 소망이다(4-5절). 이 소망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는 부패하거나 더럽혀지지도,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빼앗기는 일이 없다. 이 소망이 간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또한 병사에 의해 보호를 받듯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 우리는 그에게 뿌리를 내린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받는다.

 

영원한 안전이란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그는 매일 구원을 받고 있다(성화).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완전하게 구원받을 것이다(롬 8:15-25). 우리의 믿음의 목표(완성, 안전)는 믿는 자의 완전한 구원일 것이다(9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믿는 자는 시험받는 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시험을 견딜 수 없는 믿음이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고난은(필요하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잠깐”일 뿐이다. 영광은 영원하다. 7절은 우리 믿음의 시련을 금을 제련하는 것과 비교한다.

 

“시련”이란 단어는 “승인”이란 뜻이다. 케네트 위스트(Kenneth wucst)박사는 이것을 탐광자가 시험해 보려고 금광석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분석가는 그 광석이 금을 함유하고 있다고 그에게 감정해 준다. 그 감정서는 그 광석을 인준하는 것으로서 시험을 거친 소량의 견본 광석 이상의 많은 가치가 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한때 하나의 견본으로 시험을 받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이 승인을 받는다는 것은 이에 따르는 부요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우리가 견디어야 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받을 보다 많은 영광을 뜻한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10-12절에서 베드로는 구약 선지자들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구원에 대하여 말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이 나타날 때나 그 시대의 특성에 대하여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 이들은 십자가와 왕국은 보았으나 그 사이에 있는 “계곡”, 즉 현 교회 시대는 보지 못하였다.

 

2. 거룩한 생활 (벧전 1:13-21)

 

복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할 것임이 분명하다(요일 3:1-3).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모아야”만 하며 이러한 생각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마치 동양인이 달릴 때에 자기의 옷을 챙기듯이(출 12:11) 해야 한다.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 또 다른 동기는 말씀의 명령 때문이다(레 11:44/레 19:2/레 20:7). “거룩한”은 죄가 없는 완전함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생을 사는 동안은 불가능한 조건이다(요일 1:8-10). 이것은 따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특성을 지녀야만 한다.

 

세번째의 동기는 하나님의 심판이다(17절). 하나님은 오늘날 그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그들이 행한 것을 심판하신다(고전 3:1-). 그는 “편애”가 없으시며 모두를 똑같이 다루신다.

 

18-21절은 헌신한 생활에의 네번째 동기를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값이다. 구원을 받기 전의 우리의 생활은 공허하고 무의미한(헛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삶은 그로 말미암아 충만하며 행복하다. 우리의 구원은 값주고 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필요로 하였다(요 1:29).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된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를 그 계획에 포함시키셨다. 우리는 더욱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양도하는 것보다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고전 6:15-20)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크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별되게 드려진 삶을 사는 것이다. 대단히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서 그들의 간증은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들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3. 화합된 삶 (벧전 1:22-25)

 

구원은 우리에게 산 소망과 거룩한 삶을 살려는 욕망,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놀라운 교제를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셨고,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심으셨다(롬 5:5/요일 3:16- 참조).

 

베드로는 22절에서 사랑에 대한 두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 사랑과 신적인 사랑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형제 사랑을 소유하지만 신령한 힘을 발휘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형제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지만 신적인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조절을 받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베드로는 “거듭난”이란 말을 좋아하여 1장 3절과 23절에서 그것을 사용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소망에로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형제에의 사랑에로 거듭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신 것처럼(마 13:1-9/마 13:18-23), 말씀을 씨에 비유한다. 씨앗처럼 말씀은 작아서 중요하지 않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 생명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말씀은 효과를 보기 위하여 심겨져야 하는데 마음에 심겨지면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말씀이 산출하는 열매도 영원하다. 그러나 육신의 일들은 지속되지 않는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사야 40장 6-8절을 언급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원히 지속되지만, 육신의 힘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잠시 동안은 아름답게 보이나 곧 사라지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화합은 주님과 교회에, 그리고 신자 자신들에게 축복이 된다(시 133편). 만일 모든 신자가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거기엔 화합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