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베드로전후서8 - 벧후 3장(주의 날)

JORC구원열차 2009. 8. 3. 09:11

8. 베드로후서 3장 / 주의 날

 

본 장에서 베드로는 어린 양들과 양떼를 돌보는 사랑의 목자로 나타난다. 그가 “사랑하는 자들아”란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엄숙한 권고의 말이 나온다.

 

1. 사랑하는 자들아... 기억하라 (벧후 3:1-7)

 

본 서신에서는 “생각하게 함”이란 단어가 핵심 단어였다(1:12-15). 베드로 자신은 잊어버리는 죄를 범했었기 때문에(눅 22:61),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진실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였다. 즉,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거짓 교훈들과 섞이지 않은 마음을 원하였다.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1:19-21).

 

베드로가 변호하고 있는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돌아오셔서 그의 왕국을 세우시며 1,000년이 차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교회의 휴거, 즉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은밀하게 돌아오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살전 4:13-18).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웃을 것이며(유 18절), 모든 역사가 그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지도자들에게서 우리가 듣는 말은 “만사가 있는 그대로 계속된다. 하나님은 역사를 단절시키고 시간의 과정에 개입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분명히 역사를 끊고 인간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들을 인용한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데에서부터 시작한다(5절). 그리고서 그는 창세기 1장 2절의 세상을 소개하는데, 이 세상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6절).

 

이를 창세기 6장의 홍수 사건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홍수는 사람들을 멸망시켰지 땅을 멸망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을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사단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7절은 세상이 이제 “불을 저장하고” 있어 심판을 위한 준비가 이미 끝났음을 시사한다. 현대원자론이 가르치는 것을 보라! 만약 6절을 홍수와 연관지어 버리면 “인간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될 것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잊지 말라 (벧후 3:8-10)

 

사람들의 역사관은 날수나 햇수의 개념으로 보지만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이다. 천 년이 그에게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시 90:4). 그러나, 하나님은 느린(더딘)분이 아니시며, 적절한 때가 되면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의 심판, 곧 주의 두려운 날을 연기하고 계신가?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주의 날”은 대환란이라고 알려진 심판의 시기이며, 교회가 하늘로 올리워간 후 이 세상에 임할 것이다(계 3:10/살전 5:8-9). 밤에 도둑은 어떻게 오는가?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않은 때 갑자기 온다(마 24:43/눅 12:39/살전 5:2/계 3:3/계 16:15).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할 그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임할 것이다(살전 5: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데리러 공중에 임하실 때 미비된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나, 세상은 그리스도의 진노가 부어질 때 방심한 채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힘쓰라 (벧후 3:11-14)

 

이것은 베드로가 힘쓸 것에 대하여 세번째로 언급한 곳이다. “너희가 구원받은 바를 굳게 하라(1:12), 더욱 힘쓰라(1:5-), 예수님이 오실 때를 위하여 준비하기를 힘쓰라(3:14).” 베드로는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3절에서 적고 있는 내용인 바, 그리스도의 재림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크게 자극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릴 것인데 왜 세상과 세상 것들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 이것은 롯이 소돔으로 옮겼을 때 범한 실수였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떤 소망이나 평화를 찾지 않는다. 그는 현 세상이 더욱 나빠질 것과 마지막에는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이 땅에 돌아오셔서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1,000년간의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며, 그렇게 한 후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실 것이다(계 21:1-). 우리의 책임은 그분 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2:13), 평강 가운데 세워지는 것이다.

 

4. 사랑하는 자들아 삼가라 (벧후 3:15-18)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늦추어 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상세한 내용을 위하여 바울의 글을 참고하게 한다.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하면 흥미롭다! 베드로는 왜 바울을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베드로의 사역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고 이스라엘의 소망이 지상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들과 교회를 위한 것이었으며,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한 것은 바울로 말미암아 주어졌다.

 

세상은 2,000여 년 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 왔다. 그리스도는 왜 늦어지시는 것일까?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그 이유를, 외관상으로는 늦어지는 것 같지만 그 동안에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고 밝힌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이 노아의 때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셨듯이, 노아 이전의 상황과 비슷하다(벧전 3:20).

 

유감스럽게도 바울의 메시지에서 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왜곡시켜 성경이 말하지 않는 바를 조작해 낸다. 예를들면, 로마 가톨릭은 바울의 것을 베드로에게 몰래 갖다 놓는다! 이들은 이스라엘부터 떨어져 나온 한 독립된 실재인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교리를 거부하고서 로마 교회를 “하나님의 지상 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유대인들에게서 교회에로 옮겨 그리스도의 문자적 지상 통치에 관한 진리를 제거하고 있다. 물론 베드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곁길로 인도하여 결국 자신만이 아니라 그 추종자들까지 정죄에 이르게 하는 거짓 선생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알며 거짓 교훈의 위험을 알아서 조심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말씀 안에 있는 우리의 굳건한 태도가 불법과 불순종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경고를 유다서 1장 24-25절에 나와 있는 놀라운 약속과 비교해 보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성장하는 것뿐이다. 어린아이들은 일어설 만큼 강하지 못하고 성숙해 있지도 않기 때문에 자꾸만 넘어진다. 말씀을 먹지 않아 주님 안에서 성장하지 않으려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리기 쉽다. 이 악한 세상에서 그들은 말씀을 먹고 기도하며 영적 근육을 단련시킬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은혜였고, 베드로후서의 주제는 지식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우리를 권면함으로써 이 두 책을 종합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만이 아니며, 성경을 통하여 얻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우리는 그를 더 잘 아는 자리에 이르러야만 한다(빌 3:10). 불행하게도 지식에서는 자라가면서도 결코 은혜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즉, 성경 진리를 머리로는 익히면서도 생활에서 성경 진리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균형잡힌 생활을 하라고 경고한다. 말씀을 배우며, 말씀대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이어서 핵심 성경 연구 <요한 일이삼서 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