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신명기4 - 신 27~30장(이스라엘의 장래)

JORC구원열차 2009. 6. 14. 00:46

3. 신 27-30장 / 이스라엘의 장래

 

이 부분은 예언적인 부분으로 땅과 연관된 이스라엘의 네 가지 모습을 보여 준다.

 

1. 그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신 27장)

 

이 예언은 여호수아 8장 30-35절에서 성취됨을 보여 준다. 신명기 27장 3절은 이 민족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 이 지시에 순종하는 데에 달려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골짜기는 세겜성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 전 지역은 너비가 2마일(약 3.2km)가량 되는 천연적인 원형극장을 이루고 있어서, 백성들이 율법을 읽는 소리를 듣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각 지파의 장로들은 에발산에 “큰 돌”을 세우고 거기에 십계명을 기록할 것과, 산 발치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제단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정죄함이 있으나(고후 3:7-9), 제단은 정죄받은 죄인의 필요에 대처하는 곳이었다. 번제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희생을 말해 주며, 화목제는 율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셨음을 상기시킨다(롬 5:1).

 

여섯 지파(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가 그리심산, 곧 축복의 산에 서 있는데 이들이 모두 레아와 라헬에게서 난 지파들임에 주목하자.

 

르우벤과 스불론은 레아의 아들이지만 저주의 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다(13절). 아마도 르우벤은 그의 아버지에게 범죄하였을 때 장자권을 잃었기 때문이며(창 49:4),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위인들은 법궤를 가지고 두 산 사이의 골짜기에 서서 율법을 큰소리로 부르게 되었다. 축복들은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율법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온다(갈 3:10).

 

이 전체 의식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이 언약의 민족이며(9절)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의무가 있음을 강하게 일깨웠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을 읽고 율법의 사역과 오늘날 우리의 특권인 은혜의 영광스러운 사역 사이의 대조점들을 알아보자.

 

2. 그 땅을 소유하고 누리는 이스라엘 (신 28:1-14)

 

“순종은 축복을 가져온다”(1-2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이다. 신약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순종할 때 이 축복들을 누리게 된다(엡 1:3). 이 순종의 원리가 모든 시대에서 발견되는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대항하는 자를 축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 즉 성읍, 농토, 열매, 가축, 들고 나는 모든 일에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겠다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다. 그는 그들의 적들을 꺾으시고 그 땅에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실 것을 약속하신다. 10절은 이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온 세상에 증거하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세계적인 증인이 되어 왔던 것이다(46절). 하나님은 시절에 따라 비를 내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는 그가 이스라엘을 으뜸가는 민족으로 만드실 것이며, 세계에 축복을 주는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그 땅을 얻었지만,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해야만 그 땅을 차지하고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축복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축복들은 우리가 그를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 그 땅을 빼앗기는 이스라엘 (신 28:15-29:29)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고 유배되어, 흩어졌다가 축복 가운데 돌아오게 될 미래의 예언이 여기에 나온다. 여기 나오는 축복과 저주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교회에 이것을 적용시키는 것”은 성경을 곡해하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저주이며,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내리게 된다.

 

13-19절에 나오는 이 저주는 3-6절에 나오는 축복들과 비슷하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렸던 재앙들을 포함하여 적들이 당했던 질병과 전염병들을 그들이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27절).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증거의 일례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보류하시는 것이었다(23-24/11:10-17/대하 7:14/왕상 17:1-/렘 14:1 이하). 대적들이 그들을 대패시키며 그들은 맹목적인 노예들처럼 온 땅의 지면에 흩어질 것이다.

 

36절에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게 될 것에 대한 암시가 있다(삼상 8장 참조).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은 황폐케 될 것이며, 이 땅에서 으뜸가는 나라가 되는 대신 이스라엘은 “꼬리”가 될 것이다(44절).

 

45절에 나오는 “멸하리니”라는 단어는 완전히 쓸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스스로 위반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에 내릴 무서운 시련과 징계를 가리키는 “짓밟다”는 뜻이다. 이 민족은 세계에 “표지와 경이”가 될 것이며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48-68절에서는 이 민족이 유배되어 약속의 땅을 떠나게 될 것을 예언한다. 43절은 즉각적으로는 바벨론을, 멀리는 로마를 가리킨다(철 멍에와 독수리에 주목하자/ 렘 5:15- 이하 참조). 예루살렘에 대한 무시무시한 포위 공격이 여기 묘사되어 있다(애 2:20-22/애 4:10/마 24:19 참조).

 

63절은 계속적인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이 그 땅을 빼앗기고 세계 만방에 흩어질 것이며 거기서 “평안함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세계의 유대인들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어떤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더한 고난을 당하였겠는가? 68절에는 이스라엘 중 더러는 애굽으로 데려감을 당한다고 했는데, 이는 티투스가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수많은 유대인을 애굽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29장은 언약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다시 요약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고 그들은 그에게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모세는 한 사람이 온 민족을 더럽힐 수 있다고 경고한다(18-19절).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신 비밀한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계시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순종해야할 의무가 있다(29절).

 

4. 그 땅을 회복한 이스라엘 (신 30장)

 

이스라엘은 약 1,000년간 축복을 누렸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해가 주전 1,400년이고,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정복한 때는 주전 587년경이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수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았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유배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과 그 땅을 도로 찾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물론 남은 자들이 536년에 돌아왔으나, 민족적인 대귀환은 아니었다.

 

모세가 여기서 예언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 땅에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때를 가리키고 있다(사 11:10-12:6 참조).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이키기는 했지만 불신앙 가운데서 그 땅으로 돌아왔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지만 그들 조상들의 “옛 길”로 돌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다시 그 땅을 축복하시기 시작하며 사막은 백합화처럼 피어나기 시작한다. 나라들이 찔림을 받은 메시야를 볼 때, 회개가 일어나고 모든 죄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슥 12:9-13:1).

 

바울은 로마서 10장 6-8절에서 신명기 30장 11-14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이 그에게서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그 백성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시다. 그들이 부르면 그가 구원하실 것이다!

 

모세가 한 연설의 일대 결론이 15-20절에 나온다. 이 민족은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마음에 있다(17절). 이 단어는 신명기에서 44회 쓰여졌다. 단순히 외면적인 순종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