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
하나님이 거룩하시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그분의 눈은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우리와 그분을 분리시켜서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감추어지게 하며, 따라서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기를 거부하신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눈을 고정할 수 없고, 그 체험을 견딜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등’을 바라보도록 허락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수는 없었으며, 햇빛을 볼 수는 있었지만 태양 자체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잠시라도 보는 것이 허락되었던 사람은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승귀하신 야훼의 환상을 보았을 때, 자신이 부정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이 자신을 욥에게 직접 나타내셨을 때, 욥은 자신을 ‘멸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스스로 한하고). 에스겔은 타오르는 불과 밝은 광채 속에서 ‘여호와의 영과의 형사의 모야’만을 보았지만, 그것으로도 그를 땅바닥에 거꾸러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와 비슷한 환상 앞에서 다니엘 또한 얼굴을 땅에 대고 혼절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속에, 그의 죄악에 대한 느낌과, 그리스도 앞에 설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일으키셨다. 요한이 그분의 하늘에서의 위언을 보았을 때, 그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에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분의 진노인데, 사실 이것은 악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대응이다. 진노의 하나님은 구약에 속하시며,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시랑이시라고 말함으로써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듯이,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타스커(R.V.G.Tasker)의 주장이다. “하나님의 성품의 이 두 가지 속성 사이에서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은 성경의 공리다. 또한 과거 대부분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이 두 측면에 동시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예수님이 살인과 동일시하셨고, 바울은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타락한 본성의 행위’의 하나로 선언한 그 감정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도드(C.H.Dodd)와 그의「로마서 주석」(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에 연관되어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썼지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신다’라고는 결코 쓰지 않았다고 했다. ‘진노한다’라는 이 동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 외에도, 명사 ‘올게’(ojrghv, 분노 혹은 진노)를 바울은 계속해서 ‘기묘한 비인격적 방식’으로 사용한다. 바울은 ‘진노’ 혹은 ‘그 진노’를 언급할 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거의 절대화시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말하며, 어떻게 ‘율법이 진노를 가져오는가’를 말하며, 또한 어떻게 진노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임했으며’, 한편 어떻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박한 진노’에서 구언을 얻는가를 말하고 있다. 도드의 추론적 결론은, 바울의 진노의 개념을 견지한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덕적 세계에서의 인과(cause and effect)라는 필연적 과정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한슨(A.T.Hanson)교수는 자신의 포괄적인 성경 개략인「양의 진노」(The Wrath of the Lamb)에서 도드의 주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노의 비인격적 성격이 중요한 것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비인격적 성격 때문에, 바울은 진노를 곧장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도 되었으며, 진노를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자초하는 과정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진노는 ‘전적으로 비인격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진노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도 되었으며’라는 표현은 내면의 생각을 노출시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바울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진노하는 개념에 대하여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을 믿고 가르쳐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벗어날 길을 찾다가 마침내 진노는 하나님의 감정이나 속성, 혹은 태도가 아니라, 죄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인격적인 역사적 과정임을 발견함으로써 그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이 의미하는 것이,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라고 우리가 일단 생각하게 된다면..., 어떤 의미에서 성자는 성부의 진노를 견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또한 그런 이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ㄴ이 주신 우리의 도덕적 저의의 감각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키면서 법정적 견지에서 모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진노’를 당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형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인가의 죄의 결과를 당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진노’를 비인격적인 과정으로 재구성하려는 도드, 한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도는 최소한 ‘입증되지 않은’것으로 선언되어야 한다.
결국 바울은 ‘카리스’(cavri",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을 때가 가끔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그는 은혜가 ‘넘침’ 혹은 은혜가 ‘다스림’이라는 말을 쓴 바 있다(롬 5:20-21). 은혜란 바로 우리를 향하여 자비롭게 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카리스’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격적 행동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게’ 역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적대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다면 분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제임스 데니는, ‘영혼이 보기에 나쁘다거나 해롭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 대한, 영혼의 본능적인 분노 혹은 반응’이며, 또한 ‘해치는 것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라고 했다. 레온 모리스는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의 신성한 반발’이며,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의 강인한 반대’다. 하나님의 분노는 절대적으로 순결하며, 인간의 분노를 악한 것이 되게 하는 그런 요소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분노는 대개 방종하며 억제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원칙이 있고 조절되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발작적인 폭발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불쾌한 감정과 보복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악에 대한 정죄 속에서만 표현되는, 하나님의 계속적이며 확고한 적대(antagonism)이다. 하나님ㄴ은 사적인 원한이나 앙갚음 같은 것을 전혀 가지지 않으신다. 실로 하나님은 그 적대자에 대해 감소되지 않은 사랑을 동시에 유지하신다.
찰스 크랜필드(Charles Cranfield)은 하나님의 ‘올게’는 “무분별하고 부절제하며 비합리적인 분노의 악몽이 아니라, 인가의 ‘아세베이아(ajsevbeia, 불경견)와 ’아디키아‘(ajdikiva, 불의)에 의하여 일어나며, 그것들을 향하는 거룩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진노다.”
거룩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공통적인 것은, 이 둘이 죄와 병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폭로하며,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대적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으며,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이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 성경에는 몇 가지 은유가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은유는 높음(height)이다.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불리며, 시편에서도 ‘지극히 높으신 야훼’라는 이름으로 친근하게 불린다. 그분의 높이 계심은 자연에 대한 그분의 주권, 땅과 ‘모든 신들’에 대한 그분의 주권을 나타내며, 죄인들이 그분께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분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로 불리며, 그분의 언약적 약속의 무지개로 둘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좌는 ‘높고 숭엄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분’으로서 사람이 만든 성전에서 사시지 않는다. 이는 하늘이 그분의 보좌이며, 땅은 그분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인은 감히 그 앞에서 건방진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분은 교만한 죄인들을 ‘멀리서만’ 하시며, 또한 교만한 자의 높고 오만한 눈을 참지 못하신다.
하나님의 ‘높이’ 좌정하심이란 문자적인 사실이 아니며, 따라서 당연히 글자 그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저기 높은 곳’에만 계신 분으로 생각해 버리는 부르짖음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와 똑같이, 높음이라는 말을 초월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라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인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해 줄 수 있겠지만, 이 말보다는 ‘높이 계신 분’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인간과 다르심(otherness)를 더 명확하게 전달해 준다. 살아계신 크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아래를 내려보다는 것보다는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좋고,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우리의 밖을 쳐다보는 것이 더 좋다.
두 번째 상징은, 거리(distance)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높이’ 계실 뿐 아니라,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다. 실제로 그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금령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불붙는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때문에 이스라엘의 예배 순서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사신다는 두 가지 사실을 보완하는 진리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시 위하여 시내산으로 내려오셨지만, 또한 모세에게 이르셔서 산 아래의 둘레에 한계를 정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막(성전) 건축을 위한 지침을 내리실 때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리라고 언약하셨지만, 동시에 자신은 죄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거한다는 영원한 상징으로, 지성소 앞에 휘장을 드리울 것을 경고하셨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그것도 희생의 피를 들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어떤 사람도 그 휘장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만약 들어간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서 언약의 땅으로 막 들어가려는 때에, 그들에게는 엄밀한 명령이 주어졌다. 즉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언약궤)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수 3:4). 웃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주제넘은 행동의 위험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언약궤를 나르던 황소가 비틀거리자, 웃사는 손을 뻗어 언약궤를 잡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는 죽었다.
죄인은 전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결코 무사할 수 없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와 정결케 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말보다도 가장 두려운 말을 들을 것이다. “ 내게서 떠나가라.”
세 번째와 네 번째 상징은 빛과 불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또한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이 두 표상은 하나님께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며, 실제로 금한다. 밝은 빛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분을 ‘아무 사람도 볼 수 없다.’ 그 진리를 고의적으로 배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다섯 번째의 은유는 가장 극적이다.
이 은유가 표사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이 악을 배척하시는 것은, 마치 인간의 몸이 독을 토해 내는 것과 같이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구토는 아마 인간의 모든 반응 중에서 가장 격렬한 반응일 것이다. 성경에는, 가나안 족속의 비도덕적이고도 우상 숭배적인 행습이 너무나 역겨웠기 때문에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만약 이스라엘 족속이 그와 같은 죄를 범하면, 그 땅이 그들까지도 토하여 내치리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더욱이 그 땅이 악을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실상 여호와께서 그렇게 악을 거부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문맥에서 성경은 가나안 족속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가증히 여긴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도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완악한 불순종과 관련되어서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직역; 역겨워하여)이르기를”이라고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도 그 동사는 아마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는 말에서와 같이 메스꺼운 음식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을 자기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경고할 때 사용하신 헬라어 동사는 직역하면 ‘토하겠다’(에메오, ejmevw)는 뜻이다. 하나님은 죄와 위선을 참거나 ‘삭이지’ 못하신다. 그런 것들은 그저 하나님의 입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구토를 일으키는 것이다. 죄와 위선은 하나님께 너무나 불쾌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들을 자신에게서 제거하셔야 한다. 즉, 뱉어 버리시든지 아니면 토해 내치셔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개의 은유는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가 도저히 병존할 수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높이와 거리, 빛, 불, 토하여 냄이라는 상징은 모두, 하나님은 죄를 대면하실 수 없으며, 또한 만약 죄가 하나님께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죄는 거부되든지 아니면 불타 버리고 만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불행하게도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것 같다. 공중 예배 시에는 웅크리거나 쭈그리고 앉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함으로 부복하는 것은 고사하고 무릎을 꿇지도 않는다. 수치로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기쁨으로 손뼉을 치는 것이 우리의 더 큰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냉정한 말을 다시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때를...두려움으로 지내라.” 만약 우리의 재판자를 감히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주제넘은 짓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본 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해주신 사실을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것은, 먼저 “화로다. 나는 버린 바 되었도다”라고 외친 후이다. 데일의 말은 이를 보여준다.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킨다고 믿지 못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죄가 우리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역겨워하시고 그것에 의하여 분노하시며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로 행악자를 용서하시고 씻으시며 받아들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실 때도, 도덕적 타협의 길을 취하시지는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부루너는 그것을 이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이 무시되는 곳에는 복음의 중심 개념, 곧 중보자를 통해 드러난 계시의 독특성에 관한 이해 역시 없을 것이다.” “진노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사람만이 자비의 위대함에 압도될 것이다.”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다. 만약 우리가 죄를 만항이 아니라 실수로 해석하고, 하나님을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관대하신 분으로 해석한다면, 자연히 십자가는 불필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우리 자신을 보좌에 앉히는 것은, 십자가만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모두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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