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자가와 헌금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한쪽을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한쪽을 경시하게 되고 다른 한쪽을 사랑하면 먼젓번 쪽은 반드시 천대받는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주장이다(마태복음 6:24).그런데 주님께서 하나님의 라이벌로 재물을 거론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하나님 사랑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재물이라고 본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재물을 초월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마태복음 19:16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고 있다."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사람이 생각하는 선한 일이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새로이 생산해 내어가는 것일 줄 알고 있다.
예수님은 답변하시기를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니라"라 하시면서 무엇이 그 선을 가려왔던가를 청년에게 보여준다."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되어 있다.
이미 그 청년에 있어 근심의 이유, 돈이라는 기존의 주인을 버리라는 요구 때문이다. 이미 돈이라는 주인으로 경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하나님 쪽을 경시하고 싶었다.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해서 그분을 따라 나서야 될 만큼 영생이 돈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영생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돈 버리고 산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그 청년이 갖고 있는 선에 대한 인식은,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 도출된 선 개념임에 틀림없다. [선 있음] [선 없음]으로 상호 비교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선이란, 인간세계에서 억압되고 핍박받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 선이란, 돈에 의해 감추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돈을 주인으로 신봉하는 그때부터 참된 선을 학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선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즉 돈의 노예가 되어도 얼마든지 행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선에 대해서 알려달라는 것이다.
율법에서 도출될 수 있는 선이란, 완전히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행함으로도 나타나는 선이다. 즉 돈으로 미워하고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난 사람의 행위가 선이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고 예수님은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주제에 무슨 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을 학대하고 있으면서 그 순간에도 하나님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니 이 무슨 모순인가. 재물을 버림이 하나님 사랑의 소유를 측정하는 근거가 되듯이 헌금에 대한 율법의 요구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잘 폭로시키는 장치가 된다.
인간의 삶이 거칠게 된 것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난 후부터이다. 그때부터 땅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땅의 질에 따라 저주가 따라왔고(창세기 4:12). 밭 갈아도 효력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땅의 축복을 염원했다. 가인의 제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가인은, 아벨과는 달리 생명나무를 원한 게 아니라 이 현지 땅의 풍성을 기대하여 땅의 소산을 드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벨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과의 비교에서도 차이점이 드러난다. 아벨을 대신해서 태어난 셋, 그 셋의 후손은,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 주시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을 자기네들의 영원한 도성으로 삼고자 했다. 셋의 후손으로 태어난 노아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해서, 땅에 모든 족속이 죽임을 당하는 대 심판사건이 일어났다. 악이 관영 하는 땅은 항상 심판의 대상이다. 땅은 자체적으로 땅의 안식을 유지하려 한다. 땅이 죄악을 기피하는 것이다. 홍수 심판 이후, 땅은 은혜성을 품었다.
하지만 노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성에 무지한 자들에 의해 그 땅은 저주를 말하는 당이 된다. 땅이 계속 축복을 받으려면 그 위에 사는 자들이 축복 받을 만한 인간이 되어 있어야 한다.
축복이란, 창세기 1장의 상황, 즉 죄 짓기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도움으로 번성하고 팽창하고 확장되어서 그 영역을 충만하게 들어차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저주란, 소멸되고 팽창이 중단되어 대가 끊어져는 그 세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래 땅을 창조하실 때는, 땅이 고유의 소산물을 낼 수 있도록 하셨다. 만일 땅이 저주받으면 그 소산물은 끊어진다.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경우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의지에 부합될 경우이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평가를 받을 경우에만 생존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해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 때, 각종 동식물을 창조하고 복을 주었지만 온전한 안식에는 미흡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등장되는 인간이 복을 받아야 비로소 완성되고 땅은 충만의 모습을 갖춘다. 땅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뒤덮일 때,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쉼에 들어가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처음 창조하실 때의 대 원칙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축복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창조의 원칙 안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 원칙이 죄악된 세상 안에서는 '의인의 희생'이라는 차원으로 다가와서 동참을 요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족속을 축복하고자 하는 것도, 그 안에 '의인의 희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관심 두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가 표현해내고 담아내는 약속 때문이 그에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독생자를 번제로 하나님께 바친다. 하나님의 그의 행위를 축복하셨다."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하셨다(창세기 22:17).
뿐만 아니라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라고 덧붙였다.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축복의 민족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를 고를 때도, 신부의 오빠가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세기 24:60).
아브라함의 며느리 리브가는 특별한 운세를 가져야 한다. 축복을 가로막는 그 원수를 정복해야 될 임무를 부여받은 여인이다. 원수를 정복한 그 사건이 축복이 시작되는 시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의와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땅 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단독 계약 관계에 들어갔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는 아브라함 후손은 모두 다 아브라함이 지닌 의의 계승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야 4대만에 그곳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모든 거민 족속들을 징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브라함이 지닌 의가 악을 징벌할 수 있는 의로서 제 역할을 다하게 되는가? 이 의에 대한 본질을 설명해 주기 위해 하나님은 제물을 준비하라 한다. 아브라함이 준비한 그 제물 사이에 밤 중에 횃불 하나가 지나가신다. 제물을 반으로 쪼개어 놓은 것은 제물의 본질을 확연히 공개하겠다는 의사이시다.
밤중에 횃불이 그 가운데를 지나쳐 가는 것을 아브라함은 보게 되었다. 즉 애초부터 제물 속에 하나님이 들어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닌 의의 근거는, 하나님 본인이 계약 성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서 제공된다는 데서 발생된다. 즉 아브라함의 축복은, 아브라함 계통 인간들의 노력과 희생과 수고에 의해서 제공된 게 아니라 제물이 되신 하나님이, 약속이라는 관계를 맺어서 그들 속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 계약 정신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친히 주신 자식을 번제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 민족에 의한 이방 민족의 공격은 사실상 하나님에 의한 공격이라 볼 수 잇다. 축복과 저주의 기로는 아브라함과 그 민족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여하에 달려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방 민족들도 아브라함 민족에 대해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
만약 불신한다면 공격이 주어진다. 믿음이나 불신이냐 라는 대 원칙은, 기존의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입장에서 도입된 것이다. 하나님은 기존의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의로써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미 주어진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고 그 원천이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만이 축복의 방식이다.
인류가 범죄한 이 후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밖에 없다. 이방 민족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들은 온전한 의를 갖게 할 수 없다. 그들은 축복의 원천을 잘못 집고 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의 의가, 이런 희생의 방식으로 지상에 나타나게끔 한 원인 제공자에 해당된다. 우선 하나님과 접촉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먼저 발생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 한다.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아브라함 가문에서 끊어진다. 할례의 의의는 ,끊는데 있다. 인간의 혈통 그 자체를 단절하는 것이다.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죄에 대한 원천 봉쇄. 그래서 남자 생식기 끝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원수로 작용한 장본인을 인정하여 할례 받은 약속의 자식의 죽음에 약속 관계로 엮어 동참하겠다는 표기이다. 날 때부터 할례를 행한 자는 이삭이 최초이다. 이삭은 장차 제물이 되어야 될 약속의 자녀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연적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의의를 담기 위해서 특별히 태어난 자식이다.
그 특별한 약속의 자식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 정보가 담겨있다. 그 구원 정보는,'죄인을 대신하는 의인의 희생'이 들어있다. 이러한 약속이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를 바로 지적할 수 있다. 할례 받지 않는 자는 조상이 남겨준 죄 사슬을 그대로 지속시키는 자들이다. 가나안 땅의 축복의 근원에 어두운 이방 민족들은 약속으로 주는 복을 혜택 받을 대상이 못된다.
오직 '의인의 희생'을 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에게만 해당되어야 되는 축복의 땅이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의가 없기에 그들의 성문은 함락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약속을 보이는 땅이기에 말씀대로 살면 복이 오고, 반면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가 온다(신명기 28장).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장소이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땅이다(신명기 12:5,11). 그래서 땅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레위기 25:55). 땅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방 민족에서부터 하나님에게로. 이 땅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이는 고백을 제사의 형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드려야 한다.
이 땅의 축복이, 하나님이 주인 되심으로 인해 주어지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시한 규칙에 어긋나게 살면 그들은 쫓겨나가게 되고 그 사이에 땅은 여전히 안식을 유지할 것이다(레위기 26:33-35).
십일조는, 땅 소유자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데서 나온 신앙고백이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의 일은 하나님이 것이고 동시에 성물이 된다(레위기 27:30).
땅에서 곡식이 산출되었다는 것은 아직도 축복이 존속된다는 것이다. 만약 축복이 존속되지 아니하면 땅은 그 소산물을 내지 않고 파종도 헛되고 들짐승이 횡행하게 된다(레위기 14-22). 그런데 이 축복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온다는 고백을 바로 십분지 일을 드림으로 하라는 것이 율법이다.
그러니 십일조 낸 사람이 복 제공자가 되는 게 아니라, 십일조를 받는 편이 바로 복을 빌어주어야 축복이 가능하다. 십일조는 복의 계통을 세우기 위함이다. 십일조 해야 비로소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 속에 놓여 있는 자가 이 복의 출처를 인정하면서 그분에게 드리는 것이다. 소산의 십분 지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나머지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 사이에는 무엇으로 구분되나? 이 구분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십일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 사람에게 있어 재물은 일단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창세기 28:22).
하지만 하나님께로 왔기에 도로 모두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줄 때는 그냥 왔던 그대로 돌려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어야 될 필요성이 재물이어야 한다. 전부 가운데 하나님께 도로 드리는 부분이 있다. 이게 십일조이다.
나머지 십분지 9의 의의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십일조의 쓰임새가 어딘가를 알 필요가 있다. 십일조는 일단 레위인들의 생존을 위해서 주어진다. 레위인들이 생존될 수 있는 여건은 다른 지파들이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데 달려있다. 왜 다른 지파들은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이다. 땅 위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축복이 어디서 오는가를 제대로 고백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땅이 제 때에 소산물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지파에는만 땅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 가진 다른 지파에게 레위지파의 생존을 책임지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그 십일조는 동료인 레위지파에게 주는 것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단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손에 의해서 주어진 모든 산물이, 도로 하나님에게로 갈 때만이 레위지파에게 도달된다. 이는 레위지파가 너희들로 인해 사는게 아니라, 레위지파에 의해 너희들이 생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처사이다. 그들이 레위지파를 살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레위지파가 있음으로 해서 복의 소산물이 그들에게 제공되어 자신들이 생존하게 된다.10분지 9는 레위지파가 자기들에게 준 것이다.
그 10분지 9를 레위지파를 통해서 하나님께 받고 있다는 고백을, 거꾸로 10분지1을 레위지파에 주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체를 다른 말로 말하면, 땅 없는 자는 땅 가진 자로부터 땅을 공여 받았다는 말이다.
십일조의 쓰임새가 땅 없는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나 레위인들의 몫이 된다는 것은(신명기 26:12) 그들이 지상에서 약속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후견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심으로 그 관계가 보여주는 약속을, 이스라엘 내부에 계속 살아있게 한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 고아와 과부의 구원자로 여호와께서 계속 작용하고 계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이런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함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꼭 유지해야 될 약속은, 전에 출애굽 당시의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유월절 희생양으로 표현했었다.
하지만 가나안 입성 후에는 '땅 없는 자'로 표현되는 것이다. 땅의 축복에서 소외된 자들 속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은, 희생자로서의 하나님의 상을 그들 속에서 찾으라는 이야기이다. 어린 양의 희생 덕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은 한시라도 '의인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의인의 희생에 참여되기 위해 일방적으로 뽑혀 나온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다. 십일조가 그들에게 향한다는 것은, 십일조의 실체가 결국에는 희생물로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레위인들은 바로 날마다 이점을 제단 위에서 반복시킨다.
레위지파는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이며 맏형이다(민수기 3:12-13). 레위지파가 하는 일들이란 사실상 이스라엘 전체가 꼭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렇게 해서 온 이스라엘 전체가 정기적으로 희생에 동참하고 그 희생을 고백하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게 된다.
복은 어디서 오는가? 그들의 수고로운 노동에서 오는 게 아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기리는 제단에서 나온다(출애굽기 20:24). 십일조 받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살리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는 십일조 관계로 확인된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제사장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과 같은 취지이다. 한쪽은 희생된 자요 한쪽은 그 희생에 의해 덕을 본 자들이다.
10분지 1은 희생된 자의 몫이고 십분지 구는, 그 희생에 의해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은 자의 것이다. 그래서 십분의 일의 의미를 모르는 십분의 구의 소유는 복의 기조를 스스로 파기한 것과 같다. 십일조를 비롯한 구약의 헌금이란, 복의 방향을 고백하는 표현 방식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율법 정신 증발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큰 영향은 주위 민족들의 고유 종교들이다.
사사기 2:11-15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재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 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을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자기 후손들을 모아 놓고 절대로 다른 신들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여호수아 24:1-28).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라고 했다. 백성들도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선호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다른 종교와 제단을 무너뜨리는 적극성까지 요구되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일체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방 종교들을 주변에 깔아 두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기 위해서이다(사사기 2:22).
여호와에 대한 이해는 이방 종교와 접촉하는 것 가운데서 더욱더 분명해진다. 전에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밥이 되도록 붙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화 되고부터는 오히려 하나님은 이방 민족이 승리하도록 이스라엘을 그쪽에 붙이신다. 그것은, 승리와 구원과 복이 결코 이방 종교식으로 제공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방 종교는, 복이 자기네들의 자체적인 종교 의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사사기 17:5,13). 그러나 실제로 참된 복은 여호와의 언약에서 발생된다(사사기 6:19-24). 이 차이점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무지했다. 레위인들은 사적인 이방 종교의 노리개가 된다(사사기 18:19). 여호와의 언약이 이방 종교화로 변질되었다.
사사들의 구원 활동 뒤에는 항상 이스라엘 자체적인 죄가 더 큰 문젯거리로 등장한다. 여호와의 적이 이스라엘 자체임이 점차 드러난다. 급기야 한 레위인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의 죄악이 전 이스라엘에 알려진다(사사기 19:29).
그 죄를 징벌하려는 타 지파들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큰 패배를 맞이한다(사사기 20:17-28). 악을 징벌할 자격이 있는 지파는 그들 중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언약의 붕괴는 레위지파의 대표성의 붕괴로 이어진다(사무엘상 4:19-22).
백성은 레위지파에게 기대를 걸기보다는 사사와 왕을 원했다. 왕 체제가 구원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십일조가 왕 위주의 몫으로 돌아간다(사무엘상 8:15). 축복과 구원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장치로서 백성들은 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막대한 헌물과 재물이 왕 주위에 몰려든다.
특히 다윗의 등극 이 후에는 왕은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고, 백성은 왕 가문을 책임져야 했다. 왕이라는 한 사람의 처신에 의해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게 되면,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도 자연 왕 수하에 들어가게 된다(역대상 16:4-6; 23:2-6). 레위지파보다 더 우월한 복의 수여자로써 유다지파가 등장된다.
이것이 다윗언약이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유대 가문을 통해 가시화 되었다. 역대하 31장에서, 히스기야 왕은 십일조를 레위지파의 몫으로 돌려 그들을 생존케 하고 제사 제도를 활성화한다. 왕의 임무는 하나님을 뜻을 받들어 모세 율법을 완성시키는데 있었다. 따라서 제사가 법대로 지속되어야 되고 여기에 종사하는 레위인들에게 필요한 양식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십일조가 반드시 준수되어야 했다. 그러나 제도화된 율법 체제, 그 자체는 곧 율법의 완성이 아니었다. 왕들은 단순히 힘의 우위에서 주변의 나라들과 상대하려고 했다. 힘만이 이 나라를 지킬 것으로 여겼다.
이 정치적 안목은 하나님의 언약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상대 나라의 힘에 매료되어 성전의 본래의 의의를 차버리고 이방 민족의 그 성전을 그대로 모방해서 유대 나라에 심어 본다(열왕기하 16:10; 역대하 28:22-25).
형식에 의해 힘과 복이 발생된다는 발상은 이방화된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에 이스라엘과 유대의 열왕들은 줄줄이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여호와 종교가 형식화로 치닫는다. 여기에 대한 참 선지자들은 극렬하게 반대한다. 참된 선지자들은, 성전을 단순히 제사만 드리는 곳으로 보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제대로 다스리는 참 지혜의 원천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왕은 성전 제사에서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죄악을 발견해야 한다. 희생물이 되어 죽어 가는 제물들과 그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사는 약자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왕의 역할을 연관을 지울 줄 알아야 했다.
이 연관성을 가지고 참 선지자들은 과거의 언약을 근거로 해서 심판과 구원을 거론했던 것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이기 때문에(열왕기상 22:19-23; 예레미야 23:17-22). 항상 여호와의 적이 누구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우상 숭배란,언약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나라의 보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풍요와 안전과 축복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신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에 애굽을 떠날 때의 여호와의 사랑을 애당초 잃어버리고 사는 자들이다. 값을 주고서라도 사랑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마음속에 없었다(호세아 3:1-2).
이웃나라의 호사스러움과 연락과 화려함에 마음이 빼앗겨 어찌하든지 그것을 닮아가고자 그들의 종교 방식 속에 몸을 던졌다(이사야 2:6-11). 여호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제물을 드리고, 동시에 자기를 위한 제단도 마련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들,(호세아 13:2; 10:2) 이들이 우상 숭배자이며 여호와의 적이다.
여호와와 우상을 겸하여 모실 수 있다는 발상은, 스스로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생들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했다(이사 2:22).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자는 자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예레미야 17:5).
그리고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달려가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말과 병거의 많음을 자랑하고 의존하고 싶은 욕망 때문인데,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고 하시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한 번 손을 들면 그 모든 것이 엎드려져 멸망한다고 하셨다(이사야 31:1-3).
참된 이스라엘은 오직 참된 왕과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게 되는데 그 왕은 의로 통치하시는 분이다(이사야 32:1). 그리고 참된 종은, 자기 백성을 위해 제물이 되시는 분으로써 그의 찔림은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의 무리의 죄악을 인함이다.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복이 돌아가게 하신다(이사야 53:5).
선지자들은 이런 참된 종을 기대하면서 자기 시대의 타락상을 용서 없이 비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쉽게 우상과 친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의와 사랑과 무관하게 지상에 존재하려는데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은, 이 땅 위에서 계속 번성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을 원하신다.
이것이 복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계약을 맺은 취지는,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표출해 내어줄 사명을 지닌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민족이 만약에 축복의 땅에서 추방당한다면, 이는 축복과 무관한 여호와를 그 동안 열심히 신봉한 셈이 된다. 우상화된 여호와는 인간 자기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할 때와 흡사한 신의 모습이다.
마치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이기고 정복한 것처럼 여겨져서 더 우월한 신처럼 간주되는 그 우상의 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의 실체를 보게 된다. 금신상으로 변해있는 왕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짐승 그 자체였다.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이방 나라로 포로 잡히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시키기 위함이었다(다니엘 9:1-19). 황폐한 성전을 뒤로하고 남의 나라에서 고생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왕 되심을 다시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성전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이번에는 이방 나라의 왕이 마치 이스라엘의 메시야 같은 역할을 해서 다시 성전을 회복하도록 본토로 귀향시키신다(이사야 45:1/역대하 36:22-23). 귀향한 인사들은, 성전 고수만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다시 회생되는 것으로 알기에 모든 정치력을 다 동원하여 전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 제사에 관심을 쏟게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레위직에 대한 복권이다. 왕 중심 체제에서 제사장 중심체제로 전환시킨다. 이 제사장들이 율법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갖느냐 여부에 따라 언약 회복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장직이 안정을 취하기 위해 십일조가 일률적으로 징수되고 레위인들에게 생계를 보장한다.
느헤미야 10:37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이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확보된 성전 재정이라야 말로 성전 중심체제가 가능했던 바탕이다.
그들의 율법 시행은, 제사장의 우월성을 확보하는 것과 관련을 맺어간다. 제사장은 고위층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자체가 유다나라를 거룩한 나라, 의의 나라로 전환시키지 않는다. 단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책임져야 될 인물들만 양산해 낼뿐이다. 소위 하나님의 사자라는 제사장들부터 하나님을 멸시하기 시작한다(말라기 1:7).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통보해 버린다(말라기 1:10). 참된 레위 언약은 사람들을 죄악에서 돌이키기 위함이었는데 반해 제사장들은 그들부터 먼저 죄악의 길로 나서고 있다(말라기 2:4-9). 그 죄악이 결과가 무엇인가? 품꾼의 삯을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와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식으로 드러났다(말라기 3:5). 이들을 학대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를 경외치 않는 짓이다. 제사장이 불의하니 율법이 천시된다.
당연히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십일조가 성전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보고 도적질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곧 가난한 자의 몫으로 십일조가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유대 나라를 심판하기 위해(말라기 3:5) 만군의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하겠다고 하신다(말라기 3:18). 그래서 의로운 제물과 헌물을 드릴 수 있도록 레위인을 만들어 (말라기 3:3) 기어이 생명과 평강의 레위언약을(말라기 2:5) 회복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었다.
이처럼 예물과 제물과 헌물과 십일조의 본 취지는, 영생을 보장하는 약속이어야 한다. 생명과 평강을 제공하지 못하는 예물과 헌물과 십일조는 온전히 하나님의 율법이 못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셨다(마태복음 23:23).
십일조를 꼼꼼할 정도로 철저한 계산을 거쳐 하고 있는 바리새인보고 '화 있을진저'라고 하신 것은, 의와 인과 신이 빠진 율법은 율법을 완성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의와 인과 신이란,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말한다(누가복음 11:42).
그러면 십일조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담느냐 하는 게 관권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라 할지니라' 하셨기에 실제로 소득의 십분지 일을 계상하는 것도 중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십분지 이를 드린다든지 십분지 오를 드린 다는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꼭 하나님의 것이 반드시 제사장에게 드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십분지 이를 드리고 십분지 오를 십일조를 대신해서 드리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바라새인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준수하겠다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니 주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십일조의 참된 완성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것이 되는 십분지 일에다가 의와 신과 인을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십일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몫이 되는 나머지 십분지 구에서 더 빼내어 하나님의 것으로 십일조 하는 것은, 십일조가 아닐 뿐더러 십일조의 완성도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공의와 하나님 사랑은, 십일조를 십의 이조 십의 삼조로 양과 비율을 늘인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헌금의 양이 결코 공의와 하나님 사랑을 대체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게 아니다. 일점일획도 놓치지 않고 완성하려 오신 것이다(마태복음 5:17-20).여기에 대한 좋은 예가 마태복음 8:1-4에 나온다.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셨다 .그리고 나서 문둥병자가 해야 될 일을 첨가시켰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레위기 14:48-53에 보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자비로 저주가 풀려서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제사장에게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바치게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로부터 병 나은 이 문둥병자가 아무에게도 가지 않기를 우선 바랬다. 그리고 곧 바로 제사장에게 예물을 주기를 명령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리기 위함이요 또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인 것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제사장과 율법의 존재 의의는 이제 예수님에서부터 새로 해석해 내어야 한다.
율법은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갈라디아서 3:24). 십일조도 예외가 아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굴시켜 주셨다.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십일조는, 율법이 말한 본래의 십일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십일조를 하셨는가? 율법에 있어 예수님의 위치는 율법에 의미를 부여하는 분이라는데 있다.
예컨대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분이다(마태복음 17:24-27).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십일조를 내야 하는 분이 아니라 받아야 하실 분이다. 십일조를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므로써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고 계시는 것이다. 전 율법들이 향하여 가고 있는 그 최종 도달점, 그 지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요구하는 의를 보이면 된다. 그 의는 약속 성취를 말한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은, '의인의 희생'이었다.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성취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에서 이미 속성이 결정되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누가복음 4:1,14,18/12:10).
예수님의 죄 없음은, 죄짓지 않도록 성령께서 처음 하늘의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시험에서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15). 예수님은 율법 완성의 결과를 의의 산출이라고 보았다(마태복음 5:20). 이 의의 산출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의인이지만 죄인처럼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그 괴로움이 십자가상에서 울러 나왔다.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의인의 희생'이 아버지의 일관성이 있는 약속의 본질이다.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는데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과 공의는 완성이 되는 것이다(로마서 8:32).그 자리에 예수님이 화목 제물로 들어선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외친 말씀은 "다 이루었다!"이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다.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다. 생명과 평강의 계약(말라기 3:5)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다. 아버지께서 받고자 하는 의를 다 산출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이 십일조의 완성하고는 어떤 관련성이 있나?
이점은 히브리서 7장에 체계적으로 잘 등장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복이 어떤 경로로 아래까지 내려갈까? 복이란,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하여 빌어서 내려가게 되어 있다(7:7). 제일 큰 분은 하나님이시다(6:13).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꼭 복 주겠다고 맹세하신 그 맹세로 해서 아브라함은 복을 약속으로 받게 되었다(6:15).
아브라함에게 복을 준 자는 멜기세덱이다. 그는 땅 위에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장이다(7:1). 땅 위는 제사장이 되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온전할 같으면 아마 하늘의 제사장이 필요 없을 것이다(7:11). 땅 위의 제사장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레위지파들은 자기 보다 더 큰 자로부터 복을 받아야 될 입장에 있다.
그분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이 후손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레위지파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늘의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내었는데 이를 달리 말하자면 레위지파가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셈이 된다. 따라서 멜기세덱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는 말은, 레위 지파도 멜기세덱에게 복을 받았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꼭 레위지파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사실은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로부터 올 수도 있는 것이다(7:14-15). 십일조라는 것은, 바로 율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7:5) 복의 계통을 보여주는 법이다. 십일조가 복의 계통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봐서 명백하다(7:1,4).
십일조라는 것이 율법화 된 것은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이 나타났던 그 시절의 이야기였다. 복이 제사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부터는 율법 자체가 폐지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레위지파의 무능성이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즉 유다지파로부터 오셨기 때문이다(7:14-16).
그러니 레위 지파 중심 체제였던 율법이 이제는 아무 쓸모 없이 된 것이다(7:18).따라서 전에 율법에 속했던 (7:5) 십일조 제도를 주고받는 것 가운데 복 계통을 고백하던 것이 이제는 사라진 것이고 그 자리에 오직 예수님이, 복주겠다는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7:22).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을 알면 그 자체로서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율법은, 인간들이 무엇을 해야 하나를 소개하는 지침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율법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기쁜 뜻에 미흡함을 알리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의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의는 애초부터 인간 내부에서 들어있지도 않았다. 율법이 레위 지파 중심 체제를 보여주면서 그 동안 지내온 것은, 그 지파가 결국 무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예수님이 다른 지파를 통해서 오셨기에 그 자체가 레위 지파를 부정해 버리는 처사인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의와 신과 인을 겸비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 십일조가 아니라 소득의 몽땅 다 드린다 할지라도 십일조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이유는, 인간에게 애초부터 의와 신과 인이 없고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십일조 율법을 통해서 받고자 한 그 의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멜기세덱 반열이시기 때문이다. 멜기세덱 반열에 속한다는 말은, 하늘에 계신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이다(히브리서 7:20).이미 영원히 성취된 약속이 엄연히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또 하나님의 의를 이루겠다고 십일조 율법을 거론하는가?
그리스도가 못 다 이루었단 말인가? 예수님이 사역이 무슨 미흡함이 있었단 말인가? 예수님의 사역에 이의라도 걸겠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라는 말씀을 (히브리서 10:5) 수용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라는 대목을 정말 꼭 무시하고 넘어가야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에 말씀이 그렇게 불쾌한 말씀인가?
하나님의 분명한 맹세와 약속에 의하면 복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게 되어 있다(히브리서 7:14-20). 그런데 아직도 복이 십일조라는 율법을 통해서 온다고 믿고 있다면 예수님은 괜히 오신 것이다. 아니, 이 자체가 예수님 계시의 훼방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복의 영원한 원천인 예수님을 걷어 차버리고 그 자리에 십일조라는 무능한 율법 조항을 삽입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건설한 복음의 세계를 짓밟아 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발상이다.
복이란, 의가 있을 때는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으면(히브리서 10:10) 복이 오지 말라도 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뜻을 변치 않기 때문이다(히브리서 7:17).
너무나도 확실하고 명백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이다. 예물은 제사 의식에 동원되고 또 십일조와 함께 레위인들과 제사장을 먹여 살리는데 보탬이 되었다(역대하 31:10-12). 그러나 제사 폐지와 함께 예물도 그리고 레위지파의 고유성도 폐지되었다.
율법 전체의 폐지가 십일조 시대의 마감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제사가 요구되고 예물이 요구되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필요하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리가 없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사와 예물을 대신해서 오신 분이다. 아니, 더 나아가 모든 율법을 대신해서 완성체로서 오신 분이다.
신약 시대에 구약성경과 율법의 기재가 꼭 필요한 것은, 행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오셔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꼭 필요하다.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더욱더 알아서 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구약 성경은 너무나도 필수이다. 왜 우리 인간이 예수님만 붙들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구약 성경과 율법은 꼭 필요하다.
구약 성경과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 자기의 근원적 지울 수 없는 죄와 탐욕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한 가운데 율법 지켜 복 받으려는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주님을 죽어야만 했다. 따라서 율법의 존재 의의는, 복음을 종교로 착각해서 자신의 종교 행각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배도자를 확인하는 작업으로서 훌륭하게 작용된다.
로마서 10:4에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5:17에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되어 있다.'마침'이 된다는 것과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라는 말씀은 상호 빈틈없이 일치되는 말씀이다.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의를 이루는 수단으로 더 이상 소용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근거로써 사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구약성경과 율법이 필수적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기재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잘못과 오해, 배도와 실패 같은 것들이
오늘날 복음의 전하는 현장에서 계속 발생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라고 주신 법을 가지고, 정치술로 잘 다듬어 그것으로 인간이 왕이 된 권력체를 만든 것이 이스라엘 패망의 이유였다. 이런 내용들이 구약 성경에만 국한되는 사항이 아니다. 그 때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다같이 아담의 노선 위에서 흘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예물과 십일조에 대해서 해석하면서 그것을 자기네들 종교 집단의 재정적 확보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변질시켜 적용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문제는 교회의 머리가 누구며 누구에 의해서 교회가 유지되느냐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교회 머리가 인간이 될 경우에 어떤 경우라도 그 집단은 교회가 아니다. 다만 교회를 빙자한 인간교이다. 이러한 인간교는 지도력 있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의 행정력과 관리능력에 집단의 존폐가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조직의 존폐는 자금 동원이 얼마나 수월히 이루어지느냐로 가름될 수 있다.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힘이란, 곧 돈의 힘이다. 어느 조직도 돈 없이는 아무 사업도 시작 못한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금줄은 늘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사업의 기본 속성은,'이유 없는 성장' 오직 그것뿐이다.
성장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란, 멋진 상품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들어오게 되어 있다. 뭔가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 민중들이 호감을 살만한 상품을 계발하는 것은, 종교 사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민중들이 무엇을 원할까? 인간들의 욕구 가운데 종교사업체가 담당해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품은 뭐 없을까?
인간교에 속한 종교사업체들은 시장조사에 나선다. 조사해 본 결과, 민중들은 두 가지를 원하고 있었다. 하나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과 살아서 축복 받는 것이었다. 인간교들은, 이들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그런 상품을 제공하되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사업체를 민중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심한다. 즉 개인 회사보다는 주식회사 쪽이 큰 사업에 유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큰 사업이란 항상 더 큰 자금이 동원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종교사업체를 구원의 기관으로 선택한 회원들에게 나의 사업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서 마음 놓고 투자하게 하는 것이다. 즉 나의 종교사업체를 정한 것을 마치 내 집 마련한 것과 똑같은 기쁨을 안겨 주자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민중들이 원하는 종교와 내세에 대한 욕구를 어떤 식으로 상품화 시켜주는가?
여기에 몇 가지 필연적인 절차가 세워진다. 다름 아닌 민중들이 이미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 복받는 비결과 천국 가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구절로 적당하게 옹호해 주는 수법이다.
민중들은 다음 두 가지 신학을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다. 하나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즉 무한한 정성을 기울이면 하늘님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신앙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도 뭔가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그 댓가를 몇 배로 갚아 준다는 사고방식이다.
완전히 바알과 아세 종교의 연속이다. 바로 이러한 민중신앙은, 신의 중매자로 보이는 거룩한(?) 인물을 통해서 확인받으려고 한다. 이 인물들이 바로 성직에 종사하는 자들이기를 바란다. 목사라는 직업 자체가 이미 민중들로 부터 권위를 부여받고 시작을 하는 셈이다.
민중들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복의 개념은, 재물이 늘어나고 부자 되고 자식이 출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 사업가들은 성경 속에 들어 있는 귀절 중에서 그런 것과 유사해 보이는 경우를 열거하여 민중들에게 욕심을 선으로 전환시켜 주는 것이다. 복을 받는 방법도 이미 민중들은 나름대로 정리되어 있겠다, 하등 어려울 것이 없다.
단지 그들의 마음을 맞춰 주기 위해 종교계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성공사례담, 복받은 사례집, 교회 일 열심히 하여 사회에서 출세한 경우들, 기적적으로 병고침 받은 간증들, 이런 것들을 많이 확보해서 저들 민중들에게 유포시킴으로 말미암아 현재 민중들이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신학과 교리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라고 확인만 해주면 매사가 원활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믿어 천당 가고,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해서 복 받자!"라는 구호 속에 인간교의 모든 실태를 잘 담을 수 있다. 인간교는, 인간들이 쇼하는 영역이다. 탐욕이 춤추는 곳이요 오직 인간의 성공을 자축하는 곳이다. 민중과 대중의 종교가 교회라는 껍데기를 꼭 걸쳐야 하는 이유는, 신의 이름이 체계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이,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밖으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신의 활동이 가시화되고 통계에 근거한 목표 설정이나 자료 처리까지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과 공의가 수치로 환산될 수 있다는 데서 사업 기질과 신의 만남이 수월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사업가로 연상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 환상을 최대한으로 확장시켜 놓은 결과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상에 대해, 사탄이 격동할 때나 발생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역대하 21:1-3에 보면,"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요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다윗의 사업성 안목으로 볼 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던 수하의 수많은 백성들이, 사흘의 온역으로 추풍낙엽처럼 죽어나간다. 무려 7만명이 죽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회개의 제단을 쌓으니 온역이 그쳤다. 다윗이 드린 제단,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자인가를 인식한 자만이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종교사업이나 벌리시는 분으로 통하게 된다. 그래서 그 종교사업에 돈 대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에게 돈을 대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착한(?) 교인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축복이란, 자기가 추진하는 사업의 번창을 두고 말한다.
비단 이런 종교 사업가 뿐 아니라 민중들도 각자 자기 일이 있을 수 있고 바로 거기에 동원되는 하나님의 상이란, 자기가 벌려놓은 사업을 열심히 도와주시는 사업가적인 하나님이다. 민중들의 이러한 안일한 종교생활에서 나오는 축복관이란 너무나도 뻔한 것이다. 자기 사업 번창을 배제한 축복관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 모든 축복의 중심은 자아 중심이다.
이런 축복관을 핵심 상품으로 한 종교 사업은 하나님의 일과 무관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다. 민중들은 예수님을 사랑할 줄 모른다. 단지 자기 자신과 가족과 자기 주변 환경만을 사랑할 줄 안다. 그리고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기 왕국을 구축하려고 일생을 바친다.
이런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법이라든지, 계시, 복음을 전달해도 늘 그것을 가지고 자기 왕국 팽창에 이용하려 든다. 애초부터 진노의 자식이고 악마에 매인 자들이고(에베소서 2:1-2/고린도후서 4:3-4/히브리서 2:14-15) 하나님의 적이다(로마서 5:10).
하나님의 적이기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무슨 짓을 해도 다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행위를 보인다. 기도 행위가 기도를 방해하고, 금식 행위가 금식을 방해하고(이사야 58:1-9), 전도 행위가 참 전도를 막는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십일조와 헌금 행위가 복음을 망치는 짓이 되고 주일 성수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헛것으로 만든다.
교회 성장과 부흥이 참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케 하는 몸짓이다. 십자가 사건은 이런 풍토 안에서 외롭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상적인 종교 국가를 건설하여 가장 복 받고 유일하게 복 받는 민족이 되자는 그들 이스라엘 민중과 지도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하나님 백성이라 자처하는 그들에 의해서 왕이 죽었다. 왕은 부활하셔서 새로운 백성을 모집하신다. 왕 죽음의 동기를 제대로 아는 자들만 백성이 된다.
그 백성들에 의해서 거짓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체가 폭로된다. 그들은 민중들을 좋게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결성된 종교 결사 단체에 불과함이 드러나게 된다. 거기에 비해 참 교회는 사람을 좋게 하는 요소는 일체 없다(갈라디아서 1:10). 그러면 참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복이란 어떤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복된 분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으로서, 세상적인 복의 개념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적인 복의 굴레와 복의 노예로부터 구출되고 구원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을 탐한다. 복 없이는 못살겠다 한다. 그러나 정작 인생을 살리는 것은 세상 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말씀이다. 떡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것은 악마의 고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다(마태복음 4:4). 교회가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세상적인 복으로부터 탈출한 자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 축복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끌고 자들의 모임으로 화했기 때문이다.
복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더욱 더 복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교 집단으로 변한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떡 없이는 못살겠다는 심정을 털어놓고 넋두리하는 마당에서 무슨 교회가 될 수 있는가.세상의 재판이다.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복의 개념이란, 사람을 어떻게 근원적으로 살릴 수 있는가와 연관된다. 생명나무 곁을 떠나 버린 그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영생 그 자체이다. 요한복음 1:4-5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영생은 빛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어두움에 갇혀 있기에 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영생의 축복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1:16에 보니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되어 있다.
영생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어진다(1:17).그래서 구약의 복 내림은 중심을 갖고 있다. 중심 되는 그 인물됨에 관심을 가진다. 그 인물은 여타의 인간들과 다르다. 그 인물 속에서 은혜의 정체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 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해 주시려고 한다. 다시 생명나무 곁에 있어도 될만한 존재로 새 창조 하시려 한다. 무죄 상태가 아니라 아예 적극적인 의인으로 삼으려고 하신다. 자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의 속에서 하나님이 사시려고 한다. 성도를 자신의 궁전으로 간주하시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을 타고 지상에 내려와서 선택한 인물의 벗으로써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하셨다. 하나님에 의해 약속을 점차 보이는 인물이라는 증거로 구약의 성도들은 복을 받았었다. 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들이 담아 보여야 할 미래의 인물상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새로운 속성 하나 하나가 장차 영생을 공급할 빛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나무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땅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했다. 그들의 땅에 좌우되는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땅이 생명을 보장하지 아니하면 그 어디에서도 해결할 길이 없게 되었다. 자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에서 영웅이 자연 우대되는 세상으로 변했다(창세기 6:4; 10:8-10).
'용사'라 혹은 '당대의 영걸'이라는 표현을 말해주듯이 영웅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 임한 것으로 여겼다. 바벨탑 자체가 니므릇의 고향에다 탑을 세운 것으로, 영웅 중심적 체제를 희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여호와께서 따로 선택한 사람이 등장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복의 근원으로 불렀다.
예상 외로 자꾸만 재산이 늘어나고 양과 가축이 번성했다(창세기 26:12-15/욥기 42:12). 하나님은 새로운 인물을 통해서 새로운 복을 보이신다. 그런데 이 선택된 자들의 복은 하나님의 약속과 결부된 복이었다. 인간의 의사 선택과 상관없이 약속의 취지를 보여주는 것과 연관있는 복이었다.
다윗시대 때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도착하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소유를 번창케 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역대상 13:14). 복이란, 인간의 행위와 관계있는 게 아니다. 이삭이 이점을 몰라서 자기 취향에 따라 에서에게 축복하려 했다.
약속의 따라는 축복의 핵심은, 인간은 결코 축복 받을 자격이 없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마땅한 존재라는 밝히는 목적이 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뵙고 이점을 알게 되었다(창세기 32:26-31).
하나님을 뵙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사사기 6:22-24). 이 사실을 기조 해서 국가 이스라엘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 국가가 복의 국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도 그들이 멸망되지 않는 유일한 국가라는 점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죽지 않는 것은(출애굽기 19:7-25), 하나님의 지시대로 복의 제단을 마련하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0:24). 복이란, 새 생명의 주입과 더불어 함께 따라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확산되고 존재되기를 원하는 것은 빛 되신 생명이다.
축복이란, 끝이 좋아야 한다. 결국 이 세상에서 영원히 충만한 그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일시적인 번성뿐인 것은 언젠간 멸망의 증거물로 전락된다. 끝까지 버티는 것은 말씀으로 주어지는 생명뿐이다. 육체는 풀의 꽃같이 쇠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이사야 40:8).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인간이 된 게 복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보면, 말씀에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되어 있다. 하박국 3:17-18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한다. 영원한 축복은, 일시적인 축복을 배타하고 저주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시적 축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 그것들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해 아래에서 새로움이란 없다. 그것은 땅과 함께 소멸된다. 보이는 것은 소망이 될 수 없다(로마서 8:24). 보이는 것은 순간이다(고린도후서 4:18).
에덴동산에 추방당한 인간에게의 축복은 오직 하나뿐이다. 다시 생명나무 곁으로 가는 것이다(요한계시록 22:2).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4:6; 11:26; 6:51). 결코 종교단체를 생명이라 하지 않았다. 다 미완성이며 보이는 것들이다.
예수님만이 생명이다. 이 생명은 은혜와 선물로 오기 때문에 돈으로 복을 받아낼 방법이 없다. 오직 받은 자 외에는 그 기쁨을 모르는 비밀스러운 것이다. 이 복은 종말이 되어서 발생되는 종말의 징조로서 제공된다. 따라서 복을 받아야 받은 것이다. 복 받은지 아니 받은 지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은 산에 올라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마태복음 5:11-12). 종말 시에 복 받은 자는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마태복음 25:34-40). 어떠한 경우를 당해서 예수님의 계시를 포기하지 않는 자가 복 있는 자이다(요한계시록 1:1-3).
예수님께서 그 자체가 약속된 복의 완성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누가복음 1:42) 예수님 이외는 그 어떤 것도 복이 아닌 것으로 들통 나고 말았다. 말씀의 완성이 아니 것은 단지 소멸과 멸망의 대상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재물에 마음을 둔다는 것, 부하려 하려는 것, 그 자체가 악의 뿌리이다(디모데전서 6:9-10).
말세에 재물을 쌓은 자에게 저주가 떨어진다. 그들이 모은 재물은 녹이 쓰며들게 되며 그들은 통곡하게 될 것이다(야고보서 5:1-6). 연보란, 오직 예수님만이 복의 완성인 것을 보이는 은사이다. 돈을 초월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연보를 하면서도 주님의 계시만이 전달되기를 바라야 한다.
주님의 계시는 한마디로 말해서,하늘에서 이미 완성한 채 주어진 사랑이다. 이 사랑을 아는 자는 형제를 위해서 죽는 것도 마땅하다(요한 일서 3:16). 연보는 이웃사랑의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기에 성도가 자발적으로 정해서 내어져야 하지 외부의 그 어떤 압력도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고린도후서 9:7-8).
일률적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성도가 마음 놓고 주님과 의논해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느끼는 은혜의 폭만큼 해야 한다. 만약 남의 흉내 내어 획일적으로 비율을 정해버리면 그 연보는 주님의 관계에서 나온 연보가 아니라 위신까지 계산해서 나온 연보이기에 주님의 계시와 복음을 막는 훼방자이다.
또 타인의 눈치를 보며 하는 연보는, 주님을 사람보다 더 비중이 못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또 남의 연보 금액과 비율에 간섭하려드는 자는, 교회 보존과 운영이 마치 자기 행정력에서 좌우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며 주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자이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자는, 하나님의 일이 마치 돈 쓰는 사업으로 여기는 자이다. 돈 없이도 하나님의 나라 일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오히려 희생에 있음을 거부하는 자이다. 그리고 자기가 세운 조직에 미쳐 있는 자이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종교단체나, 돈에 관심 쏟는 것은 멸망의 앞잡이다. 돈의 노예 된 채 영생을 얻고자 한, 부자 청년. 이제 그 부자 청년들이 그들을 편하게 하자는 종교단체들을 결성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을 좋게 하는 민중교이며 인간교이다. 비록 지금도 가난해도 마음속에서 부자 청년을 목표로 꿈꾸는 수많은 민중들이 집결하면서 그 기업체는 대 호황(?)을 누린다.
돈에 노예가 된 상태에서 나오는 헌금 정신이 대체 무얼까? 그것은 십일조 하면 복 받고 감사 헌금하면 더 복 받는다고 여기는 우상 종교 교리의 극치이다. 왜냐하면 탐심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5/에베소서 5:5).
탐심이라는 우상으로부터 구출되지도 못하면서도 구원받은 흉내는 내면서 반대로 돈 복의 노예로 자진해서 기어 들어가는 자이다. 연보 하면 복 받는다는 주장은,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심보이며 그런 교회는 도박장으로 개설한 곳이다. 아마 연보 하지 않더라도 복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구원된 적이 없기에 기본적으로 복음을 적용 못시키고 있다.
진정 무엇이 복인가? 생명나무에서 사람을 쫓아낸 그 하나님과 만나도 저주 안 받고 영생 얻은 것이 참된 축복이 아닐까? 그런 축복이 연보나 헌금에서 온 것인가? 아니다. 오직 제3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생하시고 죽으신 열매이다. 그러니 정말 성도 같으면 온 몸을 드린다(로마서 15:16).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살려내기 위해 돈에 매달리는 짓은 안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살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구성원들이 스스로 단체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 운영 자금과 사업 자금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키워라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바치라고 세워진 것이다. 개인 성도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날마다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복이란, 이미 완성된 복이 되신 분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며, 연보란 이미 그 완성된 복을 누리고 있음을 사랑의 형식으로 내어놓는 것이다. 이것이 제물의 완성이다(빌립보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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