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자 양육 자료실/하나님을 바로 알자!

제 2 부 성자 하나님 - 13-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하자!

by JORC구원열차 2009. 1. 15.

 

제 2 부 성자 하나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6장6절)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1장21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4장4-5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5장39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1장4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3장18-19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립보서3장7-9절).
 
13-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하자(기독론=그리스도론=성자론)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먼저 그의 존재 문제와 사역문제를 알아야 답변할 수 있다.
 
'주는 메시야 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예수를 만나고 듣고 보고 만지고 해야 알 수 있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셔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믿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함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성령님의 도우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예수를 알아야한다. 더 알기 원해야 한다. 정확히 알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나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예수의 존재와 사역을 구체적으로 만나고 듣고 보고 상고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확실히 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의 계획과 언약과 공의와 사랑을 구약에서 알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신앙하고 또 신학이 그에 대하여 진술하는 하나님은 어떤 막연한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예수를 아는 것이고 예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예수를 통해 자기를 계시하신다. 또 그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분 안에 나타나 있으며, 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약속이 그분 안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의 중심은 기독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Ⅰ. 출발점을 어디로 할 것인가?
 
성자 하나님을 알기 위한 출발점은 지금까지 두 가지가 있다. 일방적으로 역사적 예수에게만 의존하는 것과, 역사적 예수를 배제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게만 그 출발점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주장은 역사적 예수와 복음으로 선포된 그리스도를 분리시키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냐 혹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냐의 양자택일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History)의 예수는 그리스도에 대한 케리그마(Kerygma)의 근거로 전제되어야 옳으며, 케리그마(Kerygma)는 사실적인 역사적 예수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의 예수인 동시에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이며,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인 동시에 역사의 예수를,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전체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신학자 보른캄(G.Bornkamm)이 말하기를 '우리는 케리그마 속에서 예수의 역사를 찾을 수 있고, 예수의 역사 속에서 케리그마 즉 복음의 선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사역> 과 그리스도 <존재> 와의 일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예수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가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는 예수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론과 예수론은 분리되어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론은 예수론이며 예수론은 그리스도론이다.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성경에 증언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다.
 
신학자 J.Jeremias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은 역사적 사건(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그 삶)이며,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세칭 말하는 케리그마 이전의 것이다. 예수를 간단하게 익명의 공동체가 고백하는 케리그마 속에 가둘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사람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참하나님이라고도 말하기 때문에 전통적 연구의 방향에 있어서 연역적 방법(위로부터 아래로의 방법)과 귀납적 방법(아래로 부터 위로의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 외에도 에벨링(G.Ebeling) 같은 사람은 제3의 방법, 즉 종말론적-성령론적-삼위일체론적 방법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고대 교회의 기독론(그리스도론, 성자론) 은 분명히 연역적 방법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혹은 예수의 선재적 신성으로부터 출발했다. 요한과 바울의 그리스도론도 마찬가지이다. 그와는 반대로 마가는 위로부터 해석하긴 했어도, 예수를 아래서 다시 말해 그의 지상 사역에서 시작하게 했고 요한, 바울과는 다른 관점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 연역적 방법의 그리스도 이해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하나님의 성취,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등 초월적인 하나님에서 그 논리를 엮어 나가고 있다. 정통적 신학은 연역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기독론은 삼위일체이신 성자의 신성에서 출발하여 인성과 생활을 논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만이 하나님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으며 또한 충분한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간과하게 된다. 그로 인해서 인간의 삶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띠게 하였다 라고도 할 수 있다. 실례로 말씀(Logos)에 의해 인성이 되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이나 성자론은 신성을 인성보다 더 우위에 있게 만들었고, 인성은 수동적 내지는 보조적 역할로 격하 시킨 점이 없지 않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 연역법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유럽에서 존경받고 있는 바르트(K. Barth)이다. 그는 초기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온 열정을 기울였다. 그리스도는 아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 분이다 라는 것이다. 1922년에 출판한 로마서 강해에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평들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절단하는 미지의 수평'이라고 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연구의 대상인 인간 예수는 칼바르트에게서는 순전히 부정적인 실재이었다. 그리스도는 결코 천재나 물리적 능력을 소유한 영웅, 지도자, 시인,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신이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게 됨으로써 인간인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에로 열려졌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 행위와 주권적 행위로써 하나님의 필연이기에 위로부터 아래로의 길이지 그 반대의 방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접촉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없이 일어났으며 오직 이 길만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Barth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론의 첫째 관점을 보았다. 오로지 하나님 자신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2) 귀납적 방법의 그리스도 이해
귀납적 방법은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께로 이르는 방법이다.루터 이후부터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아 오고 있으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 그 지지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주어진 것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신성을 알 수 없는 불확정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신성과 인성간의 연속성을 말하고 있으며 그 연속성으로 인하여 인성으로부터 신성으로 옮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19C와 20C 초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윤리적 측면에서 이 연속성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칸트(I.Kant)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많은 신학자들은 모든 신학적 교리를 형이상학적 논리에서 윤리적 차원으로 바꾸는 것이 신학의 지상 과제라고 생각했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는 리츨(Ritschl)인데 그는 인간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기독론을 내세웠다.
 
현대 신학자들 중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말하는 이는 틸리히와 판넨베르그이다. 틸리히의 귀납적 그리스도론은 인간의 구체적인 정황(context)에 접촉하고저하는 그의 신학적 귀결이었다. 틸리히에 의하면 구원은 오직 인간 상황에 전적으로 참예하는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땅위에서 군림하며 배회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틸리히에게 성육신(Incarnation)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틸리히가 제시한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인간 내재적 역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인간 속에 구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변했으며 그와 동시에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의 타락한 현실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려고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인간 삶 속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죄의 세상으로 오신 것이다라고 했다.
 
판넨베르크(W.Pannanberg)는 틸리히와는 달리 그의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그리스도론의 가장 핵심적 과제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의 근거를 해명하는 데 있다.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잘못된 것은 그것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만 서 있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항상 역사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사고하며, 우리는 그 한계성을 결코 단숨에 뛰어넘을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은 오직 역사 속에서만 계시된다고 하였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전 생애는 그의 행동과 운명에 있어서 철두철미하게 그의 하나님 됨과 하나님의 계시였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을 그 본질로 가지는 인간 존재의 계시이기도 하다. 예수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교를 중재하고 그의 운명을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모범적으로 미리 실천함으로써, 그 계시는 예수에 의해 능동적으로 성취되었다 라고 하였다.
 
지금껏 살펴본 바 두 가지 방법의 그리스도론은 각기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다. 위로부터의 방법은 너무 신적인 것을 강조하고 아래로부터의 방법은 너무 인간적 현실을 중요시한다. 그 어느 방법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함께 있어져야 할 그리스도론의 방법론(methodolog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그리스도론의 구성 요소--존재와 사역
 
그리스도론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존재(인격)에 관한 내용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고 앞서 제시하였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인격을 구분하여 말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둘을 하나로 다루고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가운데서 그 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인격의 반영이고, 인격의 표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제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인식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사역이 인식에 우선하지만, 존재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인격이 사역에 앞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 행위이자 내용이며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본질과 인격을 먼저 계시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의 인격과 그 사역은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사역으로부터 비로소 무엇이 되는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사역이 그 자신으로 존재한다. 그의 이 존재는 그의 사역의 전제이며 그의 사역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고 증명한다.
 
4. 예수 사역문제----십자가와 부활
 
신약성경에서 구원이 가능한 근거는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건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집약된다. 두 가지의 구원 행위는 신약성경에서 동일한 비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 교회에서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선포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는 십자가 사건만을 부각시키는 서구적 신학 전통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십자가의 의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없이 부활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반대로 W. 퀸네트는 그의'부활의 그리스도론'에서 부활이 구원의 근거로 우세하게 등장하고 있다. 생명은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에 비해 근본적으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권네트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는 부활을 통해 구원 사건이 될 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퀸네트(Ku¨nneth)가 간과한 것은 십자가는 그 자체로서 이미 숨겨진 승리라는 사실과, 십자가는 바울에게서 부활과 꼭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부활을 십자가 위에 두고, 양자를 동일한 가치 선상에서 생각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편중된 모습을 강조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케제만은 말하기를 '부활한 자는 그의 못자국에서 인식되어지길 원하고 또 그리해야 한다. 아무리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높이 찬양한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던 분의 영원한 통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으며 오직 그릇된 신앙의 길을 만들어 갈 뿐이다'.라고 하였다.
 
E. 푹스(Fuchs)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로 죽음 안에서 우리의 생명으로서 계시되었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부활은 십자가를 지나쳐서 일어나지 않고, 십자가를 통과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분은 희생양이었기에 승리자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강하고 스스로 자기를 낮춤으로써만 위대한 분이며 오직 종으로서만 그분은 주님이시고 오직 죽음당한 자로서만 그분은 살아 있다.하나님은 오직 성육신이라는 자기비하를 통하여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분이다. 이 비하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맞바꿈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사건 속에 하나님은 인간이 죄로 인하여 감수해야 될 희생양의 처지가 되신 것이다.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에게 마땅히 돌아와야 할 중벌을 대신 지셨고 우리에게 자신의 평화를 주셨다. 그분은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 연약해지셨다. 그분은 죽으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비참함을 자신의 영광과 바꾸었고, 우리의 고난을 자신의 기쁨과 바꾸었으며, 우리의 두려움을 자신의 용기와 바꾸었다. 그분은 우리의 아무것도 없음을 자신의 모든 것과 바꾸었기에 우리는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라도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이다.
 
5. 결론
 
사람은 알면 알수록 사랑이 식어지고 멀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더 의지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지며 내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는 분으로 경외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방법과 출발점은 역시 성경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출발하여 역사 속에 오신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아는 것 즉 존재를 알고 사역을 알아가면서 연역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쉽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언된 대로 성육신하신 메시야의 존재론적 문제를 전제로 한 답을 가지고 사역문제를 다루는 것이 총론이 되어야 하며 예수의 존재문제 즉 인성과 신성과 삼위일체와 사역문제 즉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역문제는 모두 귀하고도 귀한 것이다.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논하면서 동정녀 탄생에 흠집을 내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은 성경과는 그 색갈이 다르므로 배척해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총론을 알고 각론에 들어가야지 총론을 정확히 모르면서 각론으로 총론을 만들어 보려는 것은 신학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아니 하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1장17-19)
 
찬송가(506장)
예수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사역
 
1) 아들을 보내셨다(요3;16,6;5 ,갈4;4)
2) 아들에게 인을 치셨다 (요6;27)
3) 아들에게 가르치셨다 (요8;28)
4) 아들에게 기름 부어셨다(눅4;18, 사61;1, 행10;38)
5)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셨다(요8;54)
6) 아들에게 명령을 하셨다(요10;18)
7) 아들에게 증거하셨다(요8;18)
8) 아들을 사랑하셨다(요10;17)
9) 아들을 기뻐하셨다(사42;1,마3;17,벧후1;17)
10) 아들을 들어셨다(마26;53,요11;41-42,12;27-28)
11) 아들을 내어주셨다(요3;16,18;11,롬8;32,요4;9)
12)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엡1;20)
13) 아들을 높이셨다 (엡1;20,빌2;9-11)
14)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셨다(요12;28,17;1)
15) 아들에게 교회의 머리로 만드셨다(엡1;22)
16)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요5;22-27)
 
※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1)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눅1;35)
2)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다(마3;16,히1;9)
3) 성령에 의해 인치심을 받았다(요6;27)
4) 성령에 의해 인도 되었다(마4;1)
5) 성령 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
6)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다(눅4;18)
7) 성령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했다(행1;2)
8) 성령을 힘입어 이적을 행했다(마12;28,행10;38)
9)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히9;14)
10) 성령 안에서 슬퍼했다(요11;33)
11) 성령 안에서 기뻐했다(눅10;21)
12) 성령의 충만을 받게 했다(요3;34,눅4;1)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합작품이었다. 공동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관심과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