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출 17-18장 / 광야에서의 문제들
이스라엘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에 여러 다른 경험들과 시련들에 봉착하게 되며, 이런 체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것과 아울러 자신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 장들에서는 세 가지 이러한 경험들이 나온다.
1. 바위에서 솟는 물 (출 17:1-7)
이 회중은 전에도 목이 말랐었는데(15:22)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잊은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곳에 있다면 결국 그들을 돌볼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12절에서 우리에게 경고하는바, 백성은 모세를 비난하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태도로써 사실상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며 돕지도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평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모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의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님께 돌이켜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약 1:5). 주님은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고 모세에게 지시했으며 물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다. 이 바위는 그리스도이신데(고전 10:4 참조), 바위를 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의 지팡이를 느끼셨다(이 지팡이는 뱀으로 변했던 그 지팡이였고-출 4:3,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데 도움을 준 지팡이인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는 일의 순서가 놀랍다. 16장에서는 만나가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심을 나타내며, 17장에서는 바위를 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나타낸다. 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에 주신 성령을 상징한다(요 7:37-38).
바위와 관계되는 두번째 경험에 대하여는 민수기 20장 1-13절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말하도록 모세에게 지시하셨으나, 그는 자기 뜻대로 바위를 쳤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모세는 모형을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번만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롬 6:9-10/히 9:26-28 참조). 성령은 단번에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두번째 축복들”과 성령의 “세례(침례)”를 구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범한 것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새로 못박는 것이며 이 죄는 모세로 하여금 축복의 장소 밖에 머물게 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이스라엘이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에서 마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려침을 받은 반석이 광야를 통과할 때 유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더러 있으나 이 설명이 바른 것 같지는 않다. “저희”(them)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전에는 없는 것으로, 이 문장은 그들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는데 이 일은 만나를 주신 다음의 일이라는 뜻이다(10:3/출 16:1-).
2. 대적과의 싸움 (출 17:8-16)
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축복인 동시에 하나의 전쟁인 것에 놀란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싸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었다(13:17).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적을 정복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통하여 싸우신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자손들로서(창 36:12/창 36:16) 육신으로 인한 방해를 보여 준다(창 25:29-34).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단번에 세상(애굽)에서 구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돌아 오실 때까지 언제나 육과 싸울 것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물이 주어진 후에 아말렉족속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갈 5:17).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의 본성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죄악된 본성이므로 대립이나 대결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성은 계속 싸우게 된다. 신명기 25장 17-19절은 아말렉이 “비열하게 공격”했고 뒷편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부지중에 다가온다.
이스라엘은 적을 어떻게 이겼는가? 그들에게는 산에 중재자가 있었고 골짜기에 사령관이 있었다! 산 위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보여주며, 검을 가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보여 준다(히 4:12/엡 6:17-18).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에 대한 불완전한 모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치지도 않으시며 조력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기 때문이다(히 4:16/히 9:24). 바울은 신자들이 “기도로 서로 도울 수 있다”고 말한다(고후 1:11). 아론과 훌이 한 것도 바로 이 일이다.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말한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적을 무찔렀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큰 승리로 세상을 이기신 것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 데 있어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로마서 6장은 간주하는 것과 순복하는 것,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말해 준다. 모세 혼자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역시혼자서는 전쟁터에서 승전할 수 없었다. 승리는 둘 다를 요구했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고(롬 8:34), 우리를 위하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며(롬 8:26), 그리고 손에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그는 그들을 파했을 뿐이다(13절). 이 생애 중에는 육을 멸하거나 “근절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우리에게 새 몸을 주실 것이다(빌 3:21). 육을 완전히 섬멸시키겠다는 약속은 14절에 나온다.
사무엘상 15장을 조사해 보면 사울의 죄는 아말렉을 끝까지 처치하기를 거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장 6-10절은 그를 죽인 사람이 그가 살려 두었던 아말렉 사람 중의 하나였음을 알려 준다. “육을 위해서는 대비를 하지 말자!”
“여호와닛시”(Jehovah-Nissi)는 “여호와는 우리의 깃발”이란 뜻이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요 16:33/요일 2:13-14/요일 5:4-5).
3. 세상에서 온 지혜 (출 18장)
이드로가 모세에게 준 충고가 주께로부터 온 것인가 육신에서 온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 장이 미래의 왕국을 상징하며 이때에 신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방인(이드로로 상징됨)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며 그의 통치권을 함께 나누어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하며 이것은 마치 부장들이 모세와 함께 통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드로의 권면이 육신적인 것이며 주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민수기 11장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그의 영을 70장로들에게 부어 그 능력을 나누어 주었다. 이드로는 다분히 이기적으로 문제를 해석했다.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 말은 마치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에서 “주여, 자신을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를 지지 마소서”라고 말한 것과 같게 여겨진다.
하나님은 3-4장에서 모세에게 그가 단독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드로의 의견에 동의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11절에서 이드로는 여호와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고 시인하지만, 시인이란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정확히 고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27절에서 이드로는 이스라엘과 함께 머물기를 거절하고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확실히,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그 조직에 있어 잘못된 것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이드로에게서 온 “세상적인 지혜“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드로 자신조차도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3절). 그는 여호와께서 하신 모든 일을 기뻐하였으나(9-10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와 생의 일상적인 짐을 질 수 있게 하심을 믿으려 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이드로의 책략을 채택했고 백성들도 동의했다(신 1:9-18). 그러나 하나님이 이 조직을 인정하셨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상 민수기 11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태도로 볼 때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말렉이 공격해 오듯 공개적이고 분명한 육신의 공격이 있는 반면 또한 이드로의 경우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육신의 생각들도 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부르신 일을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가능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동정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하나님이 너무 큰 짐을 지게 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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