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갈라디아서 4장 / 신자의 아들 됨
바울은 구원이 율법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세가지 논점에 대해 계속 설명한다.
1. 경륜적인 논점 (갈 4:1-11)
성경을 주의깊게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대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루셨음을 시인할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진리”라고 말할 때, 이는 유대인을 위한 시대, 이방인을 위한 시대, 교회를 위한 시대 등 각 시대별로 짜여진 하나님의 계획과 연관된 말씀의 진리를 의미한다(고전 10:32).
이 부분에서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목적을 두고 특별히 다루셨음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이방인들에게는 결코 주지 않으셨다. 유대의 규율을 이방인들 또는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지 못한 일이다.
유대인들은 상속자들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들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수 세기가 지나야 했다. 바울은 계속해서, 교사가 돌보는 로마나 헬라의 어린이와 유대인을 비교한다. 어린이는 행운의 상속자일 것이지만 법적인 상속 연령이 되기까지는 그를 보살피는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 바로 그대로,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영적 유년기”에 있었다. 율법의 규례와 의식들은 그들이 온전한 유업을 받을 수 있도록 “졸업”할 수 있기 앞서 배워야 할 영적인 기초였다.
율법주의는 모세의 체제(세상의 초등학문-골 2:8/골 2:20)로 속박한다. 이 율법의 시대는 그리스도가 오실 준비를 함으로써 그 과정을 모두 마쳤다. 그리스도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으로(여인에게서-동정녀 탄생),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는 정확한 목적을 위하여 출생하셨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어 율법에 순종하셨으며,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들을 율법주의적인 굴레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만일 베드로가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제시했을 때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영접했다면(행 2-7장에서 다시 기회가 주어짐)이 민족은 성인의 단계로 들어갔을 것이며, 축복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에게로 넘쳐 흘러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약속들이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민족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거절하자,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개별적인 바탕에서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흥왕을 통하여 구원을 받지 않고 이스라엘의 패망을 통하여 받았다(롬 11:1-12 참조). 이제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양자가 된다. 곧, 하나님의 가족에서 성숙하고 성장한 자녀로서의 아들의 지위로서 이제 더 이상 가정교사의 안내를 받는 어린 아이들이 아닌 것이다. 신자들(특히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유업을 누리는 자녀들이지 종들이 아니다.
바울은 이제 그의 논점에 적용시킨다. “왜 다시 굴레 속으로 돌아가 재차 어린 아이가 되려고 하는가? 기초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온전한 유업을 누리라.” 세상은 성일을 지키는 등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젖먹이라고 말씀하신다.
2. 정서적인 논점 (갈 4:12-18)
“형제들아 내가... 되기를 구하노라!” 이것은 사랑에 찬 영적인 종들의 호소이며, 자기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보내는 관심깊은 아버지의 말이다. 바울은 “내가 처음으로 너희에게 전파했을 때 나는 너희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되었었는데, 이제는 너희가 나와 같이 되어 그리스도께 진실하라”고 쓰고 있다.
바울은 그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갔을 때 육신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천사와 같이 취급해 주더니 이제는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원수처럼 취급한다고 상기시킨다. “너희의 거짓 교사들이 너희를 향하여 사랑을 나타내었으나(열성적으로 영향을 끼침)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하다. 그들은 너희들을 영적인 전리품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어한다”(6:12-14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을 구세주께로 인도한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슬픈 일이다.
3. 풍자적인 논점 (갈 4:19-31)
“풍자”란 의미를 숨긴 채 사건이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들의 이야기를 사용하여(창 16:1-16/창 21:9-21) 은혜의 새 언약이 율법의 옛 언약을 대신하였음을 증거한다.
다음과 같이 대조할 수 있겠다.
율법의 옛언약 |
은혜의 새언약 |
여종 하갈로 상징됨 |
자유로운 여인 사라로 상징됨 |
이스마엘-육신을 따라 낳은 아들 |
이삭-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탄생한 아들 |
바울시대의 예루살렘-여전히 영적으로(또한 정치적으로) 속박을 받고 있음 |
하늘의 예루살렘-자유롭고 영광스러움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4:23). 따라서 자유하는 이의 자녀들이다(4:31).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마엘은 마치 율법이 그러하듯(3:19) “더해진” 육신의 아들이요 노예의 아들이었다.
율법의 옛 언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마엘처럼 더해진 것이며, 속박과 슬픔을 가져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버리는 것이었다.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 약속과 명령, 이들은 결코 한 집에서 살 수가 없다. 유대주의자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다시 가족으로 초대하기를 원하였다.
바울은 이사야 54장 1절을 언급하며 이를 교회에 적용한다. 사라가 잉태하지 못함으로써 아들을 보기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듯이,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다. 이사야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기쁨이 넘쳤던 일을 설명하고 있는데, 바울은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다 깊은 기쁨을 본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보았던 위험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다. 육은 촛불, 의식, 분위기, 옷 등과 같은 것으로 “영적인 흥분”을 좋아하며 갈망한다. 사람들은 사순절, 성 금요일, 부활주일, 성령강림절 등을 지킬 달력을 원한다. 이것은 이스마엘을 다시 가족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은혜와 율법의 혼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단순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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