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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구약의 제사법/성막 · 구약의 제사법

성막과 그리스도 - 04. 성막뜰 울타리와 출입문

by JORC구원열차 2009. 1. 14.

 

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4장 -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 발을 들여 놓은 곳이 성막뜰이다. 동쪽에 있는 문을 통해서 성막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그 곳에서 그들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보게 되어 있다.
 
지성소와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성막뜰의 전체 너비와 길이는 각각 45.6m, 22.8m였다. 그것은 큰공간이라고 할 수 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성막뜰 가운데에는 휘장으로 분리된 두 개의 방이 있었다. 그 방 전체 크기는 너비가 13.5m, 길이가 4.5m, 높이가 4.5m이었다.
 
성막들의 물두멍을 지나서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방은 성소였다. 너비 9m, 길이 4.5m 크기인 이 방은 하나님과 인간을 대표하는 제사장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제사장은 휘장문을 지나서 이 성소로 들어갔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문이라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 10:1-2).
 
또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양된 성도가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 뿐임을 보여준다.
 
성소 안쪽의 휘장을 지나면 그 곳은 지성소였다. 그 방은 너비 4.5m, 길이 4.5m, 높이 4.5m되는 공간이었다. 속죄소가 놓여있는 그 방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장소였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르므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 놓여있던 휘장은 죄인의 몸으로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음을 상징한다.
 
다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을 의지해서만 모든 사람이 당신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이유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제 성막뜰과 성소, 지정소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막뜰의 울타리
 
여기서는 성막뜰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성막뜰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실 때에 그분은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 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편을 당하게 할지니..."(출 27:9)라고 했다. 여기서 1규빗은 약 45.6cm이기 때문에 성막뜰의 한 쪽 길이는 약 45.6m정도 되었다. 그리고 그 넓이는 50규빗, 곧 22.8m 정도 되었다(13절).
 
그런데 논리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지성소에 거하시고 계시는데 성막뜰이 따로 꼭 필요하셨겠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그리고 성막뜰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 그분께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분리를 인간들에게 요구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올 자들을 극히 제한하시기 위해 백성들의 대표자로 제사장만 따로 있을 수 있는 장소로서 성막뜰을 만들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계신 곳은 어떤 종류의 죄에 의해서도 오염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막뜰을 통해 죄의 오염을 막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숨기워져 계셨고, 세상은 그분에 대해 가리워져 있었다.
 
한편 성막뜰은 동편만 제외하고 휘장으로 쭉 두른 울타리였다. 그 휘장으로 쳐진 벽을 만든 재료를 주의해서 보자. 그것은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계 19:8에서 나타나듯이, 공의를 상징하는 "세마포"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공의의 심판을 집행할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계 19:14) 그분을 따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성막뜰의 울타리는 하나님께 나오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공의를 만족시켜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마포장이 걸려있던 말뚝은 매우 높게 세워졌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것을 넘어서서는 성막뜰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공의의 벽을 넘어설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 공의의 세마포장은 사회의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그가 큰 죄를 지은 죄인이든지 아니면 높은 덕망으로 존경받는 성인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 된다.
 
한편 세마포장은 말뚝에 걸쳐져 있었으며 그 전체 높이는 2.25m 였다(출 27:18). 그 말뚝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기준을 상징하는 세마포장을 지탱하기 위해 충분히 튼튼한 놋으로 만들어졌다.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세마포장의 벽을 뛰어 넘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을 겪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마포장이 말뚝으로 지탱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죄인들은 동쪽으로 나있는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는 외에는 어느 곳으로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허락되지 않았다. 세마포장을 넘어서 가기에는 그 담은 너무 높았다. 그 담을 넘어서 들어가기를 애쓰는 사람의 결국은 사망이다.
 
여기서 말뚝은 구약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이것이 약 2:10의 근거가 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 이상의 것임을 기억하라. 성경학자들은 구약의 율법 안에 모두 613개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복음 10장은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순종의 또다른 설명을 보여 준다. 즉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을 때(눅 10:25),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사는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데에 그때까지 실패한 사례를 여러 차례 지적할 필요도 없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그런데 그 율법사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눅 10:29)라고 주님께 물었다. 이는 그때까지 그 율법사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노력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했던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율법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진정한 의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했던 이유가 있다. 또 고전 1:30에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아주 하찮은 정도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못될뿐더러 그러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 것과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자신의 죄가 장벽이 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음을 성경은 단호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에 대한 갈 3:24은 이렇게 말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성막을 둘러싸고 있던 벽은 율법을 완전히 지킴에 있어 인간은 절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정도의 의로움을 가지지 못했다면,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율법은 말한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율법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게 한다. 그 자신이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기에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갈 4:8).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율법은 죄로 만신창이가 된 인간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한다. 즉 인간이 죄에 종노릇하며 스스로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욱 죄악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고, 또 죄에 대해 민감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게 된다. 성령이 그 속에 거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게 된다. 극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해 갈급하게 하는 것으로 율법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한편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즉 그것은 우리로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한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모든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세마포 울타리 밖에 서 있던 사람은 성막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의에 미달하는 죄인은 그분 앞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것을 가능케 하는 길을 만들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모든 사람 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우리는 의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졌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2. 성막의 문
 
성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했다. 하나님의 공의의 장막이 사람과의 사이에 높게 드리워져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한길로 나오는  자는 그분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은 문에서 시작되었다.
 
성막문 건축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딴 이십 규짓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출 27:16).
 
그 문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나 있었다. 성막뜰의 다른 입구가 어느 곳에도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막의 문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경은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 되심을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요 10:9;요 14:6;행 4:12).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세마포막은 단색이었다. 그러나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 백색의 네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었다(출 27:16). 성막 전체도 이 색깔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완전한 신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특성을 나타낸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색깔로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셨다.
 
청색과 홍색을 혼합함으로 만들어지는 자색은 종종 왕권(王權)과 관련지어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이 색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 청색과 홍색의 혼합으로서의 자색은 신성(神性)과 희생 제물의 피의 결합을 말한다. 즉 이는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그 분이 죄인의 대속 제물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실 것을 보이는 것이다.
 
홍색 또는 적색은 피의 색상이다. 성막의 출입에 칠해졌던 이 색깔은 죄를 위해 드려진 번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킨다.
 
백색은 완전을 의미한다. 즉 이는 인성을 가지셨으나 죄는 전혀 없으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 오셨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빌 2:6-11에서 바울은 성막의 문을 이루고 잇던 네 가지 색깔이 가리키는 바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취하셨는가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먼저 6절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흰색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대해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홍색에 병행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는 8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끝으로 자색에 대응되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해서는 9-11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온통 백색이었던 세마폭막을 제외하면 성막은 이 네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네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진 입구는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과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 또한 같이 재료와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구원의 문 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분 외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성막의 색상에 대한 또 다른 대응의 신약성경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예를 들면 4복음서가 각각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자색). 마가복음은 섬기는 자로 오셨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며(홍색), 누가복음은 완전한 인간이셨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백색). 또한 요한복음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청색).
 
4복음서가 있지만 그들은 구원을 위한 네 가지 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위한 단 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각기 다른 면들을 강조하고 있을 분이다.
 
복음 자체는 네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성경은 천국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영원한 복음이라고도 말하며, 사도 바울은 "내 복음"(롬 2:16)이라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각각의 경우 그 기본이 되는 요소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하심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복음은 단 하나인 것이다.
 
성막의 문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다. 실제로 그 문의 넓이는 9.12m 였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초대장을 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까지도 이렇게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예수님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 주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들 민족 가운데서 태어나셨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를 성막의 자색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묘사했다.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또 한 부류는 로마인이었는데 그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계층이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성막의 홍색에 대응하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당시 전 세계에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전해주었던 헬라인들이 예수님의 시대의 또 한 부류를 구성하고 있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성막의 흰색에 대응하는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비교적 소그룹이긴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나머지 한 부류로 자리 잡았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성막의 청색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어느 부류에 속했느냐에 상관없이 초대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분께로 나아올 수가 있었다(마 11:23; 요 3:16).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께로 나아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시리라고 약속하셨다(요 6:37).
 
이것이 세마포장과 네 색상의 문이 함축하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나타내는 세마포장은 "그 자리에 서 있으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네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넓은 문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가 뜻하는 의미의 감격을 안다. 문은 단지 하나 뿐이지만,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6:37이 말해주듯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자는 아무도 쫓겨남을 당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서는 단지 한 문으로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그와 비슷한 많은 모조품들을 늘어놓는다. 잠 14:12은 경고한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탄이 아무리 정교하게 다른 모조품들을 만들어 놓고 유혹할지라도 우리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요 10:1; 행 4: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가장 잘 요약되어 나타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