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베드로후서 1장 / 그리스도인과 성경
베드로후서의 핵심 단어는 지식이며, 거짓 교훈의 위험에 대하여 쓰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 사단은 우는 사자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성도들에게 곧 임할 불같은 박해를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에서 사단은 속이려 하는 뱀으로 나타난다(요 8:44-45).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교훈은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다(행 20:28-32).
박해는 언제나 교회를 정결케 하고 강하게 했다. 그런 반면에 거짓 교훈은 교회를 약화시키며 그 증거를 파괴한다. 거짓 교훈과 마귀의 거짓말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지식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지식의 은사 (벧후 1:1-4)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리에 이르는 인격적인 체험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정의하신 바를 살펴보라. 그리스도에 관하여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를 인격적으로 알아야만 한다(빌 3:10).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는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며(고후 5:21)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신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 곧 하나님의 “보배로운 믿음”과 “보배로운 약속”을 주셔서 경건한 삶을 살게 하셨다. 이 말을 기록했을 때 베드로는 요한복음 6장 68절에 나오는 그의 고백을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생명과 경건함 모두를 갖게 된다. 사람의 저작물들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사실상 성경만이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
4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라.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다. 외적으로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애쓰나, 내적으로 이러한 신의 성품을 결여한 죄인들은 잃어버림을 당하며 속임을 당한다. 베드로후서 2장 20-22절과 비교해 보라. 거기에는 거짓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다.
① 이들은 세상의 오염은 피하였으나 타락은 피하지 못하였다. 즉, 단지 외적으로만 씻기워졌을 뿐, 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머리”로는 가지고 있으나 마음에서의 믿음은 없다.
③ 이들이 진실로 구원받은 것이 아닌 것은 그들이 잠시 후에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씻김 받았던 “개”나 “돼지”와 같다. 이들은 결코 새로운 성품을 받아 양이 되지는 못한다.
2. 지식에서의 성장 (벧후 1:5-11)
“이러므로(이외에)...” 이는 구원 이외에 무엇이 더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령한 것에서 또한 성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힘쓰거나 열심을 내야 한다. 게으르고 부주의한 그리스도인은 성장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신자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신령한 특성들을 열거한다.
줄에다 구슬을 끼우는 식으로 이러한 미덕들을 “더해 가라”는 제안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가 성장하여 다른 것이 되도록 우리를 돕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덕들의 꿰미”가 아니라 망원경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다. 한 부분이 또 다른 부분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구원하는 믿음)에 덕 또는 찬양을 공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덕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덕에, 지식 또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공급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옳고 그른 것을 모른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식에 이어 절제 또는 자기 통제가 나온다. 자기 통제는 인내 또는 참음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시련의 때에 그리스도인이 “지탱하는 능력”이 된다.
우리는 인내에 경건을 공급한다(3절). 이 단어는 “바른 예배” 또는 헌신된 생활을 나타내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을 뜻한다. 형제 우애가 그 다음의 덕인데,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마지막 덕은 자비 또는 사랑이라고 베드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그는 게으른 자이다.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힘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열매가 없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의 생활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는 소경이다. 영적인 통찰력이 없다. 그는 영적으로 근시안이며, 신령한 발전이 결여된 배후에는 보잘 것 없는 기억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도 잊었던 일이 있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눅 22:61).
따라서, 그는 “더욱 힘쓰라”고 두번째로 말한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구원하거나 그 구원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다. 그러나, 참된 신자의 표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살전 1:4-5). 이러한 사실이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할 것이다. 이것은 “불 가운데서”(고전 3:15) 구원을 받기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3. 지식의 근저(1:12-21)
“하지만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변화산 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가졌던 그의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답한다(마 17:1-13/눅 9:27-36). 베드로는 그가 몸(장막)에 더 이상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요 21:18 참조).
“벗어나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탈출”이란 뜻이다.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는 이와 동일한 단어가 “별세”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승리의 탈출인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영광 중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산상 변화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건이다. 그 산에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그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 있었는데, 이들은 죽은 신자들(모세)과 죽지 않고 데려감을 받은 사람들(엘리야)을 대표한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영광을 볼 믿는 유대인을 대표한다.
베드로의 사역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던(갈 2:7-8) 반면,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에 대한 것이었음을 명심하자. “지상에 설립된 영광스런 왕국에 대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어떤 약속들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났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버려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보다 확실하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변형은 왕국이 임할 것이라고 확신케 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입증되었던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우리는 소유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예언을 “영해”하거나 이 예언들을 교회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신약 말씀처럼 문자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 들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예언들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을 어두운(더러운)데 비취는 빛에 비유한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어둡고 음침한 지하 감옥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유일한 빛이다! 우리는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이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 머지않은 어느 날 샛별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올라 자기 백성을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교회에게는 그리스도가 동트기 직전 가장 깜깜될 때에 나타난 샛별이 되시며, 이스라엘에게는 의로운 해로서 심판과 치료를 가져 오시는 그런 분이시다(말 4장).
로마 가톨릭은 20-21절을 남용해 왔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말씀은 읽혀져서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 주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사로이”는 “단독으로”라는 뜻이다. 성경은 “단독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여타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리고 처음에 그 말씀을 주신 성령님과 상관없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므로 자연인의 생각으로는 해석되어 질 수가 없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셨으니 그가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야만 한다(고전 2:9-16/요 14:26/요 16:13-14).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성경이 확실함을 감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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