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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 레오나드 스위트

JORC구원열차 2009. 1. 9. 00:22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레오나드 스위트 지음 / 윤종석 옮김 / IVP / 2004년 1월 / 195쪽 / 7,000원
 
 
▣ 저자 레오나드 스위트(Leonard Sweet)
레오나드 스위트(Leonard Sweet) 박사는 Spirit Venture Ministries 창설자 겸 총재이며, 드류 신학대학원(Drew Theological School)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전도학 교수다. 그는 조지 폭스(George Fox) 대학교 명예 객원교수이자 preachingplus.com 수석 저자이기도 하며,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교회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인기 있는 강사인 그는 자신의 3부작인 『Soul Tsuname』,『Soul Salsa』,『Aqua Church』를 비롯한 20여 권의 책을 썼다. 저자의 홈페이지는 www.leonardsweet.com이다.
 
▣ 역자 윤종석
전문 번역가, 서강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상담학(M.A), 골든게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교육학(M.A)을 공부했다. 역서로는 『묵상하는 삶』, 『빌리그레이엄 자서전』, 『영적 리더십』,『놀라운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의 모략』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정상적인 세상과 정상적인 지혜가 있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세상과 지혜가 있다. 정상적인 세상은 세상 그 자체다. 세상의 지혜는 ‘정상’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자들은 ‘정상인’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비정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규범 이탈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그 자체의 세상을 어지럽힌다. 선 밖으로 나가고 통념 밖에서 생각하며 기존의 해답을 거부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으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세계의 지혜의 일부다.
 
미국에서 신세대 영성 작가로 각광받는 레오나드 스위트가 ‘미친 지혜’라는 메타포로 제자도의 본질을 해부한다. ‘거기’, ‘모두’, ‘함께’, ‘있다’라는 네 가지 핵심 단어를 통해 성육신 제자도와 관계 제자도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본서를 재기발랄하면서도 도전과 감동이 가득 찬 보고와 같다.
 
▣ 차례
 
감사의 말
머리말 : NUTS 지혜
 
제1부 : 성육신 제자도 - 거기 있으라
1. ‘나는 별난 괴짜’ : 있으라
2. ‘결론적 내 자리’ : 거기
 
제2부 : 관계 제자도 - 모두와 함께
3. ‘여기는 정신병원’ : 함께
4. ‘바보의 극치’ : 모두와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레오나드 스위트 지음 / 윤종석 옮김 / IVP / 2004년 1월 / 195쪽 / 7,000원
 
 
머리말 : NUTS 지혜
 
NUTS라는 말은 이 책의 메시지를 푸는 핵심 단어다. 호두, 밤, 아몬드 등의 견과를 총칭하는 이 말은 동시에 바보, 얼간이, 미치광이, 괴짜라는 뜻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성령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Never Underestimate The Spirit), '목하 성령 아래‘(Now Under The Spirit) 등 그리스도인이 비상식적 지혜와 삶의 의미를 함축한 머릿글자로 이 단어를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역서에는 주로 NUTS를 그대로 쓰고,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의미를 풀어쓴 뒤 괄호 안에 넣었다 - 역주.
 
인간이 제정신을 잃을 때 천국은 의미를 얻는다. 필멸의 이성을 모두 등질 때 인간의 마침내 천상의 사고에 다다른다. -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정상적인 세상과 정상적인 지혜가 있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세상과 지혜가 있다. 정상적인 세상은 세상 그 자체다. 세상의 지혜는 ‘정상’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자들은 ‘정상인’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비정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규범 이탈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그 자체의 세상을 어지럽힌다. 선 밖으로 나가고 통념 밖에서 생각하며 기존의 해답을 거부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으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세계의 지혜의 일부다.
 
오늘날 교회의 최대 문제는? 바로 무기력한 정상 상태이다. 예수님이 ‘정상’이라는 단어를 재정의 하셨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세상 ‘정상인들’의 시각과 기능을 거스른다. 이 뺨을 맞으면 저 뺨도 돌려대고,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고, 여벌옷까지 내주고, 아랫사람의 발을 씻어 주고, 나를 저주하는 자 위에 축복을 쌓고, 분노 없이 살고, 목숨을 내주는 것 등 이것은 모두 ‘정상적인’ 사람들로서는 생각과 실천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힘든 것들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지혜를 뒤엎으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정상적인 관점이 아닌 예수님의 눈으로 보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특히, 탐욕과 자기만족에 찌든 비열하고 냉혹한 ‘정상인들’을-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그들을 버림받은 자, 잠재적 실패자로 보는가? 아니면 자신의 참 자아를 찾아야할 잠재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보는가? 복음서의 ‘이야기 형태’를 보든 바울의 ‘교리 형태’를 보든, 기독교는 우리를 직관적으로 반(反)직관적 삶을 살도록 부른다. 철학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신앙에 ‘신앙의 논리’란 있을 수 없다.
 
성공의 길은 섬기는 것이다.
얻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강한 길은 약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길은(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다.
당신의 강점을 알라. 왜? 그래야 그 강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곳은? 우리의 연약함 속이다.
자유하고 싶은가? 통제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라.
큰 자가 되고 싶은가? 가장 작은 자가 되라.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그를 축복하고 사랑하라.
 
예수님은 역사상 정상적 존재 기준을 가장 크게 이탈한 자였다. 온전한 인간이면서 온전한 하나님이니 말이다.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지배적 반응은?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가 아니라 ‘이 얼마나 해괴한 사랑인가’였다. 예수님은 “자기 땅(소유)에 왔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 심지어 자기 가족들까지 그분을 거부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메시아상’은 심지어 그분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한 자들마저 그분을 제거하는 것이 만인에게 상책이라고 여길 정도로 미친 것이었다.
 
일단 예수님을 만나면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제자도는 삶 전체의 영성이다. 여기 복음의 섬뜩한 초청이 있다. ‘엉뚱하고 이상한 남자’ 예수님이 당신의 규범이 될수록 당신도 점점 그런 신종 인간이 된다. ‘제정신’의 의미가 논리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신중하고 안전한 것이라면 기독교 영성은 제정신과 하등 무관하다. 기독교 영성은 극히 비논리적이고 역설적이며 가변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위험하다. 신앙의 세계는 예측불허의 별세계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이 ‘정상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가? 비정상으로? 신비롭게? 상식을 초월해서? 예외적으로? 나는 NUTS라는 말을 택하겠다. ‘성령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Never Underestimate The Spirit). 바로 NUTS다. 예수님의 지혜는 NUTS지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은 정상 세상과 지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은 NUTS 세상과 지혜다.
 
우리는 ‘외모를 본다.’ 이것은 정상 세상과 지혜다.
 
“그러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이것은 NUTS 세상과 지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 지혜다.
“믿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은 NUTS 지혜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고하신 것은 그들이 “나의 성물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더럽히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평범화하다. 정상화하다’는 뜻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정상화했다. 우리는 성공적 교회를 NUTS 세상이 아닌 정상 세상으로 판단해 왔다. 우리는 성령의 규칙이 아닌 세상의 규칙으로 삶의 시합에 임해 왔다. ‘더럽히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상처를 내다’는 뜻도 있다. 하나님을 ‘정상화’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에 ‘상처를 낸다.’ 정상이란 우리의 수단 방법을 다해 싸워야 할 대상이다. 사실 정상에 대해 죽고 NUTS에 대해 사는 과정이야말로 성경의 언어로 ‘새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성경에 따르면 평균적이거나 미지근하거나 정상적인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다.” 성경에서 가장 매서운 말 중 하나다. ‘토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게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무난하고 평균적인 교회들에게 “너희 때문에 내 속이 메슥거린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어리석은 자[바보]가 되었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길이 바보의 길임을 일관성 있게 강변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몇 문단 뒤에서 바울은 바보 개념의 배후 논리를 부연 설명한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바보이되].” 바울의 ‘바보’ 본문들에는 주석학자들의 통상적 해석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의미가 있다. 바울이 으레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모로스(moros)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어리석은 자, 바보’로 번역했지만 동일하게 그 말에는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정신이 나갔다’는 뜻도 들어 있다. 바울은 정말 ‘나는 미쳤다’고 말한 셈이다. 바울은 교회에게도 ‘미치라고’ 당부하는 것은 아닐까?
 
NUTS 은유에는 문제점이 있다. 대중문화가 ‘미치다’는 은유를 정상인들의 삶을 자극하는 데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이 나를 미치게 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자다. 여기서 ‘미치다’는 말은 더 이상 정상 상태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자란 [철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말대로 ‘도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예수님이 나와의 사랑에 미치셨기에 예수님과의 사랑에 미친 자다. 그래서 NUTS란 ‘엉뚱하다, 미쳤다’는 뜻일 수 있으나 그것을 ‘정신 착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실성한’ 사람들, 정말 ‘미쳐서’ ‘정신과 병동’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상세상에서는 미친 사람들과 제정신인 사람을 판별하는 것이 정신과 의사일 수 있다. 그러나 NUTS 세상에서는 아니다. 정상적인 것과 예외적인 것을 판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당신은 전혀 실성하지 않고도 NUTS가 될 수 있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나는 NUTS인가?” 당신 교회에 물어 보라. “집안에 NUTS가 있는가?” 친구들에게 물어 보라. “NUTS가 될 사람?”
 
어쨌든 정신 건강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으로 제작되는 인물은 둥글둥글 원만한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균형 잡힌 사고를 지닌 성경 인물을 당신은 몇이나 꼽을 수 있는가? 언제부터 영적 스승들은 ‘균형 잡히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았던가? 언제부터 창의력과 정신적 무질서가 서로 무관한 사이였던가? 셰익스피어는 “광인과 연인과 시인은 상상력이 총집결된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정신 분석이란 정신병의 치료책으로 자처하는 정신병이다”라는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말로 내 친구 치료자들을 놀린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목사 안수심사나 선발 위원회를 통과할 사람이 있었을까? 가장 유별난 NUTS 둘은 베드로와 바울이었다. 하나는 ‘분노’ 문제가 있었고 또 하나는 ‘권위’ 문제가 있었다. 어부 베드로는 성급하고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말 많은 반항형이었다. 천막업자 바울은 무자비하고 열성적으로 박해를 일삼고 관료적인 복종형이었다. 가장 위대한 성인들 중에는 심각한 죄인들과 거룩한 미치광이들이 있었다.
 
모세는 말더듬이였다. 요한 마가는 바울에게 퇴짜 맞았다.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였다. 다윗은 불륜을 저질렀다. 디모데는 궤양이 있었다. 나사로는 죽었다. 요한 마가는 발가벗었다. 예수님은 말썽꾸러기들과 걱정 많은 사람들과 즐겨 어울리셨다. 나오미는 과부였다. 이사야는 혀에 화인이 찍혔다. 미리암은 험담했다. 기드온과 도마는 의심했다. 예레미야는 늘 울고 우울해하며 자살을 생각했다. 엘리야는 탈진했고 나체 활보를 좋아했다. 세례 요한은 큰소리로 떠들며 메뚜기로 연명했다. 노아는 술에 취해 망가졌다. 베드로와 바울은 공공연히 반목했다...... 말하려면 끝이 없다.
 
세상을 똑바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NUTS 제자도의 정수는 다음 네 단어의 심오한 단순성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와 함께 거기 있으라.’ 간명해서 더 풍부한 이 네 단어의 신비한 특성은 기도할 때마다 더 분명해진다. 이 단순한 네 단어는 삶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날마다를 살아내기에 충분한 말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그 말을 위해 죽기에 충분하다. ‘모두와 함께 거기 있으라.’ 이 네 단어를 통달하라. 그러면 당신의 제자도는 의로워지고 당신의 교회는 정상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유지가 되며 당신의 삶은 밤새 성육신적, 관계적 NUTS, 서로 다른 요소가 함께 어울려지는 NUTS로 변화될 것이다.
 
제1부 : 성육신 제자도 - 거기 있으라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무엇일까? “함께 있어 주어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날아올 수 있는 최악의 비난은 무엇일까? “한 번도 같이 있어 주지 않은 사람!” 누군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은? “같이 있겠습니다.” ‘거기 있으라.’ 이 짤막한 두 단어에 창세 이후 역사상 벌어진 가장 위대한 일 -성육신-의 정수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구체적 시공을 초월하여 위에 계신다는 개념은 신플라톤주의의 공로였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사 그들과 관계 맺기 원하신다는 개념은 유대교의 공로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신적 존재 자체를 구체적 시공과 인성의 한계에 종속시키셨다는 개념은 오직 기독교의 공로였다. 하나님은 정상인들을 NUTS로 바꾸기 원하신다. 어떻게? “그분은 한때 지상에서 사셨던 그 삶을 내 안에서 다시 사신다.” 물질이 거룩함을 입고 필멸의 존재가 영원을 증거할 정도로 우리는 신성을 통해 ‘성신(成神, ingodded)’ 되었다.
 
‘거기 있으라’는 NUTS 제자도의 본질이다. ‘있으라’는 성품을 가리키고 ‘거기’는 정황을 가리킨다. ‘있으라’는 얼굴이고 ‘거기’는 자리다. ‘거기 있다’는 것은 당신의 얼굴(‘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가?’)을 알고 당신의 자리(‘나는 어디 있는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여기에 NUTS 제자도의 이중 충절이 드러난다. 이중 층절이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에 진실함과 동시에, 자신의 독특한 문화적 정황에 진실한 것이다. 모든 성육신은 강한 시대성을 띤다. 어떤 사역도 ‘시대에 뒤져서는’ 안 된다. 본래부터 존재 권리를 갖는 교회란 없다. 지역 교회가 ‘거기 있지’ 않으면서 그냥 길모퉁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의 존재 ‘권리’란 ‘거기 있으라’는 두 단어에 기꺼이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
 
1. ‘나는 별난 괴짜’ : 있으라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이 왜 여기 있으며 당신 삶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있으라’(또는 ‘되라’)는 성품의 통달이다. 내 모습의 강점 안에 든든히 설 때에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그들 되게 하며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뭇잎 색깔이 정말 가을에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날이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면서 나무들의 엽록소 생산이 중단된 것이다. 평소 엽록소가 잎사귀의 ‘진짜 색깔들’(또는 카로티노이드)- 수줍은 노란색, 도도한 금빛, 뽐내는 주황색, 숨바꼭질하는 적갈색-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얼굴 없이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아기는 매우 비슷해 보이고, 아기의 얼굴은 그 아이의 성격에 대해 거의 말해 주는 바가 없으며, 아기의 얼굴은 거의 전적으로 유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마흔을 넘긴 얼굴은 개성과 성품, ‘유전을 초월한 미’를 드러낸다.
 
사도 바울은 “세상이 너희를 그 틀에 끼워 맞추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했다. 세상이란 단어 대신 교회나 가정을 넣어도 인생의 화석화시키는 위력을 경계하라는 바울의 말은 왜곡되지 않는다. 교회는 생물학적 복제를 반대하지만 특정 풍미와 기교로 영적 복제를 일삼는다. 오만 가지 종(種)과 방주에 꽉 들어찬 희귀종 표본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행동과 시각과 사고와 예배를 바라신다고 정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된 걸까? 우리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몸과 상처를 하나님께 숨기고 자신을 가리려 한 그 순간 이후로 우리는 늘 자기를 가렸다. 우리 인간은 ‘화장’ 상태의 얼굴로 살아 왔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적인 진술은 말이 아니라 얼굴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걸맞은 얼굴을 얻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성품의 기본 자질이 모두 선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성형 수술로 구제불능일 만큼 나쁜 성품은 없다. 하나님은 살인자 모세에게 십계명을 맡기셨다. 천국의 첫 그리스도인(십자가상의 강도)이 일깨우는 것처럼, 당신의 행동이 아무리 나빠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길 수 없는 것은 없다.
 
‘성상 파괴’(iconoclasm)라는 단어에는 얼굴을 식별 불능으로 만든다는 뜻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상이다. 우리가 얼굴에 마스크를 쓰거나 화장하거나 얼굴을 변형시키면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성상 파괴’다. 우리 안의 하나님 얼굴을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큰 것은 ‘죄’다. 이사야의 표현으로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웠다.”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 얼굴을 가린다. 이는 종교 자체도 될 수 있다. 현대 세계에서 특별히 성물이 되어버린 규칙과 계율과 예배 법규도 될 수 있다.
 
‘성격이 유별나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야말로 최고의 수식어건만 우리는 그렇게 불리기를 겁낸다. 오늘날 성격이 밋밋한 제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덕은 성형 사회에 맞는 성형 도덕이다. 그래서 “그 사람보다는 낫잖아”라든지 “그건 네 성격답지 않다”는 탄식이 나온다. 성격 있는 제자도-‘성품’에 기초한 참 제자도, NUTS ‘특성’을 갖춘 제자도, NUTS 지혜의 이상과 인품과 정체성에 뿌리를 둔 제자도-는 하나님뿐인 본래의 얼굴을 취한다.
 
신생아는 생후 42분만에 얼굴 표정을 식별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표정을 통해 아기는 실체 즉 감정과 소리의 우주를 구축하며 그것이 결국 아기의 성품이 된다. 부모의 사랑의 눈길이 없으면 아기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얼굴을 응시할 때도 그와 똑같다. 예수님이 우리 얼굴에 참 자아의 소인을 찍으시는 동안 우리는 성품이 조합된다. 영성계발이란 정년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고 “우리가 그를 전파(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온전한)자로 세우려 함이니.” 자기형성(self-transformation)은 스스로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 형성(God-transformation)은 하나님이 우리 자아를 빚으시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참 형상이 되도록, 예수님의 얼굴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존재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스스로 내 ‘정체성’을 찾아야 하던 데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존재’를 발견할 때 우리는 진정 나 자진이 될 ‘자유’를 얻는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이 전이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다. 경건한 성품은 그래서 ‘성령의 열매’다.
 
NUTS 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니다. NUTS 지혜는 그리스도께 참예하는 것이다. NUTS 지혜는 그리스도를 이식하는 것이다. 물론 NUTS 제자도의 가장 지고한 형태는 성육신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으려면 당신 마음을 잃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 마음을 잃으면 의식을 되찾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고 그리스도의 얼굴로 조성될수록 우리 얼굴을 더 독특해진다. 우리 각자 안에서 하나님이 커지고 그리스도가 증대되면 우리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 얼굴이 그리스도의 얼굴로 변화되면 우리는 모두 달라 보인다. 예수님의 얼굴이 각자에게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가난의 고통을 없애 줄 부를 그분 안에서 본다. 부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자신을 탐욕과 이기심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줄 후한 마음을 그분 안에서 본다. 우울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삶을 수렁에서 건져 줄 희망을 그분 안에서 본다.
 
삶이란 신비이신 그분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스정교의 한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독교의 사명은 모든 의문에 쉬운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점점 더 신비를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지식의 대상이기보다 경이의 원천이다.” 교리란 신비의 관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일일이 번호가 표시된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험을 살고 믿음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다. ‘신비의 청지기’가 될 때 우리는 천사와 환상이 사는 세상, 신비와 마법에 싸인 세상에 들어선다.
 
2. '결론적 내 자리’ : 거기
 
성육신의 ‘미친’ 측면은 하나님이 모든 문화적 ‘거기’를 자신의 출생지로 성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사도들은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정통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존재 방식을 답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헬라인 제자들에게 헬라 방식을 찾도록-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방식, 헬라적 삶을 예수님 경험에 열어 놓는 방식, 헬레니즘 문화를 초월해 모든 문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모습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권하는 방식 등에서-가르쳤다. 그것이 기독교가 그토록 빨리 지리적으로 세계화된 비결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각 정황마다 모습을 달리했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히 ‘불어나려면’ 모든 문화 상황에 복음이 구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상명령이다. 20여 년 간 선교계의 핵심단어가 된 ‘토착화’는 성육신의 문화적 표현 및 확장이라 정의할 수 있다. 복음을 토착화한다는 것은 인류의 각 지역 문화와의 대화 속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시간에 들어설 때에만 시간을 벗어날 수 있다.
 
NUTS 제자들은 문화 부재주의자나 회피주의자가 아니다. NUTS 제자들은 자신의 정황을 사랑하며 그 정황을 살아낸다. ‘세상을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강도 높은 도전은 단번에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거기 있다’는 것은 인사이더(insider)이자 아웃사이더(outsider)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대한기독교서회)가 출간된 지 50주년이 지났다. 이 주제를 새롭게 다룰 필요성이 절실하다. 다음 인용하는 피터 슬레이터(Peter Slater)의 말에 이러한 주제가 약간 암시되어 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온전히 구현할 만큼 완전한 문화란 없다. 모든 국지적 요소가 하나님께 열납 된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은 문화에 묻히고 만다. 이렇듯 문화에는 변형할 것도 많지만 거부할 것도 많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때로 문화를 거스르는(예컨대 인종 차별의 문화) 그리스도께도 귀 기울여야 하고 때로 문화 속의(예컨대 위대한 미술이나 음악에서 접하는 문화) 그리스도께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과정 전체는 문화를 변형시키시는 그리스도다.
 
교회의 최대 당면 과제는 ‘거기’ 질문, 특히 ‘여기서 거기로 가는’ 질문들이다(“우리는 여기서 거기로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여기서 거기로 갈 것인가?”) ‘여기서 거기로’의 싸움이야말로 현대 교회 최대의 성장 산업이다. 그러나 우리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성경 해석만큼 문화해석에 능치 못하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문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걷기’보다 ‘하나님과 말하기’에 더 능하다. 우리는 해괴한 시대를 살고 있다. 시대의 해괴함은 점점 더해 갈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혁신과 변화에 대한 교회의 통상적 반응은 성육신과 참여가 아니라 정죄와 분리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두신 세상이 아무리 괴상하고 반감을 줄지라도 NUTS 제자들은 그 세상을 위해 ‘거기 있는’ 자들이다.
 
21세기 벽두에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최대의 전쟁은 폐쇄 시스템과 개방 시스템 사이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모든 나라, 모든 기업, 모든 종교, 모든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다. 9.11 사태는 폐쇄 시스템과 개방 시스템 사이의 싸움이 표출된 한 단면일 뿐이다. 빈 라덴이 의도한 9.11의 청중은 서구인들이라기보다 13억의 이슬람 동지들이었다. 9.11은 세상 회교도들을 설득해 이슬람의 폐쇄된 가르침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기획단 사건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의도는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아랍의 거리들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9.11 사태는 갈수록 미래가 자료 개방 운동과 비슷해지는 데 대한 폐쇄 시스템의 공포 반응이었다.
 
세계 최초의 ‘자료 개방’ 소비 제품은 웹사이트에 제조법을 공개한 ‘오픈콜라’(OpenCola)라는 음료수다. 현대 그 밖의 ‘자료 개방’ 작품으로는 ‘열린 법’(OpenLaw), 오픈오디오(OpenAudio) 그리고 위키피디아(Wikipedia)라는 백과사전 등이 있다. 사람들은 영성 면에서도 점차 자료 개방이 되어 가고 있다. 자료 폐쇄 시스템(교단이든 종교든)에 끌리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대신 자료 개방 시스템(초교파 교회든 자기가 만들어 내는 영성이든)을 더 많이 찾고 있다. 그러나 정황이 개성을 몰아내지 않으려면 미래는 독점 기반과 개방 기반을 모두 요한다. 인생의 주요 운영 체제에 관한 한 우리는 리눅스(자료 개방)와 윈도우즈(폐쇄 독점 시스템)가 둘 다 필요하다. 삶이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인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개방 시스템과 폐쇄 시스템을 함께 가동하라. 그것이 인생 시스템에 대한 NUTS의 지혜다. 이것은 복음의 양면성의 일부이자 복음의 특성이다.
 
더블부팅 1
개방 시스템 : 미래를 직시하라. 폐쇄 시스템 : 과거에 의지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의 질서에서 끌어내 광야의 혼돈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엉겁결에 미래로 떠밀릴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 대해 대화하고 논의하고 토론하며 미래를 이끌 것인가? 기독교야말로 이 일에 능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 선조들은 언제나 후퇴할 때가 아니라 전진할 때 하나님을 만났다. 우리 상황의 아이러니는 최근 생겨나는 문화가 20세기보다 1세기를 훨씬 더 닮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의 참된 ‘독창성’은 우리를 기원으로 데려간다. 복음이 1세기 세계에 어떻게 퍼져 나갔는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준비된 모습으로 ‘여기’ 새 세상에 복음을 확산시킬 수 있다.
 
더블부팅 2
폐쇄 시스템 :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개방 시스템 : 아무도 성령을 막을 수 없다. 그분은 원하시는 대로 불어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전혀 뜻밖의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하신다.
 
기독교를 개방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경계선을 폭파시키고 규칙을 깨뜨리고 놀라게 하고 자유케 한다. 성령이 계신 곳마다 자유가 있다. 동일하신 한 분 성령님이 우리를 감화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타적으로 선택케 하신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끌어 모든 민족을 무조건 수용케 하시고 가장 뜻밖의 장소에서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신다.
 
폐쇄 시스템의 행동에 반응하는 최선책은 최대한 개방하는 것이다. 개방 시스템이 폐쇄 시스템의 공격에 대응하여 폐쇄하기 시작할 때, 싸움에 이미 지고 있는 것이다. 테러에 대한 응답은 용기다. 증오에 대한 응답은 사랑이다. 폐쇄 시스템에 대한 응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 크게, 더 훌륭히, 더 철저히 개방하는 것이다. 폐쇄 시스템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법한 일로 만들 때 개방 시스템은 있을 법한 일을 있을 수 없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 예측과 상상이 가능한 일 -폐쇄하고 닫아걸고 밀쳐내는 것- 을 해서는 안 된다.
 
더블부팅 3
개방시스템 : 문화적 적응 폐쇄 시스템 : 부족의 정체성
 
교회는 문화에 적응할 것인가? 즉 좀더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해 새로운 범주들을 전용할 것인가? 인도네시아 가톨릭 주교단은 ‘문화적응’을 이렇게 정의했다. “문화적 적응이란 기독교적 삶의 경험을 현지 문화 속에 통합하는 과정이다. 그럴 때 그 경험은 현지 문화의 요소들을 통해 경험될 뿐 아니라 그 문화에 새로운 방향을 주고 그 문화를 재창조하는 살아 있는 힘이 된다. 그리하여 그 문화 속에 새로운 ‘교제권’이 출현하며 그것은 다시 전 세계 교회를 부요하게 한다.”
 
성육신 기독교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 내지 민족의 정체성을 다치지 않으면서 기독교 문화에 속하게 해주는 흡수성 문화다. 불행히도 다국적 기업들이 교회보다 더 ‘성육신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세계화라는 단어만 들어도 폭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세계화를 정의와 평화의 길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도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세계화가 제국주의와 같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세계화는 실제로 빈곤 근절에 기여할 수가 있다. 가난한 자들을 그냥 가난하게 놓아두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을 세계 경제에서 제쳐놓으면 된다. NUTS의 세계화 시각은 상품보다는 자유를 뜻하지만 그래도 세계화는 풍요를 가난한 자들의 유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다.
 
개방 시스템의 주요 동인은 정체성과 관심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되면 될수록 우리 행동은 더 부족/민족적이 된다. 세계화가 우리를 백조나 작은 ‘나’들로 바꿔 놓을수록 우리는 바다표범이나 작은 ‘우리’들로 더 똘똘 뭉친다. 백조는 서로 거리를 두지만 정반대로 바다표범은 사회적 내지 개인적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잔뜩 포개어 살아간다. 미래는 민족적, 국가적, 종교적, 인종적 자긍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미국은 최초의 진정한 세계화 국가다. 다중 문화가 미국의 정체다. 미국이 세계를 바꾼 것보다 세계화가 미국을 바꾼 것이 훨씬 깊다. 다시 말해 세계화는 미국화를 뜻하지 않는다. 소위 ‘지구의 미국화’는 기껏 가장 피상적인 결정들하고나 상관된다. 즉 상의 밑에 어떤 바지나 운동화를 신을 것인가 또는 어떤 음료를 마실 것인가 따위다. 지배적인 미국 백은 문화는 더 이상 규범이 아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329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뉴욕 대교구 미사는 35개 언어로 드려진다. 미국 내에 375개의 이슬람교 학교가 있다. 미국의 ‘아시아화’를 말하는 학자도 있다. 우리는 획일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다양성의 경주에 숨이 가쁘다. 오르카스 섬에 있는 몬테소리 학교는 전체를 녹여 하나로 만드는 용광로나 도가니가 아니라 개별 타일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모자이크다. 가까이 가 보면 개별 색채들이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 전체 그림을 보면 경계선들이 서로 섞인다.
 
모든 문화에 적용되는 보편의 기준들과 진리가 있다. ‘내 현실’과 ‘현실’ 사이에는 철학적 차이가 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은 상대론이 아닌 절대 진리의 전략이다. 오늘 교회가 당면한 최대 도전 중 하나는 진리의 고아가 되어 상대론의 미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상대론은 절대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상대화되었다. 그러나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이 꼭 진리의 전략만은 아니다. 역사상 최악의 악인들 중에도 상대주의자가 아닌 도덕적 절대주의자들이 있었다. 몇 명만 꼽자면 히틀러, 짐 존스, 폴 포트, 오사마 빈 라덴, 티모시 맥베이 등이다.
 
나는 거기 있을 것이다.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나와 당신의 고통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당신의 회의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당신의 실패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거기 계신다’고 약속하신 분이다.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 우리의 미래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이 떠오르는 미래 속에서 하나님은 ‘거기 계실 것이다.’ 우리도 ‘거기 있을’ 것인가?
 
 
제2부 : 관계 제자도 - 모두와 함께
 
사역은 이해시키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저 바깥, 21세기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추구를 이해하고자 정말 우리의 과제를 다해왔다. 말해보라, 당신 교회는 문화 비판만 하는가 아니면 문화에 말을 거는가? 당신이 개혁 패러다임에 있다면 순전함이 목표다. 당신이 선교 패러다임에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이 목표다. 성경적 모델은 개혁적이자 동시에 선교적이다. 당신이 선교 안에 있다면 수단은 모두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함께(with)는 관계적 단어다. 모두(all)는 선교적 단어다. ‘모두와 함께’라는 이 간단한 두 단어에 대한 오해로 ‘성전(聖戰)’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3. ‘여기는 정신병원’: 함께
 
‘함께’라는 이 작은 단어가 예수님께 얼마나 중요했는지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함께 있자’고 하셨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뽑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다. 그분은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자신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심이었다. 예수님은 이 ‘함께함’의 초점을 내면에 두실 때도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런가 하면 그분은 외면의 ‘함께함’을 지적하실 때도 있었다. 즉 예수님은 삶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좋아하셨다.
 
그런 이유로 존 쉬어(John Shea)는 예수님을 ‘교사’나 ‘랍비’보다 ‘영의 스승’으로 부른 바 있다. 그분은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신다. 그분은 열정적으로 사람 중심이다. 예수님은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예수님의 영 자체가 전달된다. 여기서 우리는 스승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 사이의 관계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경험의 결론을 전수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시는 실재를 제자 또한 경험하기 원하신다. 가장 깊은 순간 그것은 신념과 신학의 나눔이 아니라 아바(Abba)로의 인도다.
 
성육신은 함께함의 사건이다. 십자가도, 부활도 함께 함의 사건이다. 사실 함께함은 사역의 기본적인 영적 방향이다. 21세기 핵심 신학 용어는 관계다. ‘함께’는 관계의 언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어떤 진선미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는 한시적 세계에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21세기 교회의 도전은 기관이 되기보다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곳, 좋은 시설에 치중하기보다 신앙 성장에 치중하는 곳, 회의 소집에 능한 사람들이 지도하기보다 대화착수에 능한 사람들이 지도하는 곳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관계가 우주의 궁극적 실재임을 배운다. 관계가 정체성을 선행하는 유대 역사의 언약 주제는 신약에도 계속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하나님도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참여자시다. 신학자 아서 맥길(Arthur C. McGill)은 말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은 혼자 신적 정체를 보유하신 채 아무에게도 그것을 갖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의 특징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은 그 정체성을 공유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하시고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Abraham Heschel)은 그것을 “존재란 공존이다”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관계에 들어 가신다기보다 하나님 자신이 관계시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 정체성을 지는 우리는 NUTS 지혜의 상태로 살아간다. 아서 맥길은 그 상태를 “받기는 받되 갖지 않는 상태, 끊임없이 받는 상태”라고 했다. 받는 훈련이 부족한 현대인들은 바울의 한 질문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에 대한 맥길의 도발적 묵상을 무시하고 거부해 왔다. NUTS제자들에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주어진 것을 받는 훈련이다. 받는 훈련은 우리 ‘존재’ 자체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관계로부터 받는다. 우리는 정체성을 ‘소유하기’보다 함께함으로부터 정체성을 ‘받는다.’ 받는 자세를 감당할 수 없다면 우리는 관계됨의 복된 상태를 공유할 수 없다.
 
시인 오든(W.H. Auden)은 “인간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오직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피력했다. 좋은 제자와 나쁜 제자는 비슷한 토대 위에 있다. 그러기에 좋은 사역과 나쁜 사역도 마찬가지다. 목회자의 첫 소명은 안수 받은 사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가 사역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 관계가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가 우리 안에서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 때문이다.
 
예수님의 미친 제자들에게는 이런 함께함이 더욱 사실이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아픔은 나를 찌르고 내 절망은 당신을 뒤덮고 당신의 침묵은 나를 깨운다. 이 상호성 의식이 현대인들에는 달의 가리워진 면 같지만 포스트 모던 시대의 우리에게는 인류 최초의 달 착륙만큼이나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의 가장 ‘정신나간’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친구’ 관계와 ‘원수’ 관계에 대해 말한다. NUTS 제자들에게는 둘이 하나다. 사샤 기트리(Sacha Guitry)의 말처럼 훌륭한 배우를 ‘자기가 사랑하는 여배우보다 사랑하지 않는 여배우에게 더 실감나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친구보다 원수에게 더 헌신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쨌거나 초대교회는 네로를 위해 기도했다.
 
교회는 견과들의 집(nuthouse, 실은 ‘정신병원’이라는 뜻-역주)이되 한 종류가 아니라 혼합 견과들로 꽉 차 있다. 견과들을 품종과 종류별로 구분하려는 ‘동종 단위 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 HUP)는 기독교 영성의 함께 함에 어긋난다. 신약 성경에서 다중 문화가 아닌 교회를 하나라도 찾아보라. 혼합 NUTS가 없이는 사도행전 2장의 교회도 없다. NUTS 제자들은 예배할 때 거울보기에 관심이 없다. 혼합 NUTS, 그렇다. 그러나 ‘호화 혼합 NUTS’는 아니다. 오직 ‘보통 혼합 NUTS’일 뿐이다. ‘호화’라는 말이 붙을 때마다 부실한 땅콩은 속에서 빼냈다는 뜻이다. NUTS 제자들에게는 그런 천하고 흔하고 쓸모 없는 땅콩들이 같이 있어야만 한다. 나는 안다. 나도 그 중 하나, 하나님의 땅콩이다.
 
땅콩을 사랑한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가장 실천이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미시시피 주 주지사가 주 내 5,500개 각 교회와 유대인 회당에 가난한 가정을 하나씩 맡아 재기를 도와 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다. 한 가정만 맡아 달라는 것, 그게 전부였다. 도전에 응한 곳은 267개뿐이었다.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조사해 보니, 가정과 연결되어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는 곳은 15개 교회에 불과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전 세계 에이즈 교육과 예방 프로그램들에 돈을 낼 가능성이 불신자들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인기 없는 일들에 용감한 대변자로 알려진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던가?
 
당신의 함께함의 증거(witness)를 측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미(美), 특히 삼위일체의 완전한 미를 분석하려 개발했던 평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참된 미(우리의 경우, NUTS 증거의 미)는 온전함, 조화, 광채라는 3개의 특질로 측정될 수 있다:
 
1. 온전함이란 순전한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당신은 ‘세상과 더불어’있는가? 당신의 존재는 삶의 증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온전함이란 의도적 관심이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고난받는 자에게 관심을 베푸는 능력은 극히 드물고 어렵다.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 아니 기적이다”고 믿었다.
 
2. 조화란 사물간의 관계에 대한 존중과 공명을 뜻한다. 만인이 서로 이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우리는 저 멀리 휩쓸려 가 버린다. 함께함의 조화는 영적 현실을 인종간 화해나 사회 정의 같은 물리적 현실과 구분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죄는? 그는 자기 형제가 다섯인 줄 안다. 그러나 실은 여섯이다. 집 없고 가난한 거지가 그의 여섯 번째 형제다. 사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친히 이렇게 물으실 때 우리가 판단 받을 기준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느냐?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느냐?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느냐?”
 
3. 광채 속의 함께함이란 우리 지식과 커뮤니케이션의 명료성이다. 위로 우러르고(온전함) 곁으로 다가감(조화)과 아울러 우리는 큰 소리로 거리낌 없이 말해야 한다(광채). 광채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4.‘바보의 극치’ : 모두와
 
우리에게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이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장치나 심지어 평화의 상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상징이다. 무지개가 하늘에 놓은 것은 하나님이 인류와 창조 세계에게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인류와 맺으신 언약을 하나님께 일깨운다. 무지개를 보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에 염증이 나심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를 저주하여 말살하지 않으시곤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운명의 잔인한 장난에 망하는 인생들을 본 전도서 기자는 부서진 무지개에 대한 고급반 강좌를 이렇게 들려준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자기 잘못이 전혀 없어도 삶이 난파당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욥은 부서진 무지개를 통해 하나뿐이 구명보트를 잡아당기고 있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심지어 예수님도 부서진 무지개를 아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감옥에서 죽음을 앞둔 사도 바울은 부서진 무지개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모든 상황에 ‘자족하는’ 비결, 모든 부서진 무지개를 견디는 비결의 자원은 무엇인가? 바울의 비결은 이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비결은 두 글자 단어 모든/모두다. 극히 단순하면서도 극히 복합적이고 극히 신비로운 비결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당신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삶 속에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일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 모두라는 두 글자 단어야말로 부서진 무지개를 넘는 비결이다.
 
주의 [모든] 은혜로
[모두]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모든”은 맹인용 흰 지팡이의 붉은 끝이다. 그것을 톡톡 치며 우리는 어둠 속으로 계속 나아간다. 부서진 무지개에 연신 걸려 넘어지면서도 우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 모두 때문이다. 붉은 끝 “모든”은 성경 어디에나 있다. “모든”의 약속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모든”의 약속은 전부 다음 한 구절에 강력 접착제처럼 달라붙는다. 즉 그리스도는 당신의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는가?“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로 계시다는 바울의 말은 그분이 이미 ’만유‘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유 안에‘ 모시는 것이 우리 사역이다. 그럴 때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며‘ 그분이 ’만유 안에 만유‘로 계시게 된다.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로 계시옵소서”가 당신의 기도인가?
 
모두는 하나님이 뜻밖의 이상한 장소에 나타나기를 좋아하심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하나님은 우리 삶과 세상 속에서 우리 이해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습성이 있다. 모든은 하나님의 손에 그 습성을 일깨워 준다.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나님 말씀하신 것처럼-“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우리도 잠깨어 야곱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자유란 능력의 한계의 부재가 아니다. 참된 자유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무한한 모두를 잇는 것이다. 한계를 안고 있기에 우리는 모든 한계 위에 뛰어난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예수님의 고별 계명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세상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랑, 당신을 미치게 하는 사랑이다. 세상 제일의 사랑의 대가 예수님은 터무니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미치게 하셨다. 그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무분별한 사랑으로 악평이 자자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더욱 격노케 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라고, 그들 또한 세상 제일의 사랑의 대가들이 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에 미치신 분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정신적으로 미쳤다는 구실로 그분의 공생애를 종식시키려 했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에게 그의 복음이 ‘미쳤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두 글자 단어 ‘모든’의 위력, 사랑에 미친 그 위력으로 정상(正常)세계에 테러를 가하시는 분이다. 나를 미쳤다고 해도 좋다. 나는 여전히 이렇게 믿을 만큼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