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12장 - 지성소의 기구들
1. 지성소와 속죄일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해 계신 곳으로 상징된 장소였다. 성막에 마련된 이 특별한 방에는 언약궤와 속죄소가 있었다. 언약궤는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하며,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는 그의 백성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맨 처음 접하게 되는 속죄소는 아무리 죄인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통해서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낸다. 즉 죄인이 속죄제물의 피에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통해서 성막 안으로 들어온 후에 그가 가지고 온 피를 속죄소에 뿌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을 충족시키고, 화해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롬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고아이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또 계속되는 구절은 이러한 인간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만족히 여기셨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4-26절).
또 매 속죄일마다 피가 뿌려졌던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죄의 대가로 인간의 피를 받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으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의 기준을 채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베푸실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진 않으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분의 공의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우리의 대속자이며 중보자이시다.
한편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휘장으로 막혀져 있었다. 이 중후한 휘장은 매 년마다 한번 있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대제사장도 희생제물의 피를 포항해서 규정된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외의 사람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는 죽임을 다하였다. 또한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일년 중 다른 때 또는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는 죽임을 당하였다.
성막에 있던 다른 두 휘장 즉 성막뜰로 들어오는 입구와 성소로 들어오는 입구에 쳐진 휘장은 초대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속죄의 장소로 나와서 화목의 장소로 들어가도록 초대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휘장은 그리스도의 초청을 생각하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러나 이 두 휘장과는 대조적으로 지성소에 쳐져있던 휘장은 제사장들에게조차 닫혀져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기 이전 구약 시대에는 임의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죄인들의 심판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는 법을 궤 안에 가지고 있었던 지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셨던 곳이었다.
2. 언약궤
언약궤에 관해서는 출 25:10-16에 기록되어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는 순금을 입힌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셨다(10, 11절).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히 그분의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심을 상징하는 기구였다. 그것은 성막 전체에서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기구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하고 계신 보좌의 상징이었다. 사실상 성막은 언약궤가 놓일 곳을 마련코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하고 계신 보좌였다.
사실상 성막은 언약궤가 놓일 곳을 마련코자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여 계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그들 주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8절)라고 지시하신 후, 가장 처음 말씀하신 기구가 바로 언약궤였었다. 이는 언약궤가 성막의 가장 중심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형이 된다. 그리고 언약궤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던 분이시다(요 1:14).
언약궤는 안 쪽, 바깥 쪽 모두가 금을 입힌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두 속성 즉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그러나 언약궤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향하고 있는 다른 기구들과 구별된다.
즉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물두멍은 말씀을 통해서 깨끗게 하시는 그분의 사역을 가리키며, 진설병상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또한 순금등대는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향단은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나 언약궤는 그리스도 자신 곧 그분의 사역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를 상징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때 그분의 행하신 것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그것들의 지정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강조점이 그리스도 자신보다는 오히려 그가 행하신 사역들 위에 놓여진다. 그분의 행하심에 대해서 살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내가 그리스도와...알려하여"(빌 3:10)라고 고백했던 이유이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알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알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살핌으로써 그분 자신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성소의 언약궤가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반면, 속죄소는 그분의 행하심을 드러내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3. 언약궤 안의 내용물
언약궤 안에 놓여 있었던 것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것들을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또한 약속이 되신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의로움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성도의 의(義)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보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화평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성도의 화평이 되신다. 생명의 떡을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신다.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혜가 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들은 그리스도 자신과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깨어지지 않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거두어 들여서 하루 이상 보관했을 때에는 벌레가 생기고 부패하던 만나를,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셔서 언약궤 안에 보관할 수 있게 하셨다. 출 16:34은 만나를 보관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히 9:4은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는 금항아리"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만나는 광야생활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던 양식이었으므로,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지속시켜 주는 예수그리스도를 내다보는 상징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사역을 드러내는 표시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실 때에 주님은 광야생활 때에 하늘로부터 내렸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여 말씀하셨다.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모두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떡을 떼는 사람들은 영생을 누린다.
그러므로 언약궤 안에 놓여있던 만나는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시키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 되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는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6장에서는 만나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떼어 먹는 말씀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만나는 다지 육신의 생명만 유지시켜 주었던 반면,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요 6:58, 63).
한편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히 9:4)도 놓여 있었다.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 지팡이는 하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시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민수기 17장에는 아론의 권위가 문제시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팡이에 싹이 돋아나게 하심으로 그분이 아론과 그의 자손들 위에 축복을 내리시는 증거를 나타내신 사건이 나와 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때의 아론의 지팡이가 언약궤 안에 보관된 것이다.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던 또 다른 것은 십계명 판이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처음 받았던 십계명 돌판은 우상 숭배하는 백성들을 보았을 때 깨뜨려졌다(출 32:19).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십계명판을 주시면서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신 10:2)고 말씀하셨다.
깨어진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의 법을 게속하여 거스리는 인간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이 나타내고 있는 바대로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라고 말한다.
두 번째 돌판은, 사라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키시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주(主)이시며 왕이시다. 그리고 그 돌판은 왕으로서 권위를 행사하실 때 사용하실 공의의 법을 가리킨다.
세 번째 돌판은 죄를 범한 인간들 가운데에서도 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기준이 그 돌판을 통하여 제시되었고, 기 기준들을 절대적인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언약궤 안에 놓여져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기준들을 잊지 않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또한 그 돌판이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안에 놓여졌다는 사실은 그 기준들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하나님의 기준을 맞추려는 이간의 시도는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낮추어 적용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2:10은 말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완전하신 기준을 드러내며 오직 완전무결하신 그리스도만이 이 거룩한 기준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히 12:14은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전가받아 거룩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여받게 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4. 속죄소
지성소에 놓인 언약궤의 맨 위는 속죄소(시은좌)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모세에게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출 25:17)라고 지시하셨다. 그것의 크기에 대해 말씀하신 후 그분께서는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출 25:18)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계속해서 이렇게 지시하셨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1, 22절).
속죄소는 일차적으로 죄인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나아가 속죄소는 언약궤 위에 놓여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율법이 들어 있는 그 궤를 친히 덮으시고, 자비를 나타내심을 보여준다. 즉 육법을 어기는 인간의 커다른 죄악을 덮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속죄소에 뿌려지는 대속제물의 피를 통해서는 누구에게든지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 돌아오는 속죄일에 속죄소에 대속 제물의 피를 뿌리어 지성소로 들어갔고, 그러므로써 해마다 사람들의 지은 죄들이 덮여졌다. 이것에 대해서 신약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않으사..."(히 10:3, 4, 히 10:12).
흘려서 뿌려진 피는 하나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 하실 수 있게 하였다. 피 뿌림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애굽에서 구원될 당시 유월절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이 유월절 사건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12장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사람들만이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성경은 말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하신 공의와 절대적인 은혜에 근거해서만 죄인들을 만날 수 있으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속성은 만날 수 있는 특정 지점을 필요로 했다. 그 장소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십자가였다. 구약 시대의 속죄제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제물은 단지 일시적으로만 죄들을 덮는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영원히 죄를 담당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자신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인류에게 가져오게 하기 위한 중보가 되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죄소가 되어 주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위한 길은 단 하나이며 그 밖의 다른 길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반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속죄소는 단단한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속죄소는 그것 자체로는 독립된 하나의 기구이면서 동시에 언약궤의 뚜껑을 이루고 있었다. 또 속죄소는 나무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고 순전히 금으로만 만들어졌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를 나타낸다. 또 이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러 오시기 이전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분이 성육신하시기 이전 상태에 대해서 요 1:1-2은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여기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 1:14에서 분명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속죄소 양 끝에는 금으로 쳐서 만든 그룹 둘이 있었다. 이 그룹들은 날개를 넓게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다. 그 그룹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속죄소에 계실 때에 흠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거룩을 보호해 드렸다.
5. 속죄소의 영적 의미
속죄소가 상징하는 의미는 롬 3:25에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바울은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곳에서 "화목제물(propitiation)"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히 9:5의 "속죄소(mercyseat)"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그러므로 롬 3:25과 히브리서 9:5을 비교해 보면 속죄소가 향하고 있는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속죄소가 되시며, 동시에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2:2; 요일 4:10).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로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을 채워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심에 있어서도 자신의 공의의 기준을 포기하시지 않으셔도 되었다. 즉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의를 전가 받으며 그 의로 구원받는 것이다.
구약 시대 제사장의 직무는 끝마침이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성막 건물 안에는 의자가 없었다. 즉 율법을 받을 때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사장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희생제물을 드려야만 했다. 그 제물들은 죄를 없게 하지 못했고 다만 일정 기간 동안에 한시적으로 죄악을 덮어두게 했을 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는 제사장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이렇게 비교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1-12).
또한 속죄소는 하나님을 위한 안식의 장소를 상징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후에 누리게 될 완전한 안식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안식(rest)"이란 단어는 피곤으로부터 쉼을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의 심리 행위가 정지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4장은 이와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안식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다. 즉 그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투쟁의 마침이 되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속죄소에 대해서 지시하실 때에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4:22). 이와 관련해서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사람과 만나 주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 삼하 6:2은 이렇게 말한다. "(다윗이)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또 시 99:1도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속죄소 위의 그룹 사이에서 사람을 만나셨다. 혹자들은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속죄소에 뿌려진 피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레 16:14-15은 제사장들에게 속죄일에 행할 제사 규례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여기서 속죄소에 뿌려진 피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그 피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에게 나오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얼마나 아름답게 반영하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사셨으며 또한 죽으셔서, 지옥으로 마땅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만나게 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사셨고, 그분의 공의와 죄에 대한 심판을 입증하는 죽음을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 공의의 측면에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으셨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죄인들을 용서하기 어려우셨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우리의 속죄소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충족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따른 충분한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으로써 공의의 율법을 완성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가치있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사 42:21에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재케 하려 하셨으나..."라고 한 말씀을 성취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삶을 사셨으며 그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그리고 자비는 다른 어떤곳에서 보다도 갈보리 언덕에서 절정에 달한다. 십자가 위에서 이 일들을 이루셨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8, 31)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죄악을 율법을 통해 깨닫고 나아가 자신이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율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그것으로 끝나며 구원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한편 율법을 세우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지만 그것은 결국 당신의 거룩하심, 공의로우심을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 속죄소의 완성이시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 흘려진 보혈로서만 죄인들은 속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6. 속죄소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
이 곳에서는 속죄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통하신 장소였음을 기억하자.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의사소통 하셨던 수단이 창세 이래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작업이다.
에덴동산 시절, 처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직접적인 교통함이 있었지만, 죄가 그 관계를 깨뜨렸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동산 밖으로 내쫓았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꿈과 이상으로, 또 직접적인 음성으로 구약의 족장들 및 선지자들과 계속해서 교통하셨다. 그런 다음 마침내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 자신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의사소통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가장 주된 수단은 성막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속죄소 위의 그룹들 사이에서 자주 말씀하셨다.
먼저 속죄소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은 그것이 언약 궤를 덮고 있어서 내부에 들어 있던 율법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며, 그것을 범한 사람에게는 사망이 주어진다.
갈 3:10은 율법을 범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로 남아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도 범치 말고 완전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그것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를 판단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대신 율법을 친히 성취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다. 즉 그분은 율법에 따라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감당해 주셨던 것이다.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위에 모두 씌워졌다.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믿음으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을 주장하지 못한다.
언약궤 안에 놓여 있는 율법을 덮고 있던 속죄소는, 곧 율법을 덮고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속죄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상징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게 한다.
속죄소가 율법을 덮었고, 속죄소 위에 뿌려진 피가 죄를 덮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고, 율법의 선고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는 당신의 삶으로, 그 다음에는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께 손가락질하며 "당신은 율법을 폐하였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친히 죽으심으로 그 분은 율법의 요구를 채우지 못하는 모든 인간을 위한 죄의 형벌을 받으사 율법을 성취하셨다.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다른 구절도 율법의 연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율법 자체로는 하나의 오류도 없지만, 인간 본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어져야 했다. 어느 하나도 간과 될 수 없었다. 이것이 속죄소에 피를 뿌리게 한 이유이며, 그 속죄소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가 비록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율법을 지킨 셈이 되는 것이다.
한편 구약성경은 속죄소가 언약궤로부터 떨어져서 율법을 완전히 덮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그들 중에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많은 재앙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젖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 위에 실어서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냈다. 그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면서 이 소들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고 간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살아가심을 나타내는 증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다. 그런데 사무엘상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땅, 곧 벧세메스로 돌아온 언약궤에 속죄소가 덮혀져 있지 않아 거룩한 율법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열린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본 백성들은 모두 죽임을 다하였다.
즉 언약궤 속에 있는 율법을 들여다 본 백성들에 대한 심판은 19절과 20절에 나온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속죄가 없이는 율법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된 상태를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만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속죄소를 통해 이루어진 또 하나의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대표자를 통하여 죄인들과 만나 주시는 장소였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 대표자는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 피를 뿌리고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간구했던 대제사장이다(레 16:14-16).
오늘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주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구든지 지성소를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어느 누구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것을 볼 수 없었으나, 백성들은 단지 믿음으로 성전뜰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육신적인 눈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보좌를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속죄소를 통해 이루어진 또 하나의 특별한 은총은 그 곳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진 장소였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고 지시하셨다.
속죄소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어떻게 교통하셨는지의 예가 민 7:89에 나온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아마도 모세는 지성소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휘장 다른 쪽인 성소 안에서 다른 제사장들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은총의 장소인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지성소에서 우리와 교통하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악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보좌이신 속죄소에 계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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