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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구약의 제사법/성막 · 구약의 제사법

성막과 그리스도 - 11. 향단

by JORC구원열차 2009. 1. 14.

 

성막과 그리스도
 
차례
 
01. 성막에 대한 서론적 이해
02. 성막의 명칭들
03. 성막의 위치와 건축 및 재료
04. 성막뜰의 울타리와 출입문
05. 번제단
06. 물두멍
07. 성소와 지성소
08. 성소로 들어가는 문
09. 진설병상
10. 순금등대
11. 향단
12. 지성소의 기구들
13. 지성소의 휘장
14. 경건의 시간의 위한 제언
 
 
제11장 - 향단
 
1. 향단의 구조와 위치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대로 성소 안에는 진설병상과 순금등대도 같이 놓여 있었다. 이젠 우리의 관심을 향단에로 집중시켜 보자. 이 단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의 바로 앞쪽인 성소의 서쪽에 놓여졌다.
 
이 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출 30:1)라고 명하시고 계속하여,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출 30:6-9)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정금으로 입혀졌다. 정금으로 입혀진 나무로 만든 다른 기구에서처럼 향단도 인성과 신성을 갖고 계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향단의 위치는 성소의 중심이었다. 즉 속죄소와 언약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잇는 휘장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장소로서 그 안에 있는 것 외에는 향단이 그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할 때보다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는 때도 없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2. 향단과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향은 분향단 위에서 끊이지 않고 피워져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끊이지 않고 계속됨을 예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사도 요한도 또한 성도를 위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가"(요일 2:1). 그렇다면 과연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성막뜰에 놓여있던 번제단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라면, 성소 휘장 가까운 곳에 놓여진 향단은 지금도 하늘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다. 구속과 화해는 번제단에서 이루어졌고, 속죄를 위한 간구함은 향단에서 행하여진다. 그러므로 향단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막에서, 번제단으로부터 향단까지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구원의 그림이 된다. 그분의 죽으심은 번제단에서 상징되며, 우리의 생명과 중보가 되시기 위한 그분의 부활하심은 향단에서 상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생각해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영적인 축복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이것이 바울이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고 말한 근거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정죄보다 더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즉 그분은 이상적인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고 말씀하신 이유가 된다.
 
3. 향단과 성도의 기도생활
 
향단은 또한 우리의 기도생활에 관하여도 이야기한다. 향단에는 계속적으로 불이 피워져 있었어야 했지만, 불을 피워 향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루 중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특별한 기도 시간을 정해두고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말한다. "쉬지 말고"라고 번역된 말의 본래 단어는 신약 시대에 계속적으로 기침하는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사용되던 단어이다. 그의 기침이, 계속되는 한 번의 긴 기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한 번의 긴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속적으로 자주 간격을 두고 기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전심전력을 해야 할 특별한 시기도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의 육체는 안식할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루 24시간 내내 기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때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실 수 있다.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강도만큼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리도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야 할 책임을 맡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까지 그들을 다스려줄 왕을 원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사무엘에게 요청했을 때,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겼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죄가 된다는 원칙을 나타낸다.
 
사도 바울도 중보기도를 매우 중요시했음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그의 말에서 나타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딤전 2:1-4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되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삶들을 위해서 하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2절).
 
성경에 나오는 중보기도 중 가장 괄목한 것 중의 하나는 출 32:10-14에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10절)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고하고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그는 뜨겁게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셨다.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보내는 시간의 중요성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눅 10:38-42). 예수께서 그들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 장만에 바빴다(40절).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르다가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돕도록 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했을 때, 주심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조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 42절).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지금 그분은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게시지 않지만, 우리는 기도로 그분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사악한 소돔성을 멸하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해 간청했다(창 18:23-33). 그는 의인 오십인을 인해서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했고(24절), 하나님께서는 그러겠노라고 동의하셨다. 그 도시에는 그만한 숫자의 의인이 없음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인 사십오인으로도 용서를 주시기를 간청했다(28절).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러마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간구는 열명의 의인으로 인해서 그 도시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32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리라고 하셨으나, 역사는 그 도시에 단 열명의 의인도 살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른 이들을 위해 신실하게 중보하는 자의 모본이 되었다.
 
성도가 행하는 일 중 가장 고상한 직무는 중보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보다는 우리의 경배를 더욱 기뻐하시기 때문에, 섬김보다는 기도를 더 기꺼이 받으신다. 섬김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의 관계 안에서만 열납하신다. 섬김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영적인 전투는 섬김의 시간보다는 기도의 시간에 승리로 이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데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기회를 찾기에 다른 사람보다 열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축복된 특권이며 가장 위대한 책임이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지고, 이것은 심지어 설교보다도 더 중요한 직무이다. 아무리 좋은 설교도 그 자체만으로는 영들을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바로 기도이다.
 
향단은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나타냄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에로 나아가도록 교훈한다. 속죄의 장소인 번제단은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며, 기도의 장소인 향단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보호하심을 입는 사실을 상징한다. 우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중보기도에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특별히 오랜 세월동안 주님과 함께 동거해온 한 아주머니를 생각한다. 그녀는 15년동안 거의 침대에서만 생활하다시피 했으나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님께선 그녀를 중보기도의 도구로 사영하여 일하고 계심을 확연히 느꼈다.
 
중보기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와 같은(출 17:8-16) 역사적인 사건에서도 확인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의 맞아 골짜기에서 싸웠으며,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이를 위해 기도했다. 아론과 홀의 도움으로 모세는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고, 그 기도는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무릎을 꿇는 중보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