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요한복음 18장 / 그리스도의 고통과 재판
예수께서는 그의 대적들을 만나기 위해 기도의 장소를 떠나신다. “기드론 시내”는 가족의 반역으로 보좌에서 추방되던 다윗 왕을 상기시킨다(삼하 15장 참조). 이 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체포 (요 18:1-14)
예수께서는 자의적으로 유다와 그의 무리들을 만나셨다. 이는 주님께서 바야흐로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지를 아셨기 때문이다(13:1-3/6:6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므로, 항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다). 동산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란 흥미로운 일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적을 만나 승리하셨으나(고전 15:45), 첫번째 아담은 적을 만나 패배하였다. 아담은 자기를 감추었으나,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나타내셨다. 이 두 정원의 장면을 생각하며 다른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유다는 원수들과 함께 서 있었다. “사도들이 다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행 4:23). 사람은 항상 그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유다는 그의 마음 속에 사단이 있었으므로 사단의 군중과 함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베드로 역시 이같은 무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내로라” /I Am)을 사용하여 그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것을 보라. 믿는 자를 구원하는(17:6) 그 이름이 또한 잃어버린 자를 정죄한다.
8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떠나라고 경고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미 제자들에게 그들이 흩어지리라고 말씀하셨으나(16:32) 베드로는 남아서 싸우기를 좋아했고, 그로 인하여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의 죄는 그가 멀리서 따라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따랐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어야 했다.
9절은 17장 12절로 되돌아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언급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육체적인 보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두 가지 면에서 지키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 가운데 보존하시며, 우리의 몸을 그의 영으로 인쳐서 구속의 날까지 지키신다.
검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께 불순종했다. 그리스도께는 우리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사단과 싸울 때 사용할 무기도 육체가 아니라 영이다(고후 10:4-6/엡 6:1-). 그는 잘못된 무기를 사용했고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순서로 행하여 결국 잘못된 결과를 빚어내었다. 말고를 치료하시고 베드로를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그렇지 않았다면 갈보리산 위에는 다른 십자가가 섰을 것이며, 베드로는 그의 때가 이르기 전에 십자가에 못박혔을 것이다.
2. 부인 (요 18:15-27)
이제 집중 조명의 촛점이 베드로에게 맞춰지며, 우리는 그의 슬픈 퇴보를 보게 된다. 다락방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참되게 남아 있겠다고 세 번이나 장담했다(마 26:33/마 26:35/요 13:37). 동산에서 그는 기도해야 할 그 때에 세 번이나 잠에 빠져들었고, 그 후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해야 했다.
다락방에서 그는 마귀의 그물에 걸려들었고(눅 22:31-34), 동산에서는 육체의 연약함에 굴복하였으며, 이제 제사장의 뜰에서는 세상의 압력에 항복하였다. 깨어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는 15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에 동의해야 한다. 그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일 수 있다. 종종 “다른 제자”로 불리워졌던(20:3)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행 4:1-3 참조).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그는 베드로를 위해 그 문을 열어 줌으로써 그를 죄로 인도하였다. 무지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불순종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18절은 “그 때가 추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불가에 앉았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44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밤에 기도하실 때에 땀을 흘렸다고 말해 준다.
베드로는 영육간에 다 추웠고, 적의 불 곁에서 그를 따뜻하게 해야만 했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아 죄인의 길에 서 있었고,” 이제 곧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것”이었다(시 1:1 참조).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자신을 따뜻하게 할 뿐 그리스도의 고통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였다.
3. 거절 (요 18:28-40)
제사장들을 조정하는 두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유대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성전 상거래의 공동경영자이며, 성전을 두 번 깨끗케 했던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소위 “영적 지도자”로 불리우는 어떤 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품화시키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재판에 대한 불법적인 면들은 많이 기록되어져 왔다. 그 회의는 밤에 개최되어 죄수는 유죄로 기소되었고,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였으며, 묶여 있는 동안 잘못된 대우를 받도록 허용하였으며, 어떠한 변호도 승락하지 않았다. 은밀한 한밤중의 재판이 있은 후에, 교활한 유대인들은 최종적인 사형 언도를 위해 그를 빌라도에게로 데려갔다. 그들은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이방인의 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정죄하였다. 그리스도 없는 종교는 이러하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며 약대는 삼키는 것이다.
33절로부터 19장 15절까지, 우리는 빌라도의 비겁한 우유부단함을 보게 된다. 적어도 일곱 번씩이나 빌라도는 홀에서 유대인들이 있는 밖으로 들락거리며 타협하려 하였다. 빌라도는 겁쟁이였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지옥에 있게 되는가!
그리스도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국의 영적인 성격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러나 지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데에 유의하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그의 나라를 세우셨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의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는 영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 그는 이 땅 위에 그의 문자 그대로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은 수 세기 동안의 철학자들이 묻던 것이다.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리라”고 하셨고,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말씀하셨으며, 요한일서 5장 7절은 “성령은 진리니라”고 진술한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세상은 영적인 일에 이르면 늘 잘못된 선택을 해 왔다. 사람들은 생명의 왕보다는 살인자를, 법을 주신 분보다 법을 어기는 자를 더 좋아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참 메시야를 거절하였으나, 어느 날 사단의 거짓 메시야인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다(5:43). 사람들은 다른 이유들로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유다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빌라도는 세상에 귀를 기울였으며, 헤롯은 육체의 요구를 경청하였다.
빌라도는 “너희에게... 전례가 있으니”라고 말하였는데(39절),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종교적인 관습을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늘날에조차 사람들은 이와 같아서 종교적인 축일이나 관습을 지키는 데는 주의하면서도, 세상의 구세주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구원의 이정표 > 핵심성경연구-신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20 - 요 20장(그리스도의 부활) (0) | 2009.07.13 |
---|---|
요한복음19 - 요 19장(십자가에서의 충성) (0) | 2009.07.13 |
요한복음17 - 요 17장(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 (0) | 2009.07.13 |
요한복음16 - 요 16장(보혜사) (0) | 2009.07.13 |
요한복음15 - 요 15장(참 포도나무) (0) | 2009.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