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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마태복음12 - 마 11장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

by JORC구원열차 2009. 7. 9.

12. 마태복음 11장 /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

 

마태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에 봉착하게 된다. 왕의 출현은 이제 완성되었고(1-10장) 이제는 왕에 대한 반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11-13장).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계시하신 모든 것을 반역한다.

 

● 요한에 의해 알려지심-요한이 체포되도록 방관함 / 11장1-19절

● 많은 기적들을 이루심-성읍들이 회개하기를 거절함 / 11장20-30절

● 자신의 원리를 알리심-그들이 원리에 대해 논박함 / 12장 1-21절

● 자신의 인성을 보이심-그를 사단의 공역자로 몰아세움 / 12장 22-50절

 

물론 그 결과로 예수께서는 그 백성에게서 돌아 서셨고(14-20장) 십자가로 향하신다. 여기에서 시작된 반역은 후에 노골적인 거절로 변한다.

 

1. 세례(침례)요한에 대한 설명 (마 11:1-19)

 

1) 의뢰(1-3절)-

이 때 요한은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4:12). 성령께서 그에게 누가 메시야인지를 말씀하셨는데도(요 1:29-34) 그는 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의심하였는가? 그 답은 “다른 이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다. “다른” 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한 경우는 같은 종류로 하나 더란 뜻이고, 예수께서 “나와 같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하신 단어이다.

 

마태복음 11장 3절에서 사용된 “다른”은 다른 종류 하나라는 뜻이다. 요한은 왕의 오심을 알렸고 심판과 고난의 날이 온다고 확언했었다(마 3:7-12).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비의 사역을 하고 계셨다. 요한은 “당신은 메시야이십니까? 아니면 이 백성을 징계하고 죄를 심판할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으므로 요한의 시각이 어둡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한에게 임했던 성령이 구약의 엘리야와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왕상 19:1-4 참조).

 

2) 대답(4-6절)-

예수께서는 부드럽게 그의 종에게 확신을 주시며 요한의 믿음을 격려하신다. 이 구절을 누가복음 7장 18절과 비교해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병을 고치는 사역에 대하여 요한에게 보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예수께서 “가서... 요한에게 다시(우리 말 성경에는 없음) 알리라”고 하신 이유도 이것이다(11:4).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께서는 구약이 이루리라고 말해주던 그 기적들을 성취하고 계심으로써, 자신이 그 왕이라고 요한에게 확신을 주고 계신다(사 35:5-6/사 61:1).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사야 8장 14-15절을 가리키신 듯하다. 그리스도는 요한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의심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도 좋은 교훈이 된다.

 

3) 승인(7-15절)-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인정하신 말씀은 굉장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드리려는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잘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 종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사역으로 말라기 3장 1절이 성취된 것이라고 언급하신다. 만일 그 민족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요한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엘리야였을 것이다(14절/ 마 17:10-13 참조). 이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말라기 3장 1-3절의 문자적이고 최종적인 성취는 말세에야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요한은 구약예언자들의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왕국을 전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천국 안에서 가장 못한(겸손한) 사람보다 낫지 못하다(11절).

 

4) 책망(16-19절)-

그리스도는 그 세대 사람들이 어린 아이인 것을 책망하신다. 민중을 기쁘게 하는 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요한과 예수님은 생활이나 사역에 있어서 반대였으나, 그 어느 쪽도 어린 아이인 군중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25-26절에서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만이 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오늘날 세상은 마치 항상 오락과 새 것만을 찾는 응석받이 아이들과 같다. 이들은 삶이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해지기를 거부한다.

 

2. 성읍들에 대한 저주 (마 11:20-24)

 

예수께서 저주를 담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많은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으며 그의 제자들도 기적을 행했다. 그런데도 성읍들은 주님을 거절하셨다. 가버나움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그리스도의 사령부를 두었던 곳이기 때문이다(마 8:5-17/9:1-).

 

가장 밝은 빛에 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개인이 받은 빛의 정도의 많고 적음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알고도 등을 돌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3. 짐 진 자들에 대한 초대 (마 11:25-30)

 

이 시기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어려운 시기였다. 왕에 대한 반역이 이미 형성되었고 공개적인 거절도 최고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따라야 할 참다운 본보기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우리의 생활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혜있고 분별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나 단순하고 믿음 있는 보통사람들을 구원을 위하여 택하셨다(고전 1장).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비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찬양하고 순종할 수는 있다. 여기 나오는 그리스도의 초청은 그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10장 5-6절에 보면 메시지가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아오게 될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놓으신다.

 

1) 나의 멍에를 메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짐을 지웠다(마 23:4). 그런데 그들의 종교는 백성들에게 쉼과 평안을 주지 못했다. 어떤 종교라도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괴롭히며 결박하는 바리새인들의 멍에와는 대조적으로 평안한 멍에를 주신다. “쉼”이란 말이 이중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2)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쉼이란 구원과 함께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는 말씀 중의 “쉼”이란 헌신(항복)할 때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빌 4:6-9).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 실천적인 교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실망에 빠지기도 하며 믿음의 빛을 잃을 때도 있다. 세례(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으나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의 바울의 태도와 비교해 보자(빌 1장).

 

우리의 직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어린 아이같은 일시적인 기분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는 마태복음 11장 16-20절이 사실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이 세대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죄이다.

 

음란한 일들로 가득 찼던 소돔은 종교심으로 가득 찬 가버나움보다 심판 때에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사셨는데 그들은 그를 거절하였다. 특권에는 책임이 수반되며 책임은 언제나 해명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빛이 밝을수록 심판도 크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미약한 이해와 설명을 초월해 계신다(롬 11:33-36).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눈이 멀었고, 교회가 부름을 받게 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에 겸손히 경배하여 절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