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고린도 후서11 - 고후 11장(어쩔 수 없이 하는 바울의 자랑)

JORC구원열차 2009. 7. 22. 00:31

11. 고린도후서 11장 / 어쩔 수 없이 하는 바울의 자랑

 

본 장에서는 바울이 “자랑”이라고 부르는 바를 제시한다. 본 장에는 약간의 “영적인 풍자”가 있다는 것과, 바울이 대적들의 고발 내용을 그들에게 되돌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너희의 새로운 선생들이 자랑하기를 무척 좋아하니 나도 그들의 정평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몇 가지 자랑을 하겠다” 말한다. 그는 이 일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은 아님을 시인한다(11:17). 그러나, 그의 “자랑”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견디어 온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세 가지 일에 대해 자랑한다.

 

1. 교회에 대한 그의 열성 (고후 11:1-6)

 

열성과 질투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질투는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것이지만, 열성은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복지를 추구한다. 남편이 그의 아내에 대해 열성을 내거나, 목회자가 그의 교회를 위해 열성을 내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2-33절에서 우주적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한 바와 같이 지교회를 신부로 비유하는데, 둘 다 사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아내(이미 하나님과 결혼하였으므로)로 비유되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아직 주님과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므로)라고 불리워진다. 바울의 소망은 교회를 순수하게 보존하며, 거짓 교리와 세상적인 삶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 거짓 신들을 따라가는 것이 신약에서는 간음으로 비유된다(약 4:1-4).

 

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인가? 사단의 거짓교사들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된다(3, 13-15절).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이 하와의 마음을 속였듯이, 사단의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의 마음을 속이며 진리로부터 그들을 멀리 이끌어 간다. “단순성”이란 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되게 머물러 있기 위해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오늘날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을, 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제시한다(갈 1장). 영적인 간음에 대한 유일한 방어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죽으신 데에 비하여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열성을 내야 하는가!

 

2. 교회에 대한 그의 관용 (고후 11:7-21)

 

“바울은 참된 사도일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봉사한 댓가로 돈을 받았을 것이다. 고린도에서 그가 돈을 거절한 것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그의 대적들은 말했다. 선한 사람의 관용이 비판을 당하고 그의 동기가 의심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바울은 그들의 물질적인 지원을 거절함으로써 죄를 지었다고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바울은 사역이 비난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충당했는데(고전 9장 참조), 그럼에도 그의 대적들은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의 지원을 거절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그는 빌립보 교회가 그에게 지원하는 일은 허락하였으나, 사도로서 그럴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인들로부터는 어떤 지원도 받지 않았다. 그는 원수들이 그를 비난할 기회들을 “근절시키고” 싶었던 것이다(12절).

 

처음으로 바울은 마귀의 종이 된 교사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사단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모방이다(마 13장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거짓교사들이 그들의 생활이나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사단에게서 왔음을 알 수 있다.

 

20절은 육신적인 사역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자유가 아니라 속박으로 인도해 가며 이기적으로 그들을 삼키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들을 높이며, 성도들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돕기는커녕 도리어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바울의 사역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들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단순한 사랑과 은혜 대신, 속박과 명예와 인간의 책략을 즐기는 육신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3. 교회를 위한 그의 고난 (고후 11:22-23)

 

사도로서의 바울의 사역을 보증하는 주된 신용장은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받은 상처들이었다(갈 6:17 참조).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이하에 나오는 사건들을 당하기 전에 이러한 일들을 썼으며, 사도행전에는 이 부분에 기록된 바와 같은 일들이 대부분 나오지 않고 있음을 명심하자. 만일 그가 복음을 변호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면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인간의 승인을 내세우지 않고 그가 받은 고난이야말로 사도로서의 가장 좋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특별한 학위나 상을 받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경향이 있으나, 바울은 그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표”를 지니고 있다. 시대가 이처럼 바뀌었다.

 

이러한 고난들에 대해서는 논평이 필요치 않다. 그것들 자체가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어느 곳이나 갔으며, 무슨 일이나 견디었는데, 이는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날에는 임무 수행을 훨씬 용이하게 만들며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을 훨씬 적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무거운 부담감은 “모든 교회를 돌보는 것”인 듯하다. 영적인 전쟁은 육체적인 것보다 언제나 값을 많이 치르는 법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도하고 어린 양들과 양떼를 먹이며 사단의 공격을 경계하는 일들은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을 무겁게 내려 누르는 부담이 큰 임무들이었다.

 

바울은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의 회심자들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동안 바울은 옥에 갇히고, 매맞고, 바다에 빠진 횟수를 계산하고 있다. “그들이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는 동안 나는 나의 미약함을 영광으로 삼겠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는 12장에 나오는 육체의 가시에 대한 이야기로 이끌어 간다.

 

그는 특히 재미있는 항목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곧 다메섹에서 도망친 일이다(행 9:23-25). 이 위대한 랍비가 바구니를 타고 성벽을 내려와야 하다니 얼마나 겸손했어야 하는가! 유대주의자들은 이처럼 자기를 낮추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메시지를 타협하고 버젓이 성문으로 걸어 나갔다. 바울은 사역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고난에 직면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은 박해를 당할 것이다.”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이같은 자세가 오늘날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마음에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에 대하여 열성을 다해야하며, 어떠한 사단의 거짓말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된 마을의 헌신에서 떠나도록 교회를 유혹하지 않을지 경계해야 한다.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마땅히 돌려야 할 사랑을 도적질하게 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요한계시록 2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에베소의 교회에게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경고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한 경건한 질투심(열성)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죄 가운데로 표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비이기적이고 관대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나는 얼마나 얻을 것인가?”의 태도가 아니라, “나는 얼마나 줄 수 있는가?”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