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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양육 자료실/하나님을 바로 알자!

35-성령의 열매

by JORC구원열차 2009. 1. 15.

 

35-성령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은사가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한 외향적 은혜라면 성령의 열매는 자신을 성화시켜 가는 내향적 은혜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도가 '육체의 일'(갈5:19)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 성장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형상'(창1:27)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우리의 푯대가 되어야하고 그 축복을 지상에서 누릴수 있어야만 한다.
 
1. 사랑의 열매
 
'사랑' 은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뿌리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마22:37-40).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신앙의 근간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윤리의 근간이다. 사랑의 원형은 '하나님의 사랑' 이다(요일4:10) 곧 '아가페'의 사랑, 절대적인 사랑,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반사적 사랑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한 후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12:31)고 말하면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모든 은사 가운데 가장 큰 은사가 됨은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왜 모든 은사가 무의미한 것이 될까? 은사는 교회에 주신 사역 능력이며 인간에 대한 봉사 사역을 뜻한다. 인간을 위하여 봉사함에 있어서 사랑이 빠지면 그 봉사는 알맹이 없는 껍질과 같고 모든 봉사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선의 죄를 더하고 사랑이 없는 사역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게 된다(마7:22,23).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하며 사랑이 없는 봉사는 원망을 낳으며 사랑이 없는 충성은 분쟁과 분파를 만든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신자의 사랑의 근원은 속죄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자의 모든 신앙 활동의 원천은 이 속죄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솟아난다. 모든 봉사가 사랑의 동기에서 나와야 진실하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함으로써만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면 예수를 닮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10).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이시다(요15:9). 성령도 사랑이시다(롬15:30). 따라서 신자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해야 하며 사랑함으로써 참신자가 되고 성령의 열매가 열리고 익어가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 은 사랑이라'(고전13:13)
 바울은 신앙의 세 가지 덕목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첫째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망도 소중하다. 왜냐하면 소망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사랑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 본질을 열매로 나타나게 하신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랑은 주기를 좋아한다(요3:16). 사랑은 용서하기를 좋아한다(엡4:2;벧전4:8). 사랑은 교통하기를 좋아하고 하나 되기를 좋아한다(엡4:4-6). 사랑은 신자를 신자답게 한다. 사랑은 신자의 특성이고 성령의 열매로 그 향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은사 중 사랑이 가장 큰 것처럼 열매에서 사랑은 열매의 중심에 가장 달콤한 부분과 같다. 그 맛이 없다면 아무리 큰 과일도 맛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랑은 9가지 열매를 대표하고 있고 전체를 감싸고 있다.
 
2. 희락의 열매
 
'희락'은 헬라어의 '카라'로서 구원받은 성도가 갖는 거룩한 기쁨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누리 수 있는 <감격의 외향적 표현>이 바로 이 거룩한 기쁨이다. 이 거룩한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르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상대적인 기쁨이므로 그 요인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진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이다(빌4:4).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환난 속에서도 기뻐한다(롬5:2,3;살전1:6). 핍박 중에도 기뻐한다. 스데반은 박해자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고(행6:15), 바울과 실라는 매 맞고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잃지 않았다(행16:19-25).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성도의 이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시4:7).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않더라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더라도,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더라도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이다(합3:17). 그것은 안일과 사치와 부요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이며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신자가 누리는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로서의 기쁨이다. 이러한 기쁨은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으로 가진자'(고후6:9,10)들이 갖는 기쁨이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의 익은 열매로서의 기쁨이다.
 
'항상 기뻐하라…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모든 일에 기뻐하라는 뜻이다. 이런 기쁨은 그 기쁨의 원천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기쁨은 영혼의 샘에서 솟아나는 기쁨이다. 영혼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외적인 상황과는 관계없는 기쁨이기 때문에 외적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영혼의 기쁨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기쁨으로서 생수의 강의 원천인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다(요7:37-39). 이 내적인 기쁨은 빼앗을 수 없고 신자로 하여금 범사에 기뻐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이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신자의 기쁨은 곧 신앙의 힘이다. 이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서 온다. 힘 있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기쁨이 없는 신앙은 초보적인 신앙이며 연약한 신앙이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신자의 제일 되는 의무는 복음의 전파이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곳에 신자의 기쁨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기쁨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신자의 의무를 완성하게 한다.
 
'소망의 하나님께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기를 원하노라'(롬15:13)
신자의 기쁨은 소망을 갖게 한다. 그것은 소망의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진정한 소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3. 화평의 열매
 
'화평'의 원천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데 있다(엡2:13-19;골1:20).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면 자기 자신과 그리고 타인과의 화평도 이루어진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자는 어디서나 화평을 만들어내나 그렇지 못한 자는 어디서나 불화와 분쟁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화평의 창조자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을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모든 인간은 범죄 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롬5:10). 이 '원수'의 관계를 '화목'의 관계로 변화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이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화평은 먼저 하나님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3,14)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어 화평케 하셨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적 편견을 제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차별과 갈등을 해소한다. 그는 모든 인류를 형제자매로 만드신다(막3:35).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취한 연고니 이제 그것을 화평히 다시 돌리라'(삿11:13)
이 말씀은 암몬 왕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길르앗에 진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의 사사 입다의 사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 지상에서는 역사 이래로 국가와 국가 간에 전쟁이 중단된 때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 국제정치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수많은 평화 회담이 진행되었어도 이 세상에는 아직 완전한 평화가 정착되지 않다. 인류가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가 지상주의를 극복하지 않는 한 이 땅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평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사2: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신자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인간과 화평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신자는 그가 어디를 가든지 '화평'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불화와 분쟁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그는 시험하는 자요 (살전3:5), 참소자요(계12:10).대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살후2:4).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신자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과 화목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고 구원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다. 그리고 사랑과 구원은 하나님의 기쁨의 원천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시37:37)
화평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분쟁은 근심과 불화를 낳으나 화평은 안심과 평안을 산출한다. 화평한 곳에 질서가 있고 건설이 있고 성취가 있다. 인간의 모든 긍정적 활동은 그 심령이 평안할 때의 산물이다.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12:20)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오는 기쁨이며 인간과의 화목에서 오는 기쁨이다. 화해와 화목은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다.
 
4. 오래 참음의 열매
 
'오래 참음'의 원천은 사랑함에 있다(고전13:4). 그리스도인의 참음은 자기를 해하려는 악의에 대하여 예수 사랑으로 오랫동안 인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시험을 이겨내는 인내이며(약1:12), 구원을 소망하는 인내이며(마24:13), 연단과 소망을 이루는 인내이며(롬5:3,4), 복음 전파를 촉진시키는 인내이다(고전9:12).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이 악인의 죽음까지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이 구원을 얻도록 세상 끝 날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주의 약속은…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라'(벧후3:9)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2,3; 행:11;계22:20).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시지 않고 있는 것은 하루가 천 년같이, 천 년이 하루같이 택한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의 사랑이 그렇게 오래 참게 하시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13:4)
사도 바울은 사랑의 제 1속성을 '오래 참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오래 참음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오래참는 가정에 사랑이, 오래참는 사회에 사랑이 있다. 그러므로 가정과 사회가 유지되어 간다. 사랑의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는 가정은 파탄에 직면한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이게 하는데 그 사랑의 기반은 인내이다.
 
5. 자비의 열매
 
'자비'의 근원은 사랑이다. 자비는 사랑하기 때문에 베푸는 긍휼이며 협조이며 친절이다. 자비는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다. 자비는 용서하고 수용하는 내적 덕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자비는 온유한 것이며 겸손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남을 기쁘게 하고 괴로움을 덜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자비를 힘입어 구원받은 자들이다(사54:8).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므로 그 몸을 대속제물로 우리에게 주셨다(악5:11).그리스도인은 자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골3:12).
 
구약에서 이사야는 메시야의 구원에 대해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54:7,8)고 하였다. 또한 신약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는 자비가 많은 분이며(엡2:4), 모든 사람을 위해(딛3:5), 유대인을 위해(눅1:72), 이방인을 위해(롬15:9)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자비를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마9:13;12:7;약2:13).
 
성령받은 자는 성령의 열매로서 자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차별이 없고 풍부하며 영원성을 지닌 자비라고 할 수 있다. 성도도 차별 없이 자비를 베풀어야하며, 풍부한 자비를 베풀어야하며(애3:32) 여호와의 자비처럼 영원하여야 한다(대상16:4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를 베푸셨아오니 감격적으로 찬송을 하여야하는 것이다(벧전1:3-5).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나니'(출20:6;신5:10)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되고자 할 때 누구나 악인의 길을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만 자비를 맛볼 수 있다. 자비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너는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 것이며'(출23:19), '암소나 암양을 물론이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마라'고 하였다(레23:28). '소나 나귀가 넘어진 것을 보면 일으켜 주고 어미 새와 새끼를 함께 취하지 말라 이렇게 할 때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신22:4,6,7)고 말씀하셨다. 때때로 필요에 따라 동물을 식물로 취할 수도 있지만 성도의 마음가짐은 미물의 짐승에게도 자비의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신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하니라'(잠12:10).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뿐 아니라, 그가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하시면서(히2:18) 자비의 본을 여러 가지로 보여 주셨다.
 
주님은 슬픔을 당한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아들을 일으켜 주셨고 (눅7:13,14), 굶주리고 있는 자를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하여 자비를 보이셨다(15:32). 비록 귀신들린 자였지만 그들에게도 자비의 손길을 베푸셨다(마9:20-22). 자비의 대상을 찾아보면 우리 주변엔 얼마든지 있는데, 성도들은 특별히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방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가되어야 마땅하다. 믿음으로 승리한 다윗의 찬송에서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신다고 하였으며(삼하22:26;시18:25),
 
히스기야의 편지에서'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와 너희자녀가 사로잡은 자에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대하30:9)고 하였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게 되었고 축복 받는 백성이 되고 축복 받는 나라가 되었다. 예수님의 비유 중, 마지막 때에 심판자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게 되는데 오른편의 양의 무리를 향하여'너희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영접하였고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었으니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았고 병든 자를 돌보아 주었으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를 위해 한 것이므로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마25:34-40)들이라고 칭찬과 축복을 해주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6. 양선의 열매
 
양선 이란 말의 헬라어는 '아가토수네'(avgaqwsuvnh)로서 '아가토스'(avgaqov") '선한', '좋은'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영어로는 goodness, beneficence (선행)로 번역되는데 우리말로는 어질고 착함(良善)이라고 번역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은 사람의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이며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범죄 하여 파괴되긴 했지만 우리는 불완전하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연인이 양선을 추구하고 사모한다면 그리스도인의 품성은 그보다 더 어질고 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의 심성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믿기 전보다 더욱 선량해져야 마땅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까닭이다(고후5:17).
 
양선'은 보다 능동적인 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은 의무적으로, 피동적으로 선을 베푸는 자여서는 안 된다. 선은 악을 제압하는 능력으로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고 했다. 그러므로 선은 가식 없이 베풀어져야 하고 은밀하게 베풀어져야 하고 사랑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아름다운 덕을 갖추지 못했다면 뭔가 잘못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음을 생명으로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어질고 착한 성품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을 동경한다. 마음씨가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웃 사람들에게 기쁨을 줌으로써 그 사회를 밝고 깨끗하게 한다. 또 모든 사람이 그 선량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본받게 된다면 아주 건전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양선이라는 열매를 맺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나무는 나무 자체가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무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나쁜 열매만 맺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심성이 양선하면 그의 행동 역시 양선하게 된다.
 
따라서 양선이란 어떤 도덕적 우월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구체적인 또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무리 마음이 착하고 어질어도 그것이 행동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 할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쓸 데 없이 땅만 차지하는 무익한 나무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선을 베풀기를 주저치 말아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비교적 선행이 강조되지 못했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구원관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외침은 기독교를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긴 했으나,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쳐버렸다. 루터는 의로움의 조건 뿐만 아니라 의로움의 결과로서의 선행을 마땅히 강조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선행의 면에서 취약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궁이에 불을 붙였는데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2:17). 즉 선행은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증거이며 성도의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결과로서 선행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마5:16).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신24:19), 나그네를 대접하고(출23:9), 가난한 자를 도와주며(신14:28,29), 품삯을 체불하지 말 것(레9:13)과 종에 대한 선대(골4:1) 등 많은 선행의 목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록 선행을 하는 것이 힘들고 때로는 낙심될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선을 행하면서 낙심치 않고 계속하면 반드시 거두는 때가 이를 것이다(갈6:9). 심성이 고와지고 마음이 착해지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매순간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킴으로써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순간에 성령께 자신을 맡김으로써 성령의 지배 결과로 우리의 삶이 양선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7. 충성의 열매
충성(pisti")이란 성경에서 영적인 일들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며 '믿음'(faith) '신뢰'(trust) '신실함'(trustworthiness)이란 뜻으로도 사용된다. 또한 충성은 하나님의 계시나 진리의 확신, 복종(요1:12) 그리고 복종심에서 나오는 행동(고후5:7)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충성' 스러워야 한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충성해야 하고 인간에게는 신실성으로 충성해야 한다. 믿음과 신실성은 '진실','불변','의지' 등의 개념을 포함한다. 충성은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이며 추진력이다. 충성해야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충성은 믿음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충성은 열매에서 제외 된다. '하나님은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는데'(느9:7,8). 하나님은 언제나 충성스런 종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충성'(히3:2)함을 보시고 모세를 택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우리는 다윗의 충성, 요셉의 충성 ,바울의 충성 등을 통해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배워야 하며 사람을 위하여 또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깨달아 그들의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한 자는 사람에게도 충성하게 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마25:14-30) 성도들에게는 여러 가지 은사, 재능, 직분, 사명을 주셨는데, 언젠가는 계산을 하게 되고 계산을 할 때에 심판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받은 종을 향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라고 칭찬을 하였고 반대로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였는데 이는 본성이 악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것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무서운 선고를 내렸다.
 
성도들은 지극히 작은 것의 귀중성을 깨닫고 소홀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고전4:2)고 하였고, 사도 요한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권면 하였는데 물론 여기에는 서머나 교회 폴리캅 감독의 순교 일화가 있으나 순교자의 죽음만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아니다. 순교하여야만 인정되었던 시대에도 사도 요한 같이 죽지 않고도 죽도록 충성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한정된 순교자도 원하지만 마지막 때 불법이 성하고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며 충성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자를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충성심을 보고 축복하시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그대로 그의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었다(느9:8). 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자들은 많은 것으로 일을 맡게 되며(마25:21)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며(딤후2:2), 권세를 주신다고 (눅19:17)하셨다. 권세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간 권세의 결과는 역사의 심판뿐 아니라 더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큰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므로 충성하지 아니하면 더 큰 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 된 자는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약3:1) 행동해야 된다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일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어 있는데, 행위의 중요성은 구원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상급에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면류관에는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사랑의 면류관'(살전2: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행위에 따라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들이다.
 
8. 온유의 열매
 
온유(pramth")는 친절, 겸손, 동정심 등으로 부드러운 심정을 말한다.
본래 천성으로 온유한 성품을 지닌 사람도 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함이란 회개와 자기 부족을 철저히 깨달은 믿음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온유'는 겸손한 심령이 갖는 내적 덕성으로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부드러움으로 표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하신 분이시다(마11:29). 인간은 회개하고 겸손해진 자 중에서 이 온유를 발견 할 수 있다.
 
온유는 공격하지 아니하고 수용한다.
온유는 배타하지 아니하고 친화한다.
온유는 거역하지 아니하고 순종한다.
그러나 온유는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며 가장 지혜로운 잠재적 도전 능력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9,30) 하셨고 산상 수훈에서는 세 번째 복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참으로 예수님의 온유를 소유한다면 생활하는 방법이나 사고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마음에 평안과 진정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에 대하여 말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고 하면서 성도들이 예수의 온유하신 마음을 소유해야 함을 권면하였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3:12).
 
바울은 사람들이 옷을 입고 수치를 가리며 생활을 편리하게 하듯이 성도들은 예수님의 온유를 소유함으로 택함 받은 사명을 다하게 된다고 했다.
 
'너희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3:1,2)--- 온유는 소유한 자에게도 유익이 크지만 온유를 소유함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나의 행위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과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약1:21)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야 한다(약3:1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했는데, 이는 물론 이 세상의 땅을 소유한다는 관념 이상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큰 뜻이 있다.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인정받고 자녀의 권세도 누리게 된다. 시편기자도 말하기를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되고(시37:11). 악인은 땅에서 엎드려지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시147:6).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모세를 택하셨는데 물론 지도력도 있었지만 그의 온유함일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민12:3).
 
하나님은 어느 때나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을 그의 종으로 쓰시며 축복도 해주신다.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더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시76:8,9).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4)--- 인간이 육적으로 받는 축복도 좋지만 영적으로 받는 축복은 더욱 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고 능력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동참케 하신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는 축복도 온유한 자들이 누리게 된다(습2:3).
 
오늘의 세대는 악하여 힘센 자나 가진 자가 득세고 인정받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축복으로 만족케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입장에서 남자들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편이 영육에 유익이 크고 ,여자의 단장함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보다 마음에 숨은 온유로 단장함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값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3:1-4).
 
9. 절제의 열매
 
'절제'는 자기 조절 능력이다(self control). 이는 사악한 욕망에 대한 것 뿐만아니라, 긍정적 욕망에 대한 조절과 조화를 의미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고 했으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10:23)라고 했다. 절제는 자기 조화의 덕성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6:32)
성도가 마음을 절제하여 다스리지 못하면 분을 발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의심하게 되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저리 흩날리게 된다(약1:6,7). 또한 사도 바울은 그의 몸을 복종시키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절제한다고 하였다(고전9:27). 성도는 마음과 육신을 다스려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성도들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절제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성장하는 것이며 믿음에는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다. 그리고 믿음의 행위는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롬1:17).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도 절제하며 조심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4:14), '또한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5:22). 이 말씀은 은사를 사용할 때에라도 자제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하여야만 함을 가르치고 있다. 절제라는 말을 적극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환경에 구애됨이 없는 금지할 법이 없는 능력인 것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절제의 열매가 때로는 위험을 감내하는 담대함도 포함 하며 순교의 자리에서도 비굴하지 아니한 신앙의 의연함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창39:7-12; 삼하11:8; 행6:5-15;행20:21;행21:13;계14:1,4,5).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도들의 삶은 성령의 통제적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성령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영위할 때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절제는 모든 열매를 익어가게 한다.
풋냄새가 나는 열매는 향기가 적다. 잘 익은 열매는 향기가 풍성하다. 절제는 열매의 마지막 이지만 절제가 없으면 모든 열매가 풋냄새 나게 된다.성령의 열매는 앞뒤좌우상하로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움 뿐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따라 성려의 지배를 받으며 충만하게 살면 성령께서 내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사모하며 맺어지도록 노력하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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