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요한복음12 - 요 12장(그리스도의 기름부음)

by JORC구원열차 2009. 7. 13.

12. 요한복음 12장 /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이 장은 풍성한 장이므로 우리는 단지 두드러진 요점들만을 다를 뿐이다. 요한은 십자가에 앞서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에 있어서의 마지막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1. 그리스도와 그 외 친구들 (요 12:1-11)

 

유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베다니의 잔치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마가복음 14장 3절은 분명히 예수께서 치료하신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의 일임을 말하고 있다.

 

마르다는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의 식사 때와 같이 화를 내거나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눅 10:38-42). 과거에 그녀는 그리스도와 나사로, 마리아와 자신의 4명 분을 준비했었으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열두제자, 나사로, 마리아, 시몬과 자신을 위해 17명 분의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불평이 없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활을 조정하시도록 내어맡기는 비결을 배웠다.

 

11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마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며, 마리아는 예배를 상징하고, 나사로는 우리의 행함과 증거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보통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될 수도 있다. 마리아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부어드리기 위해서 비축하여 두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죽기 전에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녀는 이 향유를 오라비가 죽었을 때에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의 것을 아껴 두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보일 때에는 항상 비난의 소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유다의 마음이 바르지 못했으므로 그의 입술은 잘못된 것을 말하였다. 우리의 변호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마리아를 변호하시는지를 보라(요일 2:1).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 스가랴 3장에서도 역시 우리는 사단이 여호수아를 비방하나 주님께서 그를 옹호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모범은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그리고 비판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기울여서 드렸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예배로 인하여 그녀를 높이셨으며(막 14:7)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옹호하셨다.

 

분명히 유다는 자기 소유의 집을 사려고 금고에서 돈을 훔쳐왔을 것이다. 사도행전 1장 18절의 “밭”은 “소유지, 농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유다가 되돌려 준 은 30전으로 제사장들이 매입한 공동묘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유다는 은거하려고 하였다. 그는 세상을 얻고, 자기의 영혼을 잃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들 (요 12:12-36)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동방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왔었는데, 이제 그가 죽으실 때에도 이방인들이 다시 온다. 이 시점에서 요한이 이방인들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그 왕이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거절당하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마 12:38)고 말했으나, 이방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보리라!”고 말한다.

 

빌립은 헬라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빌립에게로 왔다. 그리고 빌립은 역시 헬라 이름을 가진 안드레에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갔다(요한복음에서 안드레가 나올 때마다 예수께로 누군가를 데려가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영혼구원자의 실례이다/ 1:40-42/6:8-9/12:22).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들리울 것”을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10장 5절과 15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피하라고 가르치셨으나, 이제 이방인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열매 맺을 수 있기 전에 죽어야만 하는 밀알이시며, 세상에 구원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로 이끌어지기 전에 들려져야만 했다. 여기서의 모든 사람이란 “예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종적인 차별이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2장 5절에서 처음 언급하셨던 “때”에 대해 다시 말씀하시며(23, 27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였으나, 그리스도는 그의 영광의 때라고 부르셨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나” 초대하셨음을 주목하자(26절). 배경이란 십자가 아래서 동일하다. 여기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로마인이나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

 

3. 그리스도와 유대인 (요 12:37-50)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역의 마지막 말씀들은 구원의 기회를 지나게 하는 데에 대한 두려운 경고이다(35-3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그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숨으신 이유와 유대인들을 정죄하신 까닭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증거를 거절하였다(37절). 빛이 수 년간 비춰왔으나, 그들은 그 빛을 믿고 따르기를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해서 거절하는 데 대한 두려운 결과들을 눈여겨보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37절).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39절). 이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일축해 버렸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믿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40절).

 

이사야 53장 1절은 이들의 불신앙을 예언하였으며, 이사야 6장 10절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함을 말하였다. 요한복음 12장 40절은 이사야 6장 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시며 마음을 굳게 하심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이 구절은 성경에서 일곱 번 발견되는데, 그 때마다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사 6:10/마 13:14/막 4:12/눅 8:10/요 12:40/행 28:26 /롬 11:8).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영적인 기회들을 경시할 수 없다는 반복적인 경고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주를 찾을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우리는 앞에서 빛과 어두움 간의 갈등에 대해 주목했었다. 빛은 구원과 거룩함, 생명을 상징하며, 어두움은 정죄와 죄, 죽음을 상징한다.

 

요한은 어두움의 네 가지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① 심령의 어두움(1:5-8/1:26)-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사단으로 인해 소경이 되었으며(고후 4:3-6),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한다.

 

② 도덕적 어두움(3:18-21)-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를 사랑하고 빛을 미워한다.

 

③ 판단력의 어두움(12:35-36)-

빛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서 숨기신다.

 

④ 영원한 어두움(12:46)-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42-50절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빛을 거절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절하는데(42-43절),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해서, 목록의 서두에 “두려워함”을 기록하고 있다. 48절에서 그리스도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정죄로 인도함을 진술하신다. 구원은 말씀을 통해 오며(요 5:25), 심판 때에 바로 그 말씀이 오늘 거절한 사람들의 앞에 펼쳐질 것이다(48절/ 계20:12).

 

이 장은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을 기록함으로 끝맺는다. 이것은 엄숙한 장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기회를 경솔히 여기지 말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빛은 항상 비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어느 날 그의 구원이나 그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실 것이다. 잠언 1장 20-33절은 이 점에 대해 읽는 데에 유익한 구절이다.

 

▣ 12장 32절에 대한 설명

 

“들려진다”는 것은 “영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의미이다(33절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끌어 내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의미로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높이 들도록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고 있으며, 어느 목회자도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치 않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