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열왕기하7 - 왕하 18~20장(히스기야의 통치)

JORC구원열차 2009. 7. 1. 00:49

7. 열왕기 하 18-20장 / 히스기야의 통치

 

우리는 이제 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흥미진진한 기간의 하나인 경건한 왕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연구에 들어섰다(사 36-39장/ 대하 29-32장 참조). 사마리아(북왕조 이스라엘)는 앗수르에게 몰락하였고, 이제 적은 유다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하스는 수 년 전에 앗수르와 조약을 맺었으나(16:7-9) 히스기야는 이를 반역하였으므로(18:7/18:13-16), 적의 침략을 초래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 세 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정확한 순서에 따라서 기록된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난 것은 포위를 당하고 있는 동안이었다(20:6 참조). 그는 회복된 후에 바빌로니아 지도자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는 29년을 통치하였으며(18:2), 회복한 후로는 15년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침략은 그의 통치 기간의 14년 째에 발생하였으므로(18:13) 발병과 침략을 받게 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된다. 히스기야가 직면해야 했던 세 종류의 적들과, 그가 이 적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주목하여 보자.

 

1. 앗수르의 침략자 (왕하 18-19장)

 

1) 히스기야의 개혁(18:1-8/대하 23-32 장)-

이 경건한 왕은 즉각적으로 그 땅에서 우상 숭배와 죄를 제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성전을 다시 열어 수리하였으며 거기 모아 두었던 폐물들을 청소해 냈다. 그리고, 제사 의식을 다시 거행하였는데, 특별히 찬양대와 희생제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또한 유월절 절기에 전체의 민족(이스라엘을 포함하여)을 소집하였다. 이것은 갱생의 기회였으나, 불행하게도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변화는 다만 표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사랑했음을 입증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하여 축복을 내리셨다.

 

2) 히스기야의 반역(18:9-37)-

오랜 동안 이 민족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쳐 왔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반역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하여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는 대신에 두려워서 굴복하였으며 앗수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성전의 것을 훔치기까지 하였다.

 

이 당시 유다에는 세 당파가 있었다.

첫째는 앗수르에게 항복하자는 당파였고 두번째는 애굽에 도움을 청하자는 당이었으며, 세째는(이사야의 인도를 받아) 이 민족이 구원을 받기 위해 여호와를 의지하자는 파였다 사실상, 앗수르왕은 돈을 받고도 마음을 바꾸어 결국 침략을 하였다. 이사야는 이것을 “배반”이라고 불렀는데(사 33:1-8), 앗수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앗수르 장군들 중의 셋이 유대인들을 조롱하였다(17절/ 이것은 장군들의 계급 이름이다). 이들은 히스기야의 믿음과 지도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31-32절은 죄의 속임수를 예화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평화와 풍족케 해 줄 것을 약속하였는데 결국에는 포로로 잡혀가기에 이르렀다.

 

3) 히스기야의 간구(19:1-19)-

자기 힘으로는 자신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왕은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다. 2절은 성경에서 제일 먼저 이사야 선지자에 대해 언급된 곳이다. 선지자는 왕에게 “하나님이 유다를 건지시고 앗수르를 멸하시리라”는 평화의 답을 보내었다. 다른 나라들과의 역경들로 인하여 앗수르는 군대를 되돌려 갔다. 그러나 랍사게는 오만한 편지를 보내어 그를 위협하여 항복하게 하려 하였다. 왕은 편지를 성전으로 가져가 “여호와 앞에 펼쳐 놓았다.” 19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강조를 두고 있는 것에 주목하자. 이것은 기도의 참된 기본이다.

 

4) 히스기야가 받은 보상(19:20-37)-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관계이다. 히스기야는 기도하였고,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앗수르를 판단하실 것이며 나라들에게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2년 후에는 다시 추수를 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29절).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기도에 응답하셨으나, 유다와 왕이 이같은 자비를 받을만해서가 아니었다(34절). 하나님은 하룻밤에 185,000명의 군사들을 죽이셨으며, 산헤립은 후에 자기의 아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하나님은 애굽의 도움 없이도 적을 무찌를 수 있으셨다(사 30-31장 참조).

 

2. 죽음 (왕하 20:1-11)

 

죽음은 “마지막 원수”라고 불리워진다(고전 15:26). 앗수르가 침략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동안 왕이 아프다는 것은 대단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여러 겹으로 오는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대처하시기에 넉넉하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병을 보내셨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히스기야의 불신앙과, 18장 13-16절에 나오는 조공을 기꺼이 바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은밀한 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사 38:17 참조).

 

이사야 38장 9-20절에 나오는 왕의 찬양의 시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개혁을 끝마치기 위하여 살아 있기를 원함을 시사한다. 어찌 되었거나, 히스기야는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기를 기도했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특별한 치료 방법으로 고치셨는데, 이때에는 무화과 반죽을 사용하셨다(그러나, 의사에게 가는 것이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15년을 더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해시계의 그림자를 10도 쯤 뒤로 물러가게 하심으로 그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셨다(해시계란 단계별로 시간을 표시하게 된 큰 돌인 것 같다). 왕은 이 일을 그의 창문에서 볼 수가 있었다.

 

성경 연구자들은 히스기야가 치료를 위해 기도를 했어야만 했는가, 또는 히스기야가 회복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인가 아니면 그의 허용적인 뜻인가에 대한 문제로 오래도록 논란을 벌여 오고 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길이 아닐 때라도 기도에 응답하셔서 들어 주시는 때가 있다(시 106:15). 히스기야가 옳지 않았다고 말하는 연구자들은 왕의 마지막 15년이 바벨론과의 악한 동맹을 맺은 때였고(20:12-21), 유다의 가장 사악한 왕으로 밝혀진 므낫세가 출생한 때임을 지적한다(21절). 만일 히스기야가 죽었더라면 유다는 바벨론과 타협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므낫세의 사악한 통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므낫세는 회개하였고 마침내 여호와를 섬겼다(대하 33:11-13).

 

반대로, 또 다른 이들은 이사야가 운명의 메시지를 히스기야에게 전했을 때 그에게는 보좌를 상속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그의 기도는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 국가를 위한 기도이기도 했다.

 

20장 1절에 나오는 “집을 처치하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당신을 계승하여 보좌에 오를 한 사람을 뽑으라”는 말이었다. 하나님은 유다의 보좌에는 언제나 다윗의 자손이 오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약속 앞에 붙들어 두고 있었다. 그의 모든 아들은 마지막 15년 사이에 태어났다(20:18 참조). 므낫세가 경건하지 못한 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이것은 아버지인 히스기야에게는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그 다음 왕인 요시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히스기야가 죽었다면 요시야도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에는 히스기야의 마지막 통치 15년 동안 그가 “히스기야의 사람들”로 더불어(신하들의 기관/ 잠 25:1) 구약 성경을 복사하며 순서를 붙였음을 시사하는 많은 구절들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가 히스기야의 병과 회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함께 엮어진 것임을 믿는다. 또한 히브리 성경 각 권의 끝에는 히브리 문자로 “H Z K”라고 쓴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인 듯하다.

 

히스기야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15년을 백성들을 위하여 구약에 차례를 붙이는 일에 헌신하였다. 사람이 사악한 아들을 낳았으므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다윗의 아들들은 솔로몬을 포함하여 사악했었는데 하나님은 왜 다윗을 살도록 허락하셨는가? 하나님은 아직 잉태되지도 않은 아이의 미래에 범할 죄로 인하여 그 사람을 죽이시는가? 더구나 왕의 병고침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동시에 일어났다(20:5-6). 성은 구하면서 그들의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을까?

 

아마도 이런 면에 대한 문제점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신자는 기도하는 중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갈 권리가 있으나,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요일 5:14-17).

 

3. 바벨론의 방문객들 (왕하 20:12-21)

 

앗수르가 무력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바벨론은 책략으로 성취하였다. 사단은 사자요 뱀이다. 병을 고침받고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은 후 히스기야의 교만은 바벨론과의 사악한 동맹을 맺게 하였다. 역대하 32장 25-26절과 31절은 모두 그가 치료를 받은 후 교만하여져서 징계를 초래했다고 시사한다. 왕이 적에게 자기의 재물과 무기를 보게 한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결국은 그 일로 인하여 민족이 고난을 당하였다. 15절에 나타난 왕의 교만에 유의하자. 그는 “나의 집... 나의 보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던 히스기야에게 치료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바로 그 선지자는 이제 “보물과 그의 아들들이 바벨론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슬픈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였다. 하나님은 왕이 자기의 보물과 그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의지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고 계셨다(대하 32:31). 므낫세는 바벨론으로 잡혀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스스로 겸손케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내셨다(대하 33:11-19).

 

히스기야가 민족의 장래보다도 당대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게 됨은 슬픈 일이다. 결정적인 패망이 모퉁이에 있는 때에 일시적인 평화를 누리며 쉬는 것은 가장 현명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위대한 왕으로서 히브리 역사에 기록된다. 그는 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고 관개시설을 향상시켰으며, 우상을 일소하였고 백성들을 여호와께 인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여호와 앞에 기도를 펼쳐 놓는” 방법을 아는 기도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