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10장 - 순금등대
1. 등대의 구조
등대를 만들도록 명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다.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출 25:31-32).
좀 더 세부적인 사항을 말씀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37-40)라고 명하셨다.
등대가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39절)을 주목해 보자. 한 달란트는 90파운드(약34kg)보다도 좀더 무거운 무게이다. 그것은 금을 측정하는 단위로 한산하면 약 1500온스 또는 약1370트로이 온스이다. 한 온스당 금의 가격을 고려하여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해 보라.
등대는 주형에 떠서 주조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큰 금덩이를 망치로 두들겨서 제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등대는 하나의 금덩어리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을 말씀하신 후에 내리신 그분의 마지막 지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40절).
등대는 또한 촛대로도 일컬어지지만, 그것은 오늘날 보통 생각되는 촛대와는 구별된 것이었다. 초가 등대처럼 동일하게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순금 등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빛은 등대에 특별히 마련된 금그릇에 있는 기름이 타면서 비추어졌다. 성경에서 기름은 종종 성령을 상징한다. 이것은 성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성막에 관한 모든 조명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등대에 관한 예표론
등대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등대의 줄기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여섯 개의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세상에 빛을 발하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 해석이 타당하게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예를 들어 등대는 나무로 이루어져 있진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다른 곳에서 살펴보았듯이 금으로 입혀진 나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대는 순수한 금으로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예표한다.
따라서 여기서 등대는 화목의 장소인 성소 안에서 모든 것을 밝히 비취듯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후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는 지성소 안의 속죄소 역시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한편 성소 안의 등대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게 되었는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어떠한 자연의 빛도 그 안을 비추지 못했다. 오직 등대의 불빛만이 성소 안을 비추었다. 그러므로 이 순금등대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소에서 섬길 수 있는 성소 내부를 비추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항하고 있는 것이다. 또 등잔 안에 담겨진 기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서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성소 안에 자연의 빛이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 세상을 연상하게 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 이니라"(고전 2:14).
성막의 외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칙칙한 동물 가족의 덮개밖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배부로 들어간 사람들은 순금등대의 불빛에 비춰진 성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적인 그의 나라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경험 할 수 있다. 불신자들은 그분을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소유한 한 위대한 스승으로는 평가할 수 있을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성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내부'에 들어감으로써 성도가 얻을 수 있는 타오르는 열정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평가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세상에 관한 각종 세속 철학과 이론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무조건 파괴를 주창하는 혁명과 같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외부적 견해에서 보면 이런 결론들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또한 등대가 세상의 빛 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예표한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하신 말씀은 참된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필연적으로 성소 안에 있는 순금등대가 성도의 모형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순금등대가 세상의 빛된 성도의 모형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성막의 외부로 나와서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었어야 한다. 그러나 등대는 항상 성막의 내부에 있었고 그래서 세상은 그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만약에 등대가 그리스도와 교회-그 분과 연합하여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한다는 의미에서-를 상징한 것이라면, 그 순금 안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나무가 들어있어야 한다. 또한 성막의 외부를 비출 수 있도록 위치하고 있었어야 한다.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와 식양들은 각각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성소 안의 순금등대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비록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들만이 그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인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을 예표하는 사람들이었다.
3. 등대가 발하는 빛
순금등대에서 나오는 빛은 진설병상을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향단 가지도 비추어 주었다. 또한 성소 전체에까지 빛을 발하였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그 장소가 상징하는 바대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 빛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에 수놓아진 그룹들을 비추어 주었다. 사실상 대제사장들만이, 그것도 일년에 단 한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휘장의 그룹이 대신 상징적으로 지성소 안에 게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휘장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했다.
순금 등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하는 진설병상을 비추었고, 기도의 처소를 가리키는 향단에도 빛을 발하였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를 예표하는 지성소의 휘장에 수놓아진 그룹에도 빛을 비추었다.
이처럼 성소 안을 두루 비추는 등대의 빛은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빛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거니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 1:5-7).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 장소인 성막에서의 등대 불빛은, 성령님을 통하여 어두운 곳을 비추셔서 교제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처소에서 고백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그 빛이 진설병상과 향단을 비출 때에 알게 된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빛이 되며, 안전하게 인도하는 목자가 된다. 또한 우리의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생활은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으로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해 보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요 9:5).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을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도리라"(요 12:35-36).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장사되신 후 다시 하나님과 함께 성소에 거하시기 위해 부활,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거하셨던 것처럼 더 이상 육신으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빛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던 휘장이 둘로 찢어졌기 때문에 이로써 모든 성도는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우리가 빛 가운데로 행할 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처럼 우리서로도 사귐이 있고,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5).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영적인 어두움에 거하고 있으나, 구주로 믿는 자들은 영혼의 빛 가운데에 행하게 된다.
등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어두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지금 우리는 비록 실재(實在)하는 성막에는 나아갈 수 있고, 또 빛 가운데로 행할 수 있다.
4. 등대와 성령
등대를 이루고 있는 구조물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출 25:31).
등대는 여러 개의 조각들이 한데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순금 한 덩어리를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것이었다. 각 줄기의 꼭대기에는 기름을 쏟아 넣을 수 있는 잔이 있었다. 그 줄기는 모두 일곱 개였기 때문에 빛을 낼 수 있는 그릇도 일곱 개였다.
순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을지라도, 일곱 줄기는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이미 그리스도와 일곱 영의 오심에 관해서 예언한 바 있다. 등대의 일곱 줄기가 상징하는 바는 사 11:1-2를 읽음으로써 명확해 진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량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니라."
계 1:4 또한 일곱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성막 안에 있던 등대의 일곱 줄기와 하나님의 일곱 영과의 연관성을 계 4:5에서도 볼 수 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줄기는 어두운 세상의 서도들에게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시에 상징하는 등대를 살펴볼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롬 8:9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즉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 예수께서는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3-15)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대해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여기에서 깨닫게 된다.
베드로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또한 성막의 등대를 이루고 있는 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며, 그 일곱 줄기는 그분이 부여받으신 일곱 영을 상징한다. 이 사실은 계 3:1에서 보여진다. 즉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순금 일곱 등대의 일곱 줄기와 성령에 관해 언급한 사 11:2을 비교해 보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사 11:1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배경이 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쌍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리고 이어 2절에서는 성령의 일곱 가지 특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사야 11장 전체는 특별히 세상 끝날 완전히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 왕국이 아직 완전히 도래치 않은 신약 시대인 현재는 눈에 띄지 않는 영적인 메시야 왕국이 존재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며(히 10:21).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벧전 2:9)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사귈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일곱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며,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바 되었다(엡 2:6).
여기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육체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적인 특권을 가리키는 것이다.
5. 등대의 일곱 가지와 성령
사 11:2에선 성령의 일곱 가지 다른 면들이 나타나 있다. 이는 등대의 일곱 가지와 상응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첫 번째, 성령은 "여호와의 신"으로 일컬어졌다. 이사야 11:2이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니"(영어성경 NASB를 직역한 것임. 개역성경은 다른 순서로 번역되어 있음-역자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등대의 가운데 줄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마주보고 있는 한쌍의 가지는 이사야 11:2에 나오는 성령의 일곱 특성 중 두 번째 부분이다. "지혜와 총명의 신", 지혜는 지식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총명은 성령의 사역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등대의 그 다음 마주 보고 있는 줄기는 이사야 11:2의 다음 부분을 계속해서 나타낸다. "모략과 재능의 신", 사 9:6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일컫는 이름의 하나로 "모사"를 들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부분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시키려고 할 때 우리를 모략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또한 엡 6:10이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신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이처럼 모든 성도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하여질 수 있다.
순금등대의 세 번째 마주 보고 있는 가지는 성령의 일곱 특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이사야 11:2의 마지막 부분, 즉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과 대응을 이룬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요 16:15)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의 가슴 깊이 타오르는 열정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자라가는 일이었다(빌 3:10).
또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권능에 과한 새로운 이해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욥은 이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하나님을 알아감에 따라 우리는 그분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운 감정이나 느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공경심을 포함하는 경외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사 11:2).
한편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으로 그분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에 일곱명이 함께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 사도 요한은 이때를 내다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음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여기서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6. 등대의 일곱 가지 자체들의 상징적 의미
순금등대의 일곱 가지는 그 자체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등대가 금을 망치질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출 25:31), 지금은 하늘에 오르셔서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받으신 고난을 상징한다.
금덩어리는 의도된 모양으로 갖추어지기 위해서 망치로 두들겨졌다. 녹여져서 본을 뜨기 위한 주형에 부어진 것이 아니라. 딱딱한 금덩어리를 쪼아나갔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참혹히 못박히셔야 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당신의 뜻한바 대로 빚으시기 위해 단련하시는 분으로 종종 묘사된다.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고백했다. 사도 베드로도 말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둘째로 순금등대는 성소의 외부에 있지 않았고, 내부에 놓여졌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향하여는 숨기워 계시며, 하나님의 제사장적인 가족을 이루는 성도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바깥에 서 있는 세상은 그분을 위대한 스승 내지는 위대한 사람 정도로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는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열정을 가지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과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이같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단지 성령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순금등잔이 발하는 빛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알게 하는 성령님을 생각하게 한다. 그분의 귀중함은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성막의 외부에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 빛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우리는 푯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4).
셋째로 순금등대 위에는 기름을 담아 놓은 일곱 개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충만을 연상하게 한다. 이사야 11:2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임을 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이스라엘 역사 중 순금등대가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시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 만족은 어두움을 상징하는 광야에 있었는데, 그 광야는 그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과 대조를 이루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순금 등대는 광야같은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영적 필요에 넘치도록 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즉 우리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모르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들이 보이실 것이다.
한편 성경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과 대조하여, 성도들을 빛의 아들이라 일컫는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명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1-6).
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거하는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에 대해 시편 32:8은 이야기한다. "내가 너의 갈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다섯째로 일곱 개의 등을 받치고 있는 일곱 가지는 성령이 사람과 함께 거하심을 나타낸다.
성소 안에 거하시는 영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 안에도 성령께서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각 성도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정이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5)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지금 각 성도 안에서 행하고 계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갈 수 있는 것은 영화로운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고 있는 성령님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알도록 하여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일하신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신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고, 또한 그것을 누리게 한다.
여섯째로 순금등대는 진설병상의 맞은편에 위치하여 그 상에 빛을 비추었다.
그러므로써 제사장들은 어두움 가운데에서 떡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마찬가지로 각 성도는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에서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된다.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각 성도에게 비취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알아가는 데에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실 때에, 그 말씀은 분명 살아서 우리에게 확실한 교훈을 준다. 이에 대해 히 4:12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말씀을 조명하는 일은 성령 외에는 불가능하며, 만약 성령께서 가르치지 않으신다며, 거기는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할 것이다. 단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써만이 성도는 그를 지탱해 주는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성령으로써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영양분과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곱째로 등대가 비추는 빛은 또한 금으로 된 향단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이곳을 비취어 주는 빛이 없이는 제사장들은 기도의 제단을 태워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금단(金壇)은 예배와 간구 그리고 기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어느 누구도 찬양드릴 수 없고, 예배드릴 수 없다. 신약성경은 이야기 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오늘날 성도들이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고 있는 것은 모두 성령 안에서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성도는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심지어는 어떻게 지도 받으며 기도해야 할지도 가르치시는 성령에 의해서 할 수 있다.
필자는 개인기도 시간엘 종종 이렇게 기도하곤 한다. "하나님,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할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문제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성취되지 못한다면 저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이와 같이 간구하면 성령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보이시고 우리의 요구에 분명히 응답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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