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기 1-3장 / 욥의 재난
우스 땅은 우리가 지금 아라비아 북부라고 부르는 곳인 듯하다.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거기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1. 욥의 재산 (욥 1:1-5)
어느 면으로 보나 욥은 부유했다. 성품도 부유하여 “완전하고 의로웠다.” 그가 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여호와 앞에 순전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공포감으로가 아니라, 겸손하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는 악에서 자신을 분리시켰다. 그의 가족들도 풍성하였다. 아들 일곱에 딸이 셋이었다. 동양에서는 대가족(특히 아들들)을 몹시 선호하였다.
5절에서, 욥이 그의 아들들과 딸들을 위해 영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으며, 제단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음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경건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행운이었을까? 욥의 아내는 욥이 소유했던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물론 그처럼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남편이 죽기를 바라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 하나님은 그녀가 잘못임을 입증하셨다(19:17 참조).
욥은 “소유”에 있어서도 풍족함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가축은 수천을 헤아렸다.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신 것이 분명하며 욥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 찬양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빌 4:12)라고 썼다. 우리들 대부분은 비천에 처했을 때, 그리고 일들이 제대로 안 풀릴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일들이 잘 풀려 번영할 때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기억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욥은 돈과 소유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2. 욥의 불행 - 사단의 첫 고발과 공격 (욥 1:6-22)
사단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계 12:7-12 참조). 하늘에서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고발한다(슥 3 장 참조). 하늘에 우리를 위한 변호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가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요일 2:1-2)!
욥이 모르게 하나님은 사단과 욥의 경우를 논의하였다. 만일 욥이 이러한 대화를 알았더라면 의문을 가지거나 신경을 쓸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단의 거짓말을 꾸짖게 하는 데에 욥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늘의 회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으며 믿음으로 이 시련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단은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이 땅을 오르내리도록 허락을 받았다(벧전 5:8-9).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은 마땅히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는 실례로서 욥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즉시로 사단은 욥을 위선자로 고발하였다. “욥이 순종하는 유일한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이니, 그의 부를 취하소서, 그리하면 그는 당신의 얼굴을 저주할 것이니이다!” 신자들은 주님이 “울타리”가 되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사단이 손을 댈 수가 없다(눅 22:31-34 참조).
사단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못하다. 사단은 전능하지 못하며 그 능력에 있어서 유한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은 전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번 경쟁이 어떻게 되어 갈 것인지 알았더라면 결코 대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 세상을 자기의 무릎 위에 놓고 있으나(요일 5:13) “세상에 있는 자(사단)”보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더욱 크시다(요일 4:4).
허락을 받자마자 사단은 욥의 소유를 공격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리고 잠깐 동안에 욥은 극빈자가 되어 있었다. 사단은 욥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원수의 군대들, 불, 강한 바람과 같은 일반적인 것들을 사용하였음에 유의하자. 욥의 친구들은 이러한 일들이 사단에게서 왔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어떤 이는 불(아마도 번개)을 “하나님의 불”이라고 불렀다(1:16). 욥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애도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말은 하기 쉽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가져가셨다”는 말은 하기가 좀 어렵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진실한 신앙이 필요하다.
3. 욥의 불행 - 사단의 두번째 고발과 공격 (욥 2:1-13)
욥이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찬송하였겠는지 생각하여 보라. 사단에게는 참으로 비난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하나님은 사단을 상기시켰다(2:3). 그런데 사단은 그 혀로 또 다른 거짓말을 한다. “나로 그의 몸을 치게 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게 하소서, 그러면 그가 어느 정도로 충성스러운지 알게 될 것이니이다.” 하나님은 이 말을 허락하셨으나 사단에게 제한을 두셨다. 왜냐하면 사단(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사망의 권세를 가짐)은 하나님의 뜻을 지나쳐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욕창”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문둥병이나 피부병의 형태를 취한 듯하다. 어쨌든 그는 고통으로 가득 채워졌고, 그의 외모는 엉망이었으며(19:13-20) 아무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아내는 그가 고통당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으며 한 순간의 불신앙으로 그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심판을 받아 죽으라고 말하였다(9-10절). 때때로 하나님은 재앙이 우리의 생활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신다(2:10).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욥이 자신을 낮추는 행위에 동참하여 일주일 간 그와 함께 울면서 조용히 동정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사단이 욥의 아내와 그의 세 친구들의 말과 행동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사단은 유다와 베드로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사용하였다.
4. 욥의 혼란 (욥 3장)
이 장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욥은 사단이 예견한 것이나(1:11/2:5) 또는 그의 아내가 제안했던 것처럼(2:9)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 사단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이 유익하다. 미래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이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씌어진 것뿐이다. 욥이 저주한 것은 그의 생일이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소원한다. 태어나서 바로 죽었더라면 살아서 이러한 근심을 견뎌야 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3-19절에 나오는 무덤에 대한 욥의 묘사는 신약에 나오는 계시를 보충해 준다. 욥은 모든 사람들, 즉 죄인들과 성도들이 똑같이 안식과 축복의 위치로 간다고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들은 죽어서 형벌의 장소로 가는 반면에 신자들은 즉시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간다. “분명히 나는 이보다는 나은 것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욥은 말하고 있다. 욥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했다.
20-24절에서 욥은 “어째서 나같은 곤고한 사람들이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의 비참함이 무엇을 이루는가? 나는 죽고자 하여도 죽음이 오지 않는구나”라고 말한다. 고난은 무엇을 성취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는 바로 그때 일을 한다.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후 3:7-5:9 참조). 욥은 “하나님의 결말(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약 5:11). 우리는 하늘의 법정을 비추는 희미한 빛(성경)을 소유하였으므로 주님의 목적을 알 수가 있다.
25-26절은 욥이 때때로 시련에 대하여 생각했으며 이런 일들을 직면할까봐 두려워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는 번성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부와 건강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는 놀랐었다. 그는 육신적인 안전성이나 거짓 평화 가운데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믿고 있었으며 자기의 소유를 믿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닥쳤다.” “그가 처했던 환경에 처해보기 전에는” 욥에 대하여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는 말자. 성공의 절정기에서 하나님을 믿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 때, 그리고 우리의 고통이 이처럼 강렬할 때 우리는 죽고 싶어지며, 믿음이란 다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였다는 말은 없으며, 주님의 능력과 거룩하심에 대하여 의심을 한 일도 없다. 사실상,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문제였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처럼 혹독한 재난을 허락하실 것인가?
경건한 사람이 죽기를 원했다고 하여 우리에게 이상할 것은 없다. 모세는 자기 백성의 끈질긴 반역으로 인해 자기의 생명을 가져가 달라고 청하였다(민 11:10-15). 그리고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였을 때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왕상 19장), 요나도 죽기를 원하였다(욘 4:3).
3장에서 욥이 “왜?”라는 질문을 다섯 번 묻는 것에 유의하자(11, 12, 23절). 만일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면 욥은 고통과 근심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물어 보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조정하고 계신 것과, 이러한 사건들이 사랑의 계획의 일부이며 어느 날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을 알리실 것을 믿고 있었다.
당신이 생의 시련들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킬 때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심을 기억하라. 욥기 23장 10절에서 욥이 자기의 신앙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용광로 속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 중의 하나가 용광로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도 그와 함께 거기에 계신다(사 43:1-2/단 3: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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