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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구약의 제사법/성막 · 구약의 제사법

성막과 그리스도 -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by JORC구원열차 2009. 1. 14.
 
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3장 -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행군 중에 장막을 치고 한 곳에 일시적으로 머물 때 하나님께서 그 열두 부족의 장막의 위치와 성막의 위치와 성막의 건축 재료들을 일일이 정해주신 사실은 다음과 같은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 성막의 위치 
 
 <정지시 이스라엘 장막 배치도>
 
이상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막은 이스라엘의 진영 사방 네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네 부족의 중앙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들 중 아무 곳에서나 거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한가운데 자리에 거하시기 위해, 곧 이스라엘의 중심에서 통치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성막이 그들의 중앙에 위치했기에 백성들이 성막으로 나아가기도 용이했고, 다른 종족들로부터 그것을 지키기도 쉬웠다. 성막을 덮고 있었던 구름은 진(陣) 전체로 퍼져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람들을 보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앞으로 나오게도 하신다. 신명기 23:14은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도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4).
 
신약성경 또한 이 진리를 강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계 1:13은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있다고 말한다 또, 계 2:1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계심을 이야기한다.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이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거하시고 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마친 후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요단강을 건넜다. 그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을 때의 언약궤의 역할을 주의하여 살펴보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7).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강은 갈라졌고 백성들은 마른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건너가기를 마칠 때까지 그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서 있었다. 이것은 성막이 지어졌을 때 지성소에 놓였던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각 성도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니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 사탄과의 영적 싸움 중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요일 4:4의 말씀으로 우리는 승리를 외칠 수 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허하고 계신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영적인 필요도 채우신다.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2. 성막 건축 재료의 준비 
 
성막을 짓는데 소용되는 재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이미 모아졌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것들이 성막을 지을 재료로 쓰여질 줄 몰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왔던 금, 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것들이 성막 건축에 소용되었다. 실로 광야 어느 곳에서 이 재료들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것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출발에 관해 지시하시면서, 친히 모세에게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출 3:21-22)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로서 오랜 세월 애굽 사람들을 섬겨왔지만 한 번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품삯을 다 받게 하신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모든 집의 장자들을 치시던 날 방에 이스라엘 민족은 급히 애굽을 떠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을 잊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5-36).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건립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거기에 필요한 대부분의 재료들을 이미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재료들을 소유하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성막을 짓기 위해 억지로 바치도록 강요받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마음을 바라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출 25:2).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으로 하여금 기꺼운 마음으로 이 물건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게 하셨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기꺼운 마음으로 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헌물의 대가로 하나님의 호의를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베풀어주신 그 은혜들로 인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바쳤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했다. "여호와의 명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출 35:4-5). 또 29절에서도 말하기를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고 했다.
 
아침마다 모세는 줄이 이어 가져오는 백성의 자원하는 예물을 받았다(출 36:3). 마침내 그들은 모세에게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라고까지 하였다. 그 장면을 그려 보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여 쓰기에 오히려 남음이 있도록 예물을 가져왔던 것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 36:6-7).
 
이 얼마나 보기 드문 놀라운 일인가! 오늘날에는 들어보기조차 힘든 놀라운 사건이다.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데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바쳐졌다는 예가 있기는 하지만 몹시 드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감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드림이 빚을 갚는 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므로 바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그분의 일이 확장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고후 5:14).
 
한편 신약 성경에도 헌물 또는 헌금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 그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나라"(고후 8:9).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께 사랑으로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헌금에 관해서 성도들은 또한 "이것이 곧 적게 심은 자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아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하려 하심이라"(고후 9:6-8)는 말씀을 듣는다.
 
또 영적인 도움을 입어 왔던 사람은 그 도움을 베풀었던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갈 6:6에서 이것이 잘 나타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명하신 의무이다. 또 성경은 이렇게 계속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성도들은 매일 매일의 양식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잠언에서도 나타난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잠 11:24-25).
 
이러한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늘날 양적으로 많은 재물만을 바쳐야 한다는 그릇된 사고(思考)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즉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느끼는 부담만큼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보다도 가장 우선되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하지 않은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촉구할 때에 이같은 기본 원칙을 말하였다. 즉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드렸던 마케도냐 교회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 기본 원칙을 언급하였다.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즉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헌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의 중요성은 롬 12:1에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주의해 보자. 이것은 자기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기 이전에 어떤 조건이 선행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롬 12장 앞에 세 장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11장 끝 부분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찬가로 끝을 맺는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이 찬송 후에 곧이어 바울이 롬12장 첫 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께 최소한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우리들은 전적으로 그분께 속해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 진리는 고전 6:19-20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즉 구약 시대에 성막에 거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값으로 사셨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성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들은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교회에 소속된 심술궂은 한 사람을 보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도록 해야 한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
 
3. 성막 건축 방법
 
성막 건축 방법에 대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라고 하셨다. 이처럼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서 철저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도록  한 것은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관한 진리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성막과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히 8:5은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또 히 9:23도 같은 말을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동물 희생 제물)로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예수 그리스도)로 할지니라."
 
이에 이어 히 9:24은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한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구약 시대의 성막이 "참 것의 그림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 따라 지어진 성막에 대하여 히 10:1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성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는 말을 주의해서 보라. 구약 시대의 성막과 예배는 장차 오는 하늘나라의 모형이었다. 특별히 성막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계획과 성도들이 행해야 할 것, 그리고 예배 방식과 우리가 신앙 성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의 모형이었다.
 
예를 들면 죄인의 구원에 관해서 성막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직접 죄인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리라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삶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길을 통해서만 나아가야 한다. 죄인인 인간 자신의 모습 그대로는 죄 없으신 그분 앞에 결코 나아갈 수 없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성막 건축 방법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식양에 따라야 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히 8:2은 이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마이 한 것이 아니니라." 또 구약 시대의 성막이 개인의 구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히 8:10이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죄인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방법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엡 2:8-9과 같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또 그 구원이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딛 3:5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엡 2:10은 이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을 위한 길이 오직 한 길 뿐이라는 진리가 가장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는 곳은 행 4:12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 요 14:6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갖는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편 하나님의 식양에 따라 지어진 구약 시대의 성막은 개인의 구원과 관계된 진리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 전반에 관한 진리와 교훈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에 거하시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의 생활 전반을 지켜보셨던 것이다.
 
오늘날 구약 시대와 같은 외형적인 구조물로서의 성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성막인 모든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그 속에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이 일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분은 성도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4:4-5)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이 살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거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다.
 
또한 성막 전체의 구조와 기구, 제사장의 역할, 이 모든 것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만들어지고 시행되어야 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하늘나라의 모형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성막이 이스라엘의 삶을 지도하는 율법 체계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갈 3:10은 특별히 이 원칙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성막에 관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식양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저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오리가 구약 율법 아래 살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노력할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다(갈 1:9). 왜냐하면,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행 4:12).
 
4. 성막 건축 재로 
 
출 25:1-7에는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할 재료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 가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은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족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든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성막의 재료들과 심지어 그 색깔까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세세한 것은 이 후에 논의되겠지만 각각의 재료에 대한 기본적 의미는 여기서 살펴보겠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그 재료들이 각기 기본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 모든 곳에서 그러한 상징적 의미들이 필연적으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 재료(혹은 색상)들과 그것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재료(색상), 상징적 의미*금, 신성(神性)*은, 구원*놋, 심판*청색, 천성(天性)*자색, 왕권*홍색, 희생*나무(아카시아),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가는 베실, 공의*기름, 성령*수양의 가죽, 속죄*염소털, 속죄*해달의 가죽, 그리스도의 인성 또는 외모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결합되었다는 사실은 성막의 기구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는데 금으로 싸여진 나무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나무는 그분의 인성을 상징하며, 금은 그분의 신성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다. 이것에 관해서 롬 3:25-26은 이렇게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 1:21-22). 하나님은 인간과 화목하지 않아도 부족할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반면에 인간은 그분과 화목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이 일을 이루셨다. 즉 그분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충족시켜 드렸으며(요일 2:2)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그 특권을 마음껏 누림과 동시에 화목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할 의무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
 
즉 행 4:12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원을 위한 길은 유일하며 우리는 이 진리의 선포에 대한 책임을 위탁받았다(고후 5:18-19). 따라서 우리는 이 책임을 충성을 다하여 수행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복된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자. 이 화목의 메시지를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맡고 있는 책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막 전체 재료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성막이 기본적인 두 종류의 재료-나무와 금-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먼저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나무는 조각목이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결을 가진 무겁고 튼튼한 나무였다. 또한 해충에 의해서 피해를 잘 입지 않는 나무이므로 성막을 건립하는 데에 가장 이상이라 하겠다.
 
성막 건축에 관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조각목이란 중근동의 사막 지역에서 잘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를 말한다. 이 사실에서도 이사야 53:2이 예언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수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널판들을 금으로 싸라고 지시하셨다(출 26:29).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만남을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인성과 신성은 신약 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며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잘 나타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이 14절에서 밝히 드러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라는 단어는 표현되어진 것 또는 나타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인도해 내다"(to lead out)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완전한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나타내셨다. 때문에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리스도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인간에게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끄실 수 있는 완전한 신인(神人)이시다. 인간의 몸으로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몸으로 부활하셨기에, 그분만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격을 이어주는 진정한 화목의 다리가 되실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이러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