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린도전서 9장 /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
앞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지적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리낌이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펼쳤다. 본 장에서 그는 자신을 본보기로 들어서, 특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위하여 이 특권들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가 여전히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복음에 방해가 된다면 그런 특권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1. 특권이 있음을 주장하는 바울 (고전 9:1-14)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교회에서 지원을 받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하였으며, 결혼의 특권마저도 기꺼이 제쳐 두었다. 바울은 이러한 권리들을, 그리고 다른 권리들을 주장할 수 있음을 다섯 가지 증거를 들어 입증한다.
1) 다른 사도들과 일꾼들(1-6절)-
바울이 그의 사도권(Apostleship)을 언급하는 데에 있어 불확실한 어구들이란 없다. 그는 주님을 보았고(행 1:21-22)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고린도에서의 그의 사역은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를 포함하여 다른 사도들은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이곳 저곳에서 사역할 때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다른 종들이 이런 특권들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에게도 이러한 특권이 있는 것이다!(베드로가 결혼하여 여행할 때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에 유의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독신주의를 이상으로 삼는 로마 가톨릭에서 그를 “초대 교황”이라고 말하기에는 모순이 되는 증거가 아닌가!)
2) 인간의 관습(7절)-
군인은 스스로 쓸 것을 공급하지 않고, 그가 수호하고 있는 나라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삯을 받는다.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농부는 그 열매를 먹을 특권이 있으며, 목자는 양떼에게서 젖과 고기를 얻을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지교회에게 목회자를 지원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일인가?
11절은 근본적인 원리를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것으로 축복을 받았으면 물질적인(육신적인) 것을 나눔으로 우리의 감사를 표시해야만 할 것이다(갈 6:6-8). 여기에 목회자에 대한 세 가지 모습이 나와 있음을 유의하는 일은 흥미있다(교회를 보호하며 사단과 싸우는 군사, 영적인 밭이나 포도원을 손질하며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고 먹이는 목자).
3) 구약의 율법(8-11절)-
바울은 신명기 25장 4절을 인용하는데, 구약 시대의 관례상, 황소로 하여금 곡식단 위를 걷게 하여 알곡을 왕겨에서 분리시키는 일을 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은 11절에 나오는 원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 율법을 사용한다(딤전 5:18 참조). 황소가 육신의 일을 하여 유익을 얻을진대, 사도가 영적인 일을 하고서 그 유익을 얻지 말아야 하는가? 쟁기질하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은 둘 다 추수 때의 몫을 기대하는 소망을 가지고 일한다.
4) 구약의 제사장들(12-14절)-
율법은 제사장들이 제단에 드려진 제물로부터 풍부하게 몫을 차지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제사장은 번제에서 가죽을 취하였고, 속건죄와 속죄제에서는 기름을 제외한 고기 전체를 취했으며, 소제의 대부분과, 화목제에서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취하였다. 여기 첨부하여 첫번째 소산물들과 십일조, 그리고 특별한 제물들을 받았다.
사실상,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너무 적게 받는 반면 제사장들이 너무 많이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불평하였다.
5) 그리스도의 명령(14절)-
마태복음 10장 10절과 누가복음 10장 7절을 읽어 보라. 바울이 개인적으로 이러한 특권들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특권들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수고하는 자는 그 급료를 받기에 족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2. 특권을 희생한 바울 (고전 9:15-27)
바울은 이런 모든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을 사용하지 않았는데(12, 15절) 왜 그랬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들을 설명한다.
1)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거저 주고자 하였다(15-18절)-
그는 거저 주시는 은혜와 값없는 복음을 영화롭게 하였다! 어떤 작가가 쓴 대로 실상 “바울의 급료는 급료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이 특권을 즐겼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책임을 축복이기보다는 짐으로 보게 될 때 이는 얼마나 비극인가! 바울은 “만일 내가 기꺼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지기직분(나누어 줌)을 맡기셨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여기 실천적인 원리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저 제공되는 구원을 손상시키는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 헌금하는데 30분이나 걸리고 더 내지 않는다고 군중을 꾸짖는 “복음 집회”에 참석한 불신자들이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지 않는가!
2) 바울은 독립적으로 일하기를 원하였다(19절)-
돈으로 인해서 메시지의 음이 약화되는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한둘이 아니다. “아주 많이 바치는 사람”을 감히 거스릴 수가 없는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교파의 지원이나 보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바울은 다른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원하였다.
3)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였다(19-23절)-
비록 바울이 목회자로서 자유를 즐겼지만, 기꺼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 말은 바울이 세상의 격언, 즉 “로마에서는 로마 사람처럼 행하라”는 말을 따랐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때문에 타협한 것이 된다. 바울의 태도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가 자기의 표준을 낮추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개인적인 특권을 제쳐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동정심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므로, 이 점을 유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로 사용하였으며,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데 편리하도록 사용하였다. 그는 연약한 자들을 동정하였으며 격려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된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분별없이 날뛰는 “옹기 그릇점에 들어간 황소”는 아니었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접근법을 사용하는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재치있게 접촉하였으며, 잃어버린 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희생하였다.
4) 바울은 영원한 상을 얻고자 하였다(24-27절)-
만일 우리가 영원한 상을 잃게 된다면 일상적인 특권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가치관”에 입각해서 자기의 삶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자기의 특권을 제쳐 두었다는 말은 훈련을 뜻하며, 그는 이 훈련에 대하여 24-27절에서 설명한다. 그는 헬라의 경기를 예로 들었는데 그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고린도 지협의 경기(Isthmian Games, 올림픽과 유사한 고대 그리이스의 4대 경기회의 하나임)가 그 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각 경쟁자들은 자기의 몸을 훈련해야만 했으며, 상을 받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들도 제쳐 두어야 했다. 만일 운동 경기자들이 감람나무 잎으로 꾸며 만든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권리들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도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특권들을 제쳐 둘 수 있는 것이다. 지협 경기에서는 개최할 때마다 한 사람만 면류관을 얻을 수 있으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승인을 얻을 기회를 가진다.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구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봉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주하고 승리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경주한다(빌 3:12-16/히 12:1-3). “버림을 당한다”는 말은 “만족하게 여겨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10장 5절에서는 “기뻐함을 받지 못한다”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스스로를 경기자들을 투기장으로 부르는 전령으로 비유하는데, 아직 자신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것으로 비유한다. 바울은 자기의 구원을 잃을까봐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충성되고 희생적인 봉사에 관한 상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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