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5장 - 번제단
1. 번제단의 목적
성막의 기구들 중 여기서는 번제단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번제단은 희생제물이 드려지던 장소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예표한다.
번제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출 27:1,2).
단(壇)은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성막문으로 들어오면 성막뜰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던 기구였다. 즉 그곳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첫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죄에 대한 대속제물이 드려지는 곳에 하나님은 죄인을 만나러 오셨다 만약 인간이 죄에 대한 번제물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의 결국은 사망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래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죄에 대한 대속물에 의해서 뿐이다.
그러므로 번제단 역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단"(altar)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원어는 '들리워진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마도 예수께서 "내가 땅에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생각하시며 하신 말씀일 것이다. 희생 제물이 드리워져서 단 위에 놓여져야 했듯이, 그리스도도 들리워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다.
번제단은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죽음을 당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게 흘렀고 번제물의 몸은 불길이 휩싸였다. 이것은 죄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한편 번제단은 성막뜰의 입구와 성소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소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리신 곳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과의 화목에 도달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저주의 자리에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단 하나뿐임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설명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보혈을 흘려주셨던 장소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 된다. 이에 대해 히 9:22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인생의 진정한 터를 닦는 셈이 된다. 이에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라고 고백했다.
구약 시대 성막에서는 정기적으로 계속해서 번제가 드려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영원히 세상 죄를 대속하셨다. 이것에 대해 히브리서 9:25-28은 말한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 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또 히 10:1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4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갖는다고 히 10:12은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즉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드리심은, 구약 시대 제물에 의해 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덮어지기만 했던 죄들과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롬 10:10)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대속물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처음 구출되어 나온 것은 어린양의 흘린 피 때문이었다. 즉 어린양을 죽여서 그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지나가실 때에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시고 그 집의 잠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죽이지 않으셨다. 이와 관련하여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애굽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보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피 없는 애굽인의 가정에 내리셨던 장자의 죽음 재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피를 흘리는 제사만이 죄에 대한 대속으로써 하나님께 열납 되어질 수 있음은 가인과 아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도 볼 수 있다(창 4:3-5).
한편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난 동물 희생 제사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답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어린양일지라도 그것이 살아있는 상태로는 충분한 제물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속은 반드시 피 흘림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양은 반드시 죽어져야 했다. 레 17:11은 말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지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만찬가지로 그 용모가 아무리 아름답고, 그 품성이 아무리 완전한자라 할지라도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완전성을 칭송한다. 그분의 흠 없으신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분의 덕성을 이야기한다. 그분의 위대한 가르침과 놀라운 비유들에 경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그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우리의 믿음 없이는 어느 곳에도 구원은 없다. 그분의 삶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보혈)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롬 5:8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한 롬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말한다.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에 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2. 번제단의 외양(外樣)
성막 기구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번제단의 모양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모세의 생각대로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성막 건축에 대해서 모세에게 지시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가르쳐 주셨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40). 히 8:5도 말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이는 번제단의 제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비록 번제단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어 번제단의 나무에 전화하실 수 있으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작업은 단지 번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것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도 단지 사람들이 행했던 일을 십자가를 만들어 그 위에 그분을 올려놓는 것 뿐이었다. 사람 편에서 한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왜냐하면 그 외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을 깜짝 놀라시게 했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3:8에서 그리스도를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라고 언굽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하심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인류를 위해 구원자를 주시겠다고 하신 첫 약속은 창 3:15부터 기록되었고, 그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록은 요 3:16에 나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구약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기록되게 하신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따른 것이었다. 즉 그것은 그 약속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이 우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순절에 행한 설교에서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미리 의도된 것이었고, 그 의도대로 하나님은 법 없는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허락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순종하여 세상의 죄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셨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사 53:7).
그리스도는 결코 힘이 없어서 사나운 폭도들의 희생물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또한 실패한 순교자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 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신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대적자들도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분을 해하지 못했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어라"(요 7:30).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어라"(요 8:2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비로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게 허락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분의 생명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예수 자신이 기꺼이 육체의 목숨을 버리셨던 것이다. 요 19:30은 말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놀랍고 오묘하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3. 번제단의 재료
번제단을 만들 때에 사용했던 재료를 살펴보자. 그것은 먼저 "조각목"(출 27:1)으로 만들고, 그 위에 "놋"(출 27:2)을 입혔다.
그 나무는 사막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아카시아라고도 불리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실로 그리스도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사 53:2) 같은 분이셨다. 인간으로서의 그분은 가장 좋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 사셨고,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단이 놋으로 싸였다는 사실을 주목해보자(출 27:2). 번제단은 밤낮으로 불이 붙여졌었기 때문에 그 표면은 그곳을 견디어 내기 위한 보호막으로 덧 입혀져야 했다. 여기서 "놋(brass)"으로 번역된 원어는 "청동(bronze)"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서 만든 놋은 현대 과학의 산물이지만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만든 청동은 고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이 책에서는 성경에 나온대로 "놋"이라고 하겠다.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육체로서 심판을 받으셨다(빌 2:6-8).
특별히 여기서 나무로 만들어진 번제단과 관련해서 주목할 풀리지 않는 기적 중의 하나는, 밤낮으로 붙여진 불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에도 그것이 변형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죄 없으신 몸을 가지셨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이세상의 죄악과 접하셨을지라도 단 한 번도 죄에 굴복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 기적이시다.
한편 번제단은 네 모퉁이 위에 네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출 27:2). 희생제물은 이 뿔들을 이용해서 묶여졌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따로 다른 어떤 것으로 묶여지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끈이 그분을 거기에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뿔은 능력을 상징한다. 번제단의 뿔들은 번제단 위의 희생 제물을 통한 구원과 관련은 갖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이러한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더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번제단의 뿔들은 사방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복음이 세계만방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번제단의 희생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복음 전파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복음이 복된 소식(Good News)인 것과 우리 자신은 그 "소식"을 사방으로 전파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임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복음을 특정 지역에 한정해선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듣기 원하는 세계 곳곳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
번제단의 뿔은 또한, 사람이 박해받을 때나 또는 어떤 이가 자신의 생명을 취하려고 할 때에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솔로몬 왕이 아도니야를 죽이려 할 때 그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왕상 1:50) 잡았다고 했다. 또한 요압도 다윗을 떠나 아도니야를 좇고 난 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왕상 2:28) 잡았다고 했다.
번제단이 이렇게 자비를 구하며 도망 온 사람들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죄와 사탄의 사슬로부터 도망 온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멸하셨다. 히 2:14-15은 말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탄을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약 4:7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사탄이 우리를 괴롭힐 때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복시키고, 그 다음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는 사탄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하도록 하시지만, 대환란 기간 중에는 그들을 반드시 내어쫓으실 것이다(계 12:9). 그리고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계 12:11) 저를 이길 것이다.
4. 번제단 위의 불
여기에선 번제단 위에 있던 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 불은 하늘에서 점화되었기 때문에 아주 신성한 것이었다. 성경에서 불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이 번제단의 불은 결코 꺼지게 해서는 안 되었다. 또한 다른 곳으로부터 점화된 불이나 인간이 붙인 불은 번제단 위에 올려놓지 못했다.
번제단의 심판의 불을 붙일 수 있었던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던 것처럼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심판하신 분도 하나님 한 분이셨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나 인간이 만든 법이 그 분을 돌아가시게 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생명을 내어주셨던 것이다(요 10:17-18).
이것은 죄에 대한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죄를 정죄한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죄의 나무 가지는 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근원이 되는 죄의 뿌리까지는 뽑을 수 없고 죄에 대한 완전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값 대로 징벌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져서 지옥불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심으로써 그릴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에 우리는 요나처럼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라고 고백할 수 있다.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나니"(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나니"(고후 5: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한편 하나님은 번제단의 불을 결코 꺼드려서는 안된다고 특별히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좋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레 6:12-13).
또 불은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여호와에게서 나왔다고 레 9:24은 말한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 따라서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 근원은 사람과는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만든 불이나 또 다른 곳에서 점화시켜온 불을 번제단에 붙이려는 사람에게 징벌이 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려 했으나 그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켜버렸다(레 10:1-3).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엄격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의 행위에 혼합된 구원은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엡 2:8-9). 자신의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삶은 저주의 자리에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상 타락한 인간의 행위는 죄에 대한 대가로 지불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완전한 신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구원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성경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과해야 한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5. 번제단 위의 제물
단지 하나님의 심판의 불만이 세상 죄를 위해 드려진 대속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열납하실 수 있으셨다. 그것은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이나 인간이 만든 것들이 그 번제물에 섞일 수 없었다.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운 불은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는 이것이 특별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지 않으셨음을 그들은 가시적으로 알 수 있었다(창 4:3-5). 그것은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태우신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엘리야가 준비한 번제단에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렸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 18:38).
또 솔로몬왕 시대에 성막의 본을 따라서 지어진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대하 7:1) 가득했다고 했다.
구약 시대의 번제물이 예표하고 있는 진정한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여러번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은 이간의 모습을 입으신 신인(神人)이셨기 때문에 단 한번의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7-18). 즉 이는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드리심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다 충족시켜 드릴 수 있으셨다는 말이다.
히 7:27은 말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아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또 이보다 앞서 히 7:25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라고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구약 시대 제사장은 절대로 앉아서 그의 직무를 수행해서는 안 되었다. 성막의 기구 중에 의자는 포함되진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는 구약 시대 제사장의 직무는 단회로 끝날 수 없고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예수님과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고 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그리스도는 구원의 사역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히 1:3이 이야기하는 근거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은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성도들에게 약속을 주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는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 믿음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한번 영접하면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 매일매일 다시 번제단을 쌓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영원히 계속되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요 3:16).
한편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적인 안식에 대해서 히 4:9-10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실로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시는 분이시다.
구약 시대 성막에서 번제는 태워서 드려졌고, 그 재는 성막 외부의 깨끗한 장소에 치워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리신 후에 그분의 시신도 어느 누구도 놓여지지 않았던 새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도 재로 변했다.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쉼을 얻는 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였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을 충족시켜 드렸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에 비로서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로서 믿을 때에 이를 분명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롬 5:1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8,9절은 이렇게 계속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8:1은 이렇게 우리에게 사죄의 확신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러한 성경의 약소들을 받아들일 때에 느끼는 평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곧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요일 1:7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경은 또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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