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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4-3. 참된 죄책과 거짓된 죄책

by JORC구원열차 2009. 11. 9.

4-3. 참된 죄책과 거짓된 죄책

 

만약 인간들이 죄를 범해 오고 있다면, 또한 만약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있는 것이다. 죄책이란 죄와 책임이라는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결과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책으로 인하여 죄를 범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악행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로마서의 처음 몇 장의 논거다. 바울은 인간을 주된 세 부류로 분류하며, 각 부류가 도덕적 의무에 대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타락한 길을 추구하기 위하여 얼마나 그 사실을 고의 적으로 억눌러 버렸는지를 보여 준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진리와 선의 빛을 고의적으로 배척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다. 바울은 타락한 로마 사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마사람들은 피조물을 보고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알았고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았으면서도, 그러한 지식에 부응하는 삶을 살기를 거부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는커녕 우상에게로 돌아섰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부도덕함과 다른 형태의 반사회적 행위에 넘겨주셨다(롬 1:18-32).

 

바울이 언급하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성경에서 얻었을 수도 있고(유대인), 혹은 그들의 마음에서 얻었을 수도 있다(이방인). 어떤 경우든지, 그들은 자기의 지식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2:1-16). 세 번째 부류는 특별히 유대인의 세계로서, 이들은 자기의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는 도덕적 교훈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가르치고 있는 바로 그 율법에 불순종하고 있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백서이라는 그들의 특권적 신분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해 주지 못할 것이다.(2:17-3:8).

 

그렇다면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

바울은 자기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구약성경이 이 판결을 확증한다. 우리 모두는 변명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반론은 잠잠해진다. 온 세상은 죄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 (3:19-20).

 

하지만 이것은 병적인 관점이 아닐까?

적지 않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은 가끔 끊임없이 죄를 되뇌인다는 이유로,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와 특히 복음 전파에 있어서 죄의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다는 이유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예를 들면, 니체는 “기독교는 병을 필요로 한다....구원 절차에서 교회의 전체 체계의 감춰진 진짜 목적은 병을 일으키려는 것이다....사람은 기도교로 ‘개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병드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죄의 병에 대한 치료약이라고 한 점에서 부분적으로는 옳았다. 결국 예수님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힘을 쏟는 것을 변호하셨다. 그러면서 그분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덧붙이셨다(막 2;17). 하지만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병들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강하게 반대한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의 병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그들이 위대한 의사에게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누가 기독교를 죄의 용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십자가를 보고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의 영광스러움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행한 수치스러운 일만을 볼 수 있단 말인가? 탕자는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와야’(즉 그의 중심성을 시인해야) 했다. 화해의 기쁨 이전에 회개의 겸손함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탕자가 돌아오지 않고 먼 나라에 그냥 머물러 있었거나 혹은 돌아왔더라도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왔다면, 반지도, 새 옷도, 입맞춤도, 잔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죄의식은, 그것이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게 해줄 때만 커다란 축복인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양심이 항상 믿을 만한 안내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병적이고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도 있으며, 이런 양심을 가지고 죄의식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유해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죄의식이 병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도리어 자기는 죄도 없고 잘못을 범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더 악한 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의 고발로 말미암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양심을 조작하고 질식시키며 심지어 ‘마비시키는’(딤전 4:2) 것은, 구원의 필요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하여, 또한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권하기 위하여 죄의 심각성과 구속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건전한 일인가, 아니면 불건전한 일인가? 그것은 건전한 일이다. 만약 ‘거짓된 죄책감’, 즉 우리가 행하지 않은 악에 대하여 갖는 나쁜 감정이 있다면, ‘거짓된 순결의식’, 즉 사죄에 대한 근거 없는 즐거움 역시 불건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피상적인 치료는 언제나 오진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다. 이것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어서 거기서 치의를 얻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세상을 책망’하시는데, 이는 오직 그리스오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자이심을 더욱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함이다(요 16:8; 15:26-27). 사죄의 기쁨에 비교할 만한 기쁨은 없다.

 

하나님ㄴ의 구속 사역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회복시키지 않고서 인간의 죄, 책임, 잘못과 배사의 개념들을 회복시키려는 것은 균형을 잃은 일이다. 그것은 처방이 없는 진단이요, 하나님의 구원 대신에 자력의 구원으로 대치시키려는 허망한 노력이요, 소망을 바닥에 내던지기 위하여 높이 들어 올리는 일이다.

 

인간의 책임을 완전히 인정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죄책을 완전히 시인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자기가 무엇이 될 수 있었으며, 어떻게 되어야 했음을 알고, 또한 그 기준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실사에 대하여 변명을 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비 콕스(Harvey Cox)가 그의 책 「뱀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말라」(On Not Leaving it the Snake)에서 주장한 것이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서 먹었다는 불순종보다는 그 일에 앞서서 자기의 책임을 포기한 연약한 행위이며, 교만이라기보다는 게으름이라고 강조한다. 비록 콕스 박사가, 죄를 본질적으로 교만으로 보는 성경의 견해를 거부하고, ‘성인된 인간’(man come-of-age)이라는 잘못된 개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세계에서 죄의 핵심적인 형태는 무감각이다....아담과 하와에게 무감각이란 뱀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할 일에 대해서 말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그것은...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을 포기함을 의미한다.”고 말함으로써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선택한다는 것은 인간됨의 본질에 속한다.

단순히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림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다. “어떤 뱀도 우리에게 우리가 할 일을 지시하지 못하게 하라.” 나치 전범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변명은, 단지 명령만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언제나 동일하게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물었다.

 

성경이 죄를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남자와 여자)을 심각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책임이 어느 정도 감소된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책임의 감소는 언제나 인간서의 감소를 수반함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의 품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가 인간됨의 영과의 일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와 잘못을 시인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구원의 즐거움에 들어가며 그리하여 더욱 완전히 인간적이며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고백과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지도 않고, 그리하여 사죄로 인도하지도 않으면서 죄에 빠져드는 온갖 탐닉이야말로 불건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