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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구약의 제사법/성막 · 구약의 제사법

성막과 그리스도 -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by JORC구원열차 2009. 1. 14.

 

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1장 -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1. 성막을 주신 목적 
 
하나님께서 성막에 대해서 모세에게 가르치실 때에 그분의 마음속에는 세 가지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첫째는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셨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이에 반하는 인간들의 죄악에 관해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는 그 죄인들이 구원에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이셨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실 한 장소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즉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이심으로 죄성으로 오염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 가운데 그대로 거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던 방법을 볼 수 있다.
 
그 처음은 날이 서늘할 때에 에덴동산을 거니시며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신 사건이다(창 3:8).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방법과 특정한 장소에서 인간들을 만나셨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 준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고(출 3:4),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고 명하셨다(출 3:5-12). 
 
세 번째로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구속받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출 13:21). 구름은 낮에 그들에게 그늘을 제공하였고, 불은 밤에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광야 생활 40년 내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다. 
 
네 번째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대로 성막을 건립하기를 마쳤을 때 그분께서는 성막 상공 그 구름 위에 임재하셨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 40:38). 성막이 건립되기 전에 이스라엘은 그 구름이 움직일 때에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막이 건립된 후에도 그 구름으로 그들의 이도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출 43:36-37).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 때에 지어진 성전 가운데 임하셨다. 성전이 완공되고 나서 솔로몬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하셨다. 이에 대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대하 7:1). 또 연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다"(대하 7:2)고 기술한다. 그리고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과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반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대하 7:3)고 했다. 
 
여섯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약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성경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의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고 했다. 
 
일곱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의 공생에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후 모든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요 14:17;요 16:17). 오늘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신다(엡 1:14). 또 성령께서 모든 성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각 성도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고전 6:19).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우리가 그분께 속하게 되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복음의 물결이 온 세상에 바다처럼 흘러넘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을 특정한 삶에게만 나타내신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가! 우리의 증인된 삶을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길 원한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조인됨을 가르치시기 위함 
 
성막을 주신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인간의 철저히 조인됨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인간의 죄악된 성품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치는 우리가 나중에 살피게 될 성막의 예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죄인된 인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지성소를 닫아 놓으셨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막 울타리에 쳐진 세마포로 만든 벽이 죄인들의 성막 출입을 막고 있다. 규정된 길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다. 여기에는 조금의 예외도 허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희생 번제의 피를 통해서였다. 이 희생 제물은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그럼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첫 번째는 구약 시대의 성막의 식양에서, 그 다음은 성전에서, 마지막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서 보여진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한 길이 오직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길로 나아와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의 자리로부터 구속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행 4:12). 구원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다(엡 2:8-9;롬 4:5).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길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진노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요 3:18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요 3:16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또 요일 5:11, 12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을 통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이다. 
 
3) 구원을 위한 오직 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 
 
성막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이시기 위함이셨다. 그것은 번제물의 흘려진 피를 통하는 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 시대의 성막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 번제물의 피 흘림에 대해 말하기를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히 9:21)라고 했고, 22절에서 이것의 의미를 덧붙인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피 흘림이 없으면 아무런 사함도 없다고 말한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잇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3-24)라고 말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의 몸을 주셨고, 죄를 위해서 그의 피를 흘리셨음을 강조한다. 히 10:9은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 첫 것이란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성막을 가리킨다.
 
다음 히 10:10은 이렇게 계속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도다." 구약 시대에 많은 번제들이 여러번 드려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한 번의 드리심은 그 모든 것보다도 더 우리를 온전케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9:14).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실로 우리가 받은 구속과 용서는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그 피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그분의 보혈로 우리는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분의 보혈로 우리는 깨끗게 함을 받았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또한 우리는 그분의 보혈로 화평을 얻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대환란 기간에 성도로 하여금 사탕에게 대항해 승리케 하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바로 지금까지도 사탄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히 2:14은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되...."
 
2. 성막을 구분하는 세 개의 휘장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찾아오셔서 성막이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먼저 지성소에 놓여야 했던 언약궤에 대해 말씀하시고 맨 마지막에는 성막뜰에 있는 번제단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막에는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분류하는 세 개의 휘장이 있었다. 우리 사람의 편에서는 성막뜰, 성소, 지성소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순서와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거하신 지성소에 놓였던 언약궤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하시고 마지막에 성막뜰에 대해 말씀하셨다. 즉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첫 관문부터 시작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로 죄인으로 하여금 당신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셨던 하나님 자신이 거하셨던 곳에서부터 시작하셨던 것이다. 한편 지성소에 놓여진 언약궤와 성막뜰에 있었던 단(壇)은 성막의 양극단을 대표한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결코 무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공정하게 심판하셔야 했다. 반면 성막뜰에 있었던 번제단은 죄인들이 그분의 자비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던 장소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계속하여 세밀하게 연구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약궤에서 곧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맨 먼저 성막뜰에 있는 번제단을 통하여서만 죄인들이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즉 죽음 없이는 그 어느 죄인도 절대 공의이신 하나님 앞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속죄를 위한 제물이 있어야 했고, 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단(壇)을 명하셨던 것이다. 이 단의 희생 제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진리를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제물은 하나님을 죄인들 앞으로 모시고 나오는 셈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신 것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고자 하심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 앞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의 부족을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갈보리 십자가까지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전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시고 하늘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빌 2:5-11). 즉 영광 가운데 계시던 그분께서 수치를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치욕의 자리에서 본래의 영광스러움으로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만나기 위한 완전한 은혜의 장을 여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완전한 의(義)의 옷을 입게 되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다. 성막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묵상할 때, 지성소의 언약 궤로부터 놋쇠 단까지 이르는 길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놋쇠 단에서 하나님의 궤로 가는 길이 속죄의 피로 넘치는 길임을 알게 된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요 3:16). 그러나 그리스도의 흘리신 속죄의 보혈이 각 사람에게 샘물처럼 솟아나는 생명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3.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께서 가지고 게신 기준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수준임이 성막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준수되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어떠한 용서하심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며, 조금의 오차도 허락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단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요구에서 나온 십계명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안에 놓여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다. 단지 희망이 있다면 속죄를 위한 제물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요구들은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힘입음으로써만이 충족되어질 수 있다.
 
성경은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라고 말한다.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키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자리에 있게 한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언약궤 안에 함께 놓여졌다. 아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던 제사장이었으며, 이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언약궤 안에는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셨던 음식인 만나의 항아리도 놓여졌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영양분은 항상 하나님께로만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기억시키기 위함이었다. 언약궤의 맨 위는 순금으로 평평하게 덮여 있고 그 위에 그룹 둘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을 속죄소라 하였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의 초점은 여호와는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속죄 제물의 피를 요구하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것을 통한 속죄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낸다. 인간이 죄를 지닌 채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의지하여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죄인들을 대신하여 충족시키시는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지키시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사랑을 베푸실 수 있으셨다. 롬 3:26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 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
 
4. 성막과 그리스도의 말씀 
 
성막은 요 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대응을 이룬다. 양자가 어떻게 대응관계를 형성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놋쇠단(번제단)이 놓여있었던 성막뜰에 해당한다. 번제는 단(壇) 위에서 하나님께 드려졌고, 이 희생 제물에 의해서만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성막뜰의 단과 성소 사이에는 또한 놋대야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물을 담아 두는 물통처럼 생긴 단순한 그릇으로서 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물로 자신을 청결케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 그 곳에서 손과 발을 씻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먼저 세상과 접했던 더러운 부분을 청결케 해야 한다. 이것은 히 10:19-22에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스도는 또한 자신이 곧 진리 되심을 말씀하셨다(요 14:6).
 
성막의 휘장 안쪽으로는 성소와 지성소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성소는 지성소보다 큰방으로서 제사장들이 이곳에서 하나님께 진리로 예배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들어갔던 성막의 성소에는 촛대(등잔)와 진설병상(떡상), 향단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세상의 빛과 생명의 떡이 되시고 모든 믿는 자들의 중보자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내가...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지정소와 짝을 이룬다. 죄를 대속하는 대제사장의 중보 사역에 의해서만 이스라엘은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은 구약의 광야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외형적인 회막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장막에서 죄인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따라서 그를 주로 고백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충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 일을 행하시고 난 후 그리스도께서는 "내가...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할 수 있으셨던 것이다. 요일 5:11, 12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 되심을 말해 주고 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5.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성막 
 
성막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성막에 있던 모든 기구들은 그분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다. 먼저 성막 자체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 오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처소였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고 성막의 모든 식양들도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미리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성막이 예배의 중심지였다. 비록 이후에는 성전이 성막을 대신했을지라도 그 진정한 시작은 광야에서였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성막에 대한 식양의 본을 따라 건립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에 대해 지시하실 때에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라고 하셨다.
 
성막의 구조는 모세의 구상에 일임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것이다. 히브리서는 특별히 모세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성막을 지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성막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곧 성막의 궁극적인 완성이시다.
요 1:14은 성막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거하시매"라고 번역된 헬라단어 "eskenosen"은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시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장막을 치심으로 거하셨다(tabernacled)는 것이다. 이는 구약 시대에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갖는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에 거하시기 위하여 세우게 하셨던 구약 시대의 성막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사람 가운데 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6. 교회의 모형으로서의 성막 
 
성막은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헬, 에클레시아)의 모형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또한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기 때문에(골 2:9-10) 신분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엡 1:22, 23은 그리스도를 몸 된 교회의 머리로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또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성막의 본을 따라 건립된 성전을 비유로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갖게된 신분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즉 성막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예표함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묘사하는 것도 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라고 말하고 있다.
 
7.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양상 
 
성막은 또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보여 준다.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속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들의 안식과 평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다양한 면들을 보여 준다. 성막에서 볼 수 있는 구원의 양상들은 이후에 계속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성소와 지성소에는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성막을 보는 사람이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느냐 내부에 서 있느냐에 따랄 두 개의 극단적인 입장이 생기게 된다. 이 입장들은 서로 분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성막의 외부는 남의 눈을 끌만한 것이 없는 시시한만한 풍체를 갖지 않으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그분의 내면에는 신성(神性)이 충만했다. 것이었지만 그 내부에는 노랄만한 광채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것은 곧 인간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된다. 즉 예수께서는 외모상으로는 흠모할 성막의 밖에 서있는 사람들은 뜰을 둘러싸 쳐진 하얀 세마포장과 뜰 안쪽에 서 있는 건물의 지붕 밖에는 볼 수 없었다.
 
하얀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의를 상징한다. 뜰 안쪽에 서 있었던 건물의 지붕에서는 뜨거운 햇빛에 바랜 해달 가죽의 우중충한 덮개 밖에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죄인, 혹은 자연인을 상징한다. 이들은 성막을 바라보더라도 자신이 그것에 빨려들만한 특별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번제물의 흘린 피를 의지해서 성막 안으로 들어갈 특권을 부여받은 제사장은 그 내부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직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지만, 오늘날은 모든 신자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히 4:14-16).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참되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성전 밖의 불신자와 성전 안의 성도가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바라본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들은 엄청나게 다른 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성전 밖의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의를 상징하는 하얀 세마포장으로 둘러쳐진 성막뜰 울타리의 벽만을 본다. 즉 불신자는 그리스도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심지어 그분의 이상과 도덕성을 찬양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는 아마 그리스도의 지혜와 가르침에는 갚은 감명을 받을지라도 그 분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는 코웃음 칠 것이다. 그는 성전 내부의 광채, 곧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영광은 보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기껏해야 위대한 성인 중 한 삶 정도로만 받아들여질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참 보화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도덕성과 인간성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고귀한 생을 살았고 사람들에 의해 순교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분께서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외부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만드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그들은 또한 종종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비웃는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뿐이다. 
 
외부에 서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단지 한 명의 순교자로 생각하지만 내부에 있는 사람은 빌립보서 2:6-8의 지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8.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먼저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행하셨고, 그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먼저 찾아 오셨다. 
 
1) 구약의 실례 
 
이에 대하여 먼저 구약에 나오는 실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인류의 초창기 시절부터, 곧 에덴동산에서 이 사실은 명백히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과일을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나오셔서 아담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아담이 대답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질책하셨다. 그러시고 나서 구속자를 보내시기로 약속하셨다(창 3:15). 그리고 구속자가 오실 때까지 그에 대한 대치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피 흘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짐승의 가죽옷"(창 3:21)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도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주셨던 상징적 대치물이었다. 
 
또한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도 먼저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두 형제는 각각 따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시고 가인의 것은 열납치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제사법에 순종하여 아벨은 피 흘림이 있는 번제인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고, 가인은 피 흘림이 없는 '당의소산'으로 제물을 삼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인의 제물은 인간 자신의 선행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교훈하는 것이다.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지 아니한고로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분하여 함이 어찜이냐고 물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해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먼저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어떤 제사를 드려야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지 가르치시기 위함이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그의 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 후 약 수 백년이 지나서 노아 시대 때에도 인간의 악함이 세상에 관영한 것을 보시고 먼저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 자시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 이십 년이 되리라"(창 6:3)고 하셨다. 인간이 극도로 악했을지라도, 그 분께서는 또 다른 백 이십 년간의 회개 기간을 주시는 은혜를 인간에게 베푸셨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때문에 하나님이 홍수로 그들 모두를 심판 하셨던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의 땅과 큰 민족을 약속하실 때에도 먼저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창 12:1-3). 그 분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에 그 곳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먼저 행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3:9-12).
 
애굽에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보내기 거부했을 때 하나님은 바로의 장자를 비롯해 애굽의 모든 장자에게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으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출 12:2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가르침대로 양의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출 12:7) 아무런 심판도 당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라고 말씀하셨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양의 피를 자기 집 문설주에 발랐으며, 이로 인해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2) 신약의 실례 
 
신약 성경 역시 구원을 주시기 위해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갈 4:4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될 때가 차서 성자 예수를 전 인류의 구속자로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속자는 창세 당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약속되어 왔었다(창 3:15). 범죄한 인간이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공의로운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었다.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먼저 구속자를 약속하셨다. 즉 롬 5:8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들이 너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어야만 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행이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에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성도들과의 영원한 교제를 위해서도 먼저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면 그들을 데리러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도 성도들이 그분과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먼저 찾아오신다. 이 놀라운 화목을 위한 그분의 약속은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그 곳에서 하나님과 죄인의 화목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심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미래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미래의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실 것과 그 때에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끌려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살전 4:13-18). 계 21:1과 계 22:1도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살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유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과 화목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찾아 오셨으니 말이다. 
 
3) 성막을 통한 실례 
 
성막도 역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을 나타내는 표본이 된다. 성막의 건립에 대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놓일 언약궤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셨다(출 25:10).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또 그러한 기준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 그러나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는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길을 따라 나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관을 궤 속에 넣으라"(출 25:21).
 
한편 지성소는 휘장에 의해서 성소와 분리되어 있었는데, 그것의 의미에 관해서는 이후에 논의될 것이다. 성막 건물 안에 있는 지성소 바깥쪽은 성소였다.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순금 등잔, 그리고 향단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진설병 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영혼의 양식을 섭취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5)라고 하신 주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순금 등잔은 "내가 세상의 빛이로다"(요 9:5)라고 말씀하셨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또 향단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한다. 요 9:4은 성도들의 기도와 향단의 연기를 연관지어 말한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 성소 역시 성막뜰에 대해서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성소 바깥쪽 성막뜰에는 놋으로 만든 큰 물두멍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청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물두멍은 성도들을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상징한다. 이는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하신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바깥쪽을 향해 더 걸어가면 성막뜰의 끝 부분에 번제단이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다. 히브리서 10:12은 그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들이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성막 뜰 역시 외부 세상에 대하여는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즉 성막은 한편으로는 번제를 드리러오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려져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막으로 나오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통로인 동쪽 입구를 통해서만 들어와야 한다는 제한성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구원을 위한 길은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야만 한다는 제한성을 갖는다. 한편 성막에서 하나님은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의해서만 자신에게로 나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길을 마지못해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그분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주신 것이다. 
 
신약선경은 그 분에게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즉 눅 19:10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요 1:12-13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한다. 또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소유한자, 즉 그 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주어지지 않는다(요일 5:10-12). 
 
한편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그분께로 나오기를 거부한다.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 5:4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리라"(요 3:16)라고도 약속하셨다. 
 
성막으로 가는 길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직행로였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면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로부터 성막뜰에 있던 번제단으로 나가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반대의 순서였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제단으로 먼저 나와야만 했다.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방향으로 성막으로 들어가야 할지 생각해 보자. 성막뜰의 울타리는 세마포로 된 벽으로 둘러 처져 있어서 성막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동쪽에 있는 입구를 통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일단 성막에 들어간 자는 맨 먼저 희생제물을 드리는 장소인 번제단을 바로 볼 수가 있었다.
 
제사장은 예배자가 바친 번제물 없이는 그를 위하여 더 이상 성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번제단을 통과한 후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놋으로 만들어진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순금 등잔 그리고 향단이 놓여 있었다. 성소 안쪽의 휘장의 내부에는 지성소가 있었다. 그곳은 하나님 자신이 거하셨던 가장 거룩한 장소였다.
 
신약 성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이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히 10:19). 구약 시대에는 단지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1년에 한 번만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성막을 바라볼 때,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즐거워하는 대제사장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에 대한 우리의 부족을 그리스도께서 채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실로 그 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한편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의 위치에서 하나님께우리의 섬김을 들려야한다. 그러나 그런 때에 조차도 주심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4). 실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9. 적용 
 
당신은 어떠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정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성막의 내부로 들어와 있는가? 즉 다시 바꾸어 말하면 당신 자신이 죄인임과 그 죄에 대한 대가를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과거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던 자리를 떠나서 현재 그 분을 당신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는가? 성막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기 위해 그 내부로 가는 길은 오직 희생 제물에 의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는 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1, 요 10:9, 10). 또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출입문을 통해 성막 안으로 들어 온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모형인 번제단을 마주 보며 걸어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성막이 모든 사람에게 배타적일 수도, 포용적일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막의 문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만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 얻는다는 것이다. 즉 그 한길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막문이 밖에서 닫혀졌지만 이미 그 길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문이 안으로 닫혀지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구원의 길로 들어오는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속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성막이 어떤 이들에게는 닫혀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열려있다는 사실은 마치 범람한 홍수를 피하기 위해 노아가 방주를 지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동물들과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에 여호와께서 그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창 7:16).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은 방주 안으로 들어간 노아와 그 일행을 홍수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믿음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방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셨다. 어떤 이들은 제외되고 어떤 이들은 포함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성막에서도 드러난다.
 
율법은 인간의 무서운 죄악과 절망적인 상태를 알게 함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반면에 성막은 믿음으로 나오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죄를 사망으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후 용서와 완전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막을 주셨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는 구원으로 나아갈 희망이 없는 자들이 철저히 자신의 조인된 모습을 인정하고 그분이 예비해 놓으신 길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준비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롬 8:3-4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은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