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요한복음14 - 요 14장(영혼의 집)

JORC구원열차 2009. 7. 13. 10:44

14. 요한복음 14장 / 영혼의 집

 

왜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했는가?(1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그들 곁을 떠나실 것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일은(13:36-38) 의심할 바 없이 그들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베드로를 지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자신의 괴로운 마음은 제자들의 괴로운 마음과는 전혀 다르기는 하나, 자신의 내면적인 부담을 나타내셨다(13:21). 아마도 그 배반에 대한 말씀 또한 그들을 낙심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열 두 제자를 위로하려고 하시며 그들의 불안한 마음의 요구에 응하셔서,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말씀해 주셨다.

 

1. 그들을 위해 한 장소를 예비하기 위함 (요 14:1-6)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를 “마음의 상태”가 아닌 실제적인 장소로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사랑이 가득 찬 가정으로 묘사하신다. “처소”란 실제로, “거하는 장소”로서 우리의 영원한 하늘의 집을 말한다. 하늘나라는 예비된 백성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목수”이신 그리스도는(막 6:3) 오늘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하늘의 집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그에게로 자기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바울은 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서 이 약속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몸 안에 없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아 계셨다면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늘의 집을 마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죄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은 가능하다.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와 있는 탕자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14장 6절과 관계가 있다. 죄인의 상징으로서 그 아들은 잃어버린 자이며(15:24) 무지하였고(15:17 / “스스로 돌이켜”) 죽어 있었다(15:24).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왔다(15:20). 그는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그는 무지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집에 당도하였다.

 

2. 그들에게 아버지를 보이시기 위함 (요 14:7-11)

 

빌립의 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늘 보기를 원했다. 1장 46절에서 그는 처음에 “와 보라”고 말했고, 6장에서는 많은 무리를 보고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먹이실 수 없을 것으로 결론지었다(6:7). 빌립에게로 왔던 헬라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말했다(12:21).

 

예수께서는 자기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9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리라”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게 되는 것처럼 아버지를 보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이다.

 

3. 그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허락하시기 위함 (요 14:12-14)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동안 그는 그들의 필요들을 공급하셨는데(16:22-24),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그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남겨 놓으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그분 자신의 요구를 위해서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12절의 “더 큰 일”이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놀라운 기적과 축복들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반면에 우리는 토기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큰 일”이다.

 

4.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 (요 14:15-26)

 

이 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려 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혜사”(위로자)라고 부르고 계신데, 직역을 하자면 “너희를 도우려고 곁에 서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다른”이란 말은 “같은 류의 다른 것”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제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제자들 곁에 계신 구주를 대신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깨닫게 하면 성도를 인도하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17:17).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14:6).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 성령께서는 보는 것의 응답이 아닌 믿음의 응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18절)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문자적으로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온다”(현재시제)라고 읽혀진다. 아마도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에 사도들에게 오실 것과 성령의 인격 속에서 그들에게 오시는 것, 미래에 그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려고 오시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21-26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가질 더 깊은 교제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기들이 “고아들”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18절/ 문자적으로 “위로가 없는”이란 뜻임), 사실상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성도와 구세주의 더 깊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21절) 말씀을 사랑하는 것, 또한 성령의 가르치는 사역을 포함한다(26절).

 

말씀을 배우는 데에 시간을 드리며 그 말씀을 살아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가깝고도 만족케 하는 교제를 즐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얄팍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말씀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14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하기 위해 하늘로 가는 성도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성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 오시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실로 “지상에서의 천국“이다.

 

5. 그의 평안을 허락하시기 위함 (요 14:27-31)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평안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방법으로 주지 않으셨다. 세상의 평안은 얕고 불만족하며 일시적이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만족을 주며 영원히 머무른다.

 

세상은 외적인 수단을 통해서 평화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마음 속에 평화를 주신다. 심리학자들은 “정신(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롬 5:1). 빌립보서 4장 4-9절에는 신자가 평화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니”(28절)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지상적인 삶의 날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며, 인간의 아들(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과 일들을 주신 아버지께 순종하셨다(14:10/14:24).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돌아가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혼란과 불안을 조성하는 사단을 패배시키셨다(30절). 남아 있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비극이나 실수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31절에서 십자가가 아버지를 향한 그의 사랑의 증거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명하셨기에 죽으셨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

 

이 장을 다시 읽으면 그리스도께서 당황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얼마나 부드럽게 위로하고 계신지를 보게 된다. 이 위로의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