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왕기하 5장 / 나아만의 병 고침
1. 나아만의 저주 (왕하 5:1-19)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사례를 본다. 모든 잃어버린 죄인들은 자신이 나아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구원하는 믿음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1) 그는 정죄되었다-
그가 정죄되었다는 근거는 문둥병에 걸렸다는 점이다. 그의 아름다운 복장과 승리의 위업들도 그가 죽은 사람,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위장할 수는 없었다. 레위기 13장은 문둥병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죄를 예증하는 것이다. 피부 깊숙이 파고들며(3절), 퍼지며(7절), 사람을 더럽게 하여 고립시키며(45-46절), 불로 처리되어야 한다(52절). 물론 수리아의 법은 문둥병자를 격리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로 오면 하나님의 법은 나아만에게 따로 떨어져 있을 것을 명령한다.
2) 그는 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을 집에서 하녀로 쓰고 있었다. 이 소녀는 침략했을 때 사로잡혀 온 것이다. 나아만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었다(엡 2:11-22 참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주셨다(롬 5:6-10).
3) 그는 간증을 들었다-
어린 유대인 소녀는 주인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간증하는 데 민첩했다. 만일 그녀가 그 가정에서 충실한 일군이 아니었더라면 효력있는 간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되게 일하였으므로 그녀의 간증은 보상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런 간증들을 필요로 하신다.
4) 그는 스스로, 구원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고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해보았으나 고칠 수 없었다. 우선, 그는 수리아의 왕에게 갔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그는 이스라엘 왕에게 갔으나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죄인들은 왕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롬 10:9-10). 얼마나 많은 잃어버린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찾아다니는가!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고자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나아만은 또한 은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5절). 잃어버린 죄인은 구원을 사거나 벌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벧전 1:18-20).
5)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곤경에 대하여 들었으며 사람을 보내어 오게 했다.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죄인은 아무도 없다. 다만 인간이 그리스도께 오게 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운 부르심으로만 가능할 뿐이다(요 6:37 참조). 누가복음 4장 27절에서 예수께서는 나아만이 많은 문둥병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고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6) 그는 하나님의 간단한 구원의 방법에 저항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 장군은 문둥병자였으며 선지자를 더럽힐 위험이 있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거절당하고 정죄받은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교만한 장군을 죄인처럼 다루었다. 그러나 나아만은 평범한 죄인으로 취급받는 것에 화를 냈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오늘날의 죄인들처럼, 나아만은 선지자가 세례(침례), 성찬식, 견진례 등 어떤 의식을 행하리라고 생각했다(11절). 그래서 그는 스스로 겸손하게 죽음의 강인 요단강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집 근처에 있는 친근한 강들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7) 그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
13절에 나오는 겸손한 종은 대 장군보다도 생각이 예민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간단한 구원의 길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일인가! 박식한 니고데모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요 3장). 그러나 나아만이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 그는 “거듭났으며” 어린 아이의 피부처럼 정결하게 되어 물에서 나왔다. 요단강에 일곱 번 잠긴 것은 세례(침례)의 상징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침례)는 한 번 받는 것인데 여기서는 일곱번을 잠겼으며 또한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행위로써 입증이 되었다. 그는 말씀을 신뢰하였으며 말씀에 따라 행동했다. 믿음은 일곱 번이라도 행동하게 한다.
8) 그는 확신이 있었다-
전에 그는 “보라,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했으나 이제는 “보라, 내가... 아노니”라고 말한다(15절). 그는 하나님의 능력의 실제와,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공식적으로 간증하였다. 나아만은 너무도 감사하여 엘리사에게 재물을 제공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제안은 거절되었다. 만일 그 선물이 용납되었다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교훈을 망쳐놓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훔쳤을 것이다.
9) 그는 평화 가운데 집으로 갔다(19절)-
그는 수리아로 돌아가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의 왕이 우상 숭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아만은 여호와께 순종하기를 원하였으며 온전히 그를 높이고 싶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과 화평하다“(롬 5:1).
2. 게하시의 탐욕 (왕하 5:20-27)
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문제를 일으키고 죄를 짓게 되는 시작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그래서 마음의 탐욕을 심판했더라면 결코 문둥병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의 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내가... 하리라”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사람이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얼마나 재빠르고 능률적으로 되는지에 유의하자. 그는 죽은 소년을 일으키려고 갈 때에는 뛰어가지 않았다(4:29-31). 그러나 여기서 그는 물질적인 재물을 얻으려고 나아만에게 달려간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일들에서처럼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제 우리는 두 가지 거짓말을 보게 된다.
1) 그는 나아만에게 거짓말했다(21-32절)-
“내 주인이 나를 보내었는데, 엘리사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도 중의 몇 명을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그는 장군에게 말하였다. 유다처럼 게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요 12:1-7).
물론 돈을 받음으로써 게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훔쳤으며, 선지자의 교훈을 위반하였고, 구원에는 돈과 선한 행실이 개입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한 가지 이기적인 행동이 전체의 상징적인 교훈을 망쳐놓았다. 게하시는 나아만의 두 종들이 그를 위하여 옮겨다 줄 만큼의 재물을 얻었다.
2) 그는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25-27절)-
그는 들어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선지자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엘리사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주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다.
26절은 게하시가 유다와는 달리 자신의 작은 농장을 마련하는 데에 그 돈을 사용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이 사건이 있기 오래 전에 이미 탐욕이 그의 마음에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4장에서 우리는 그가 죽은 소년을 일으키는 데 얼마나 능력이 없었는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심판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직접 그를 심판하셨다. 나아만의 문둥병은 그에게, 그리고 그의 자손에게로 옮겨졌다.
우리는 8장 1-6절에서 게하시가 다시 나오는 것을 보는데, 이번에는 왕의 앞에 출현한다. 어떤 이는 그가 회개하여 고침을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이에 대해성경에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질병은 그의 자손들에게 전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해답은 간단하다. 열왕기하에 기록된 사건들은 반드시 사건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은 아니다. 게하시와 왕과의 대화는 아마도 왕이 백성들의 불평을 들으려고 할 때에 성문에서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여호와께 헌신한 종이 탐심으로 인하여 수치와 거절을 당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신성 모독(베드로의 경우), 또는 간음(다윗)인 듯하지만, 사실은 탐욕이라는 감추어진 죄인 것이다. 탐심이 모든 죄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또는 어떤 사람을 탐하게 되면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범하지 못할 죄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 엘리사는 물질적인 소득을 위하여 살지 않았다. 그는 온전히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다.
게하시는 여호와와 돈이라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었다. 골로새서 3장 5절은 탐심과 우상 숭배를 동일하게 본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7장 22절에서 탐심을 육의 무서운 죄와 관련시켜 생각하신다.
바울은 로마서 1장 29절에 나오는 “이방인의 죄의 목록”에 탐심을 기록한다.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서 주님은 탐심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16장 13절 이하에서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보여 준다(엡 5:3 참조).
2-3절에 나오는 하녀와 게하시를 대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녀는 노예였으나 여호와를 위하여 즐거이 증거하였던 반면에 게하시는 자유로운 자로서 그의 고국에서 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나아만을 구원의 장소로 인도한 반면, 그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었다. 그녀는 물질적인 소득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축복을 받았고, 게하시는 재물을 가져왔으나 모든 것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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