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요한복음 15장 / 참 포도나무
요한복음 14장은 “일어나라. 여기서 떠나자”라는 말씀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다음에 오는 두 장이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 말씀하여졌던 사실을 암시한다. 아마도 포도나무와 가지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어떤 포도원이나 금으로 된 포도나무 장식이 있는 성전을 지나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 장은 비유(1-11절)와, 계명(12-17절), 그리고 경고(18-27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비유 (요 15:1-11)
연구를 시작함에 있어, 기억할 중요한 점은 어떤 비유에 있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특정 의미를 내포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한 비유는 중요한 한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네 다리 모두를 가지고 서게”하려는 것은 이단으로 나가는 첫 단계이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려는 주요한 진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의 중대성이다. 열매라는 말이 여섯 번 사용되며, 거한다는 말은 적어도 열다섯 번 사용된다(반드시 “거하다”라고 번역된 것은 아니다). 요점은 친교이지 양자 관계가 아니다.
6절을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지 못하면 구원을 잃고 지옥에서 불타게 될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비유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앞의 다른 구절의 명백한 가르침을 모순되게 한다(요 6:47/요 10:27-29 등).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6절에서 말씀하신 그 가지가 던져진 후 말랐다는 것을 주의하라. 만일 이 가지가 “구원을 잃은”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면 그는 먼저 “마르며”, 열매 맺기를 실패하고, 그리고는 던져져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말씀 안에 사는 것과 기도하는 것(7절), 그리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10절)과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활을 깨끗이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3-4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데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은 쓸모없는 가지처럼 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데에도 소용이 없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은 우리의 행위가 불로 시험받을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와 기회를 사용하는 데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은 은사와 기회를 잃을 것이다(눅 8:18).
포도나무 안에 있는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것과 그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함으로써 그의 생명은 우리를 통해서 흐르고 열매를 맺는다. 육적 그리스도인들이 “행함”을 산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영적 그리스도인만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가 많은 가지는 “깨끗케 되어” 더 많은 과실을 낸다는 것에 주의하라(2절의 “제해 버리다”는 3절의 “깨끗케 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말씀과 징계 등을 통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왜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통해서 지나가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과실을 맺는 데서 “더 맺는” 데로(2절), 그리고 “많은” 과실을 맺도록(8절) 나아감으로써 그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거하는 생활”의 증거들은 구주의 사랑을 의식하는 것(9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10절), 응답된 기도(7절), 그리고 즐거움(11절)이다.
2. 계명 (요 15:12-17)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열한 번째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믿는 자들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야만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제자의 표시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신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이다.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야만 한다. 친구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하며 각각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순종은 종으로서가 아니라 친구의 복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을 알고 그의 비밀에 참여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돔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셨다.
3. 경고 (요 15:18-27)
형제들의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세상의 미움에 대해 방향을 돌리신다. 세상은 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가?
세상이 먼저 그리스도를 미워했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이다(요일 3:13).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4:5/요 17:14).
세상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다(20절).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16:1-3).
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반대하는 모든 사회제도를 말하며, 적그리스도적인 사람들과 제도들과 철학들과 목적들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임금은 그리스도의 최고의 대적인 사탄 안에 있다(요 14:30).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배와 물에 대한 옛 예화는 아직도 훌륭하다. 배가 물에 있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물이 배안에 들어올 때에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롯처럼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다. 먼저 세상과 사귀고(약 4:4), 다음에는 세상을 사랑한다(요일 2:15-17).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일치한다(롬 12:2).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즐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세상적인 것이며 버려야만 한다. 세상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갈 6:14).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한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22-2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가 책임을 가져온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과 그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죄악됨을 계시하셨다. 인간은 변명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가지로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못박는 일에 함께 참여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증거이다.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69편 4절을 인용하신다(25절). 그 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하며 격려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시는데,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착한 행실들로써 이 일을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증거하시고, 그 후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증거한다(26-27절/ 행 1:8).
▣ 요약
우리는 이 장의 첫 부분(1-11절)에서 말씀이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12-17절에서는 믿는 자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다루며, 그 반면에 18-27절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우리와 구주와의 관계가 첫번째에 놓여 있음에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형제를 사랑할 것이며 세상의 미움을 능히 극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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