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사무엘상3 - 삼상 4~7장(영광이 떠나다)

JORC구원열차 2009. 6. 24. 15:44

2. 사무엘 상 4-7장 / 영광이 떠나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세 가지 큰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

 

1.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다(4장)

 

1) 큰 죄(1-5절)-

이스라엘은 예비적인 전쟁에서 4,000명을 잃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이 회개하고 기도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왔던가? 아니다! 오히려 미신으로 돌아가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갔다. 이들은 믿음으로 법궤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을 명령하셨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단순한 미신이었다.

 

법궤가 광야에서 백성들 앞에서 진행하였으며 여리고 주위를 승리 중에 행진했었기 때문에, 이들은 법궤가 있음으로 해서 블레셋을 분명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법궤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서 존중하는 대신 이들은 종교적인 유품으로 바꾸어버렸다(민 10:35- 이하 참조).

 

2) 대 학살(6-10절)-

블레셋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려워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 중에 계신다 해도 용감한 군인으로 행동하기로 결심을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시편 75편 56절 이하에서는 이 비극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달려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이었으며 이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을 초래했다.

 

3) 큰 슬픔(11-22절)-

98세된 눈먼 제사장 엘리는 전령이 슬픈 소식을 가지고 실로에 도착했을 때 길가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전령은 그를 지나쳐 성읍에 그 소식을 전하였다. 성읍의 소란은 엘리의 호기심을 일으켰으며 사무엘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3:11-14/2:34-35). 전령이 나쁜 소식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네 가지로 질서있게 전하는 것에 주목하자. 이스라엘은 도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도륙을 당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죽었으며, 법궤는 빼앗겼다!

 

13절을 보면 엘리의 가장 큰 관심이 법궤의 안전에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이제 우리는 슬픔이 겹친 것을 본다. 엘리는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으며, 그의 며느리도 아들을 낳다가 이러한 충격을 받고 생명을 잃었다. “이가봇”이란 이름은 “영광이 없다” 또는 “영광이 어디 있는가?”라는 뜻이다(출 40:34- 이하 참조). “떠났다”라는 말은 “추방되었다”라고 번역되어도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다음으로 그 영광을 잃는 줄거리로 이어져 왔다.

 

2. 여호와의 이름이 방어되다 (삼상 5-6장)

 

1) 이방인들 앞에서(5장)-

하나님은 그의 죄악된 백성들로 인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지는 않으실 것이지만 그의 영광이 조롱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블레셋의 지배자들은 법궤를 그들의 이교 신당에 두고 여호와를 그들의 어신(魚神) 다곤과 같은 수준에 두었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들 위에 높이 계신다. 이교 우상들이 법궤 앞에 그 얼굴을 떨어뜨린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사 19:1 참조).

 

사람들이 다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으나(다곤은 자기를 구할 힘도 없었다.) 다음 날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은 손과 목이 없는 채 발견되었다. 여호와는 다곤이 거짓 신임을 입증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옹호하셨다. 다곤은 그의 손을 잃었지만 여호와의 손은 아스돗을 심판하시는 데 엄중하였다(6절). 하나님은 독종(종기)과 쥐(6:4)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쥐들이 농사를 망쳤으며 백성들에게 전염병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나서 법궤는 아스돗에서 에그론으로 옮겨졌으나 그곳의 주민들은 옮겨갈 것을 간청하였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방어하셨다.

 

2)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6장)-

법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암소들이 다른 도움을 받지 않고 길을 가도록 결정되었다. 암소들이 송아지들을 그리워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10절). 그러나 이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향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인도해 가신다는 증거이며, 또한 이 모든 재앙들을 보내셨다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들은 속건제물로서 수레에 다섯 개의 독종 형상과 다섯 개의 쥐의 형상을 함께 실었다. 하나님은 그 소들을 인도하셨고 소들은 수레를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으로 끌고 갔다. 밭에서 추수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나, 호기심이 생겨 법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19-20절),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

 

19절에 나오는 숫자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 작은 마을의 주민은 50,000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는 문자로 숫자를 나타냈는데 글자 하나를 잘못 쓰거나 잘못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즉각적으로 70인이 심판을 받은 것 같으며 작은 마을에서는 “대 살육”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잔혹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믿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생활이 악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셨고, 엘리는 여호와를 욕되게 하는 자기 아들들을 징계하지 않았으므로 죽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신들 중의 하나처럼 취급함으로 인하여 죽었으며,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와 너무 친근하게 되어 부주의하게 법궤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죽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다 (삼상 7장)

 

법궤는 실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셨는가? 그의 종 사무엘이 적을 무찌르고 왕국을 재건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무엘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을 치리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절은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이방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길 마음의 준비를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민족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패배하여 평판이 나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엘리가 만일 충실한 아버지였다면 그의 아들들도 충성된 제사장들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패배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은 남성 및 여성 신들을 대표하였다. 그들의 예배는 언어도단의 음란한 의식들을 행하였다.

 

사무엘은 기도 모임을 열기 위하여 미스바로 이 민족을 불러 모았다! 사무엘은 언제나 기도와 연관되어 있다(12:23 참조). 그는 어머니의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났다(1장). 그는 그 민족을 위하여,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기도하였으며(7:13),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무시하고 왕을 요청하였을 때 기도하였다(8:6). 그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사울을 거절하셨던 후에도 왕을 위하여 기도하였다(15:11).

 

어떤 이들은 사무엘을 “하나님의 보결 선수”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확실히 적합하다. 사무엘은 제사장직이 부패하고 민족이 실의에 빠져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을 때에 무대에 들어섰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얼마나 놀랍기 사용하실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2장 9-10절에 나오는 그녀의 노래(예언)를 보라.

 

미스바의 사건들은 이러하였다.

(1)사무엘은 이 민족의 회개를 상징하는 뜻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쏟아 부었다.

(2)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함을 시사하는 번제를 드렸다.

(3)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우려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가운데 사무엘은 그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에 큰 승리를 주셨다. 그 날이 얼마나 축복된 날이었겠는가! 사무엘은 삼손이 지도력을 행사한 20년 동안 누릴 수 없었던 승리를 한 번의 기도로써 성취하였다! 그 날 이후로는(다윗이 블레셋을 크게 이길 때까지) 적들은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헌신한 삶의 능력이며 기도의 능력이다(약 5:16).

 

사무엘은 선지자와 사사로서의 사역을 확고히 해 나갔다. 각 성읍들을 여행하며 백성들을 치리하고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 그는 마지막 사사였고 최초의 선지자였다(모세의 선지자 직분은 약간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경건한 행실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게 됨은 슬픈 일이다(8:5). 아마도 그 민족의 일을 돌보는 데에 너무 바빠서 그들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 같다. 엘리도 이와 유사한 실수를 했었다.

 

이 사건들은 경건한 가정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민족이 죄에 빠져 패전한 것은 엘리가 자기의 가정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어머니(한나)의 기도와 하나님이 주신 그녀의 아들로 인하여 그 민족을 구원하셨다. 가정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나라의 어떠함이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