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양육 자료실/십자가를 아십니까?

1. 십자가와 예배

JORC구원열차 2009. 9. 23. 13:12

1. 십자가와 예배

 

예배란, 우선적으로 집단화된 단체가 존재해야 가능하다. 예배하는 집단이 어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예로부터 인간들의 자연 심이었다. 신에 대한 경배 행위 속에서 마음에 위안을 얻고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예배를 한차례 실시하고 나면, 무엇엔가에 의해서 꽁꽁 결박된 마음이 비로소 매임에서 벗어나 창공을 훨 훨 날아다니는 새가 된 기분이다.

 

신이 주는 재앙과 벌칙이 해결되고 나면 신은 그때부터 나를 돌보아주는 분이 되고 나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주고 수호하는 전능자가 된다. 이 든든함! 이 든든함을 위해 사람들은 신께 경배하는 수단과 방법과 예배 처소를 찾게 된다.

 

교회가 지상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인간들의 욕망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교회 본래의 사명과 위상은 망각한 채, 인간들의 재앙 해소를 위해 충실히 봉사해주는 종교 서비스 단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정신 상태에서 교회를 염두에 되면 다음과 같은 엉뚱한 교회론이 튀어나와 유행하게 된다. 즉 "모든 교회는 예수님이 세웠다!" 라는 교회론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마태복음 16:18을 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친히 세운 단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교회는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교회만은 사수해야 한다 라는 정신이 이 구호 안에 담겨있다.

 

그러니 방금 언급한 성경 내용과 사실상 어긋나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따로 존재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내용의 교회이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 사수해야 비로소 사수되는 종교단체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조직은 주님의 능력과 관련 없는 사설 단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고 있다.

 

교회가 없어지고 사라지고 점점 왜소화되면 어쩌나하고. 그러니 자기가 세운 종교단체를 오래 존속시켜서 마치 주님이 친히 세운 교회 인양 보이기 위해 힘을 구축하고 열심과 각가지 정성을 그 조직체에다 쏟아 붓는다. 음부의 권세는 오직 주님만이 능가할 수 있다.인간은 못한다.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될 같으면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야 했겠는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분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 만약 그리스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음부의 권세를 이긴 자가 있다면 그 인간이 메시야가 될 것이다.

 

그런 자가 없기 때문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지상에서 인간들이 세운 교회가 소멸되기를 바란다. 그 인간들이 자의로 세운 교회가 바로 참된 교회를 공격하는 음부의 증거물이 된다. 음부의 권세라는 것을 자신 있게 설명할 분은 실제로 음부의 권세를 이긴 분에 한한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죽음에서 실제로 부활하셨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봐서 죽음을 이겼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사망의 권세를 장악한 마귀를 억압해서, 죽는 것이 무서워 그 악마에게 좋든 싫든 매인 자기 백성을 풀어주기 위해서이다(히브리서 2:14-15).

 

따라서 참된 교회의 특질은,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 그런 자들의 모임이다. 이런 자들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무너짐에서 다시 살아난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해서 그 어떤 종교적 본성들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회에 나가서도 단지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든지 어디서도 이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미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생각하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와 관련 있다. 예수님 본인이 음부의 권세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요한1서 3:8).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멸한 도구는 예배 형식이 아니었다. 그 당시 유다이즘의 예배 양식이 악마를 이길 것 같으면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

 

유대인의 예배는 무용지물이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거기에 매달렸다. 그들은 주장하기를,자기네들의 예배 양식은, 옛날 선지자 모세가 직접 여호와 하나님부터 얻은 것이고 지시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들은 오직 신의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주장한다. 예배의 절차와 순서, 집례자의 복장, 성지의 위치, 제단을 중심으로한 건축물의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는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 율법 강론, 성전세 납부, 더러운 것을 거룩 되게 하는 세세한 정결 조항들, 이 유대 나라의 어느 구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실감나게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완벽하게 하나님 말씀 즉 율법으로만 구축되는 이상세계가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어떠한 생각들이 이 모든 율법의 구조를 깡그리 부정하고 만 것인가? 예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라디아서 3:19). 즉 율법이란 중간에 삽입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왜 인간세계에 사망이 왔으며 그 어떤 인간도 사망의 왕노릇에서 헤쳐 나올 수 없는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사망은 죄에서 왔는데 그 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히 중간에 뭔가 삽입될 필요가 있었다.

 

율법이 개입된 것은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이다(로마서 5:20/7:7,13). 죄가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규칙과 법률 가지고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모두 인간들의 자체적 세계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직 유일한 선한 법이 하늘에서 주어져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특별히 선택된 이스라엘에게 하늘나라 법이 개입된 것이다.

 

율법이 도중에 개입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원 줄기, 원 흐름은 이런 율법식이 아니고 뭔가 차이가 나는 방식으로 구원이 된다. 그런데 유다이즘은 이 노선 도중에 삽입된 것을 구원의 원줄기로 여기는데 그들의 잘못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사도바울은 약속의 자손과 율법의 자손과의 대비를 통해서 밝힌다(갈라디아서 4:21-31).

 

율법을 신봉하는 자는 종의 자식이고 약속을 따라는 자는 천상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은 말하기를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갈라디아서 4:30) 했건마는 종의 자식들이 내어 쫓기는 커녕 오히려 약속을 따르는 자를 핍박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하갈이 아브라함의 이삭을 핍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꺼꾸로 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약속의 자손을 믿는 구원 방식은 어떤 방식인가? 육체의 행함과 상관없는 구원 방식이라는 것이다. '행함'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지켜야 되는 조항들이 나열되어야 한다. 그 조항들은 준수하므로 여기서 공로가 생기고 그 공로와 공적과 열성도가 근거가 되어 선이 쌓이고 이 쌓여진 선의 분량에 따라 구원받는 방식인데 그것을 전면 부정한다는 방식이다.

 

여기서 전면 거부한다는 말은, 거부해야 의나 선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의는 딴 데 있으니 우리 자체 내에서 생산될 수 있을 것으로 애초부터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택한 자를 구원하는 근거가 되는 의는 어디 있는가?

 

로마서 3:21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되어 있다. '율법 외의 한 의'이다. 율법과 복합되고 어울려질 의가 아니다. 율법을 재료로 해서 제조해내는 의가 아니다. 율법을 바탕색으로 하여 아름답게 종교적 양상을 띤 그런 의도 아니다.

 

율법과는 전혀, 정말이지 전혀 상관없는 의이다. 인간의 행위로써 근처 접근도 못할 뿐더러 접근이 가능하지도 않는 의이다. 바로 그런 의가 나타났으니 그 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로마서 3:23).

 

이런 상태임을 확인하라고 하나님을 율법을 준 것이다.이는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로마서 2:19). 율법 가지고 구원을 받겠다고 나서는 자는 항상, 항상 그 기록된 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게 된다(갈라디아서 3:10).

 

이는 율법으로 의가 되는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갈라디아서 3:11). 그러면 무엇이 의인가?

 

로마서 5:9에 보니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나와 있다. '피'가 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자식인 이삭의 운명을 보라. 그는 아버지에 의해 희생 제물이 된다(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은 거기서 구원 믿음을 확증 받는다. 바로 그 아브라함의 노선이 구원의 원줄기요 원 흐름이다. 율법은 단지 도중에 개입된 것뿐이다. 왜 인간들이 죄인이며 인간들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똑같은 믿음을 보이지 않으면 구원 믿음이 아니다.

 

이런 믿음을 인간의 종교적 열성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을 언급한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맺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천상의 자식이란다. 도중에 육체의 행함이 개입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즉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돌아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갈라디아서 3:3).

 

약속으로 나가다가 다시 종교 규칙이나 율법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돌아서면 파멸이다. 성령은 항상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만 성도에게 소개한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며(갈라디아서 3:1) 피이다. 거기에만 하나님이 원하는 "율법 외에 한 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이 지상 활동은 성령에 붙잡힌바 된 활동이었다.

 

아브라함의 원 노선을 견지하는 사역을 하셨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마태복음 8:11) 오직 믿음이다. 백부장의 믿음 같은 믿음이다. 그는 이방인이다.정말 '율법 외'의 사람이다. 이런 믿음이 없는 자는 유대인이라도 저주받는다(마태복음 8:12).

 

산 위에서의 예수님의 완벽한 율법 소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취지를 따른 것이었다(마태복음 9:13). 저주받은 자, 잃어버린 양, 병든 자, 문둥병 자, 귀신 들린 자, 이런 자들에게 율법과 상관없이 자비를 거저 주고 긍휼을 거저 베풀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마태복음 10:7-8).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일방적인 선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행할까 보다는 누구를 '율법 외의 한 의'로 신봉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한다. 소경과 앉은뱅이, 귀머거리,, 죽었던 자, 가난한 자, 간음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 이들에게 어떤 예배 의식을 갖출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이미 그 당시 예배로부터 배척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선언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유다이즘식으로 자기의 행함에 따라 자비와 용서를 확보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다윗의 자손'을 애타게 찾겠는가! 불결한 자인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다른 방도를 언급하신 것이다. 즉 사도 바울식으로 말하면 '율법 외의 한 의'이다.

 

바로 이 의 만이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부활로 증명이 된 이상,교회는 유다이즘의 예배 의식과 종교의식과는 다른 새로운 길로 나서게 된다. 그 길은 주님의 말씀과 계시를 전하는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구원의 능력을 전하기 위한 교회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체제도 이에 병행해서 은사로 세워진다. 십자가의 도를 보여줄 수 있는 자만이 교회의 책임자로 세워진다. 사도행전 20:28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누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다. 그러니 사도에게 있어 교회는 항상 성령의 지배하에 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 교회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가 머물러 있는 교회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감독자가 된 자는 무엇을 감독해야 하는가 하며는 이 '하나님의 피'를 사수해야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8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되어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감독자는 예수님의 피 곧 하나님의 피를 사수하기 위해 교회 감독자로 세워진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피' 대신에 특정 지도자의 노력이나 정성이나 땀으로 메우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복음을 잘못 유도하는 자가 있다면 가려내어 추방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 20:29-31에 보게 되면 "내가(사도 바울)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흉악한 이리"가 어떤 유의 사람을 말하는가? 이점은 사도행전 20:33에 나와 있는 사도 바울 본인의 행실과 고린도후서 11:13-15,20의 가짜 사도들의 행각과 서로 비교하는 것 가운데 밝혀진다.

 

먼저 사도행전 20:33에 나타난 사도의 모습을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이나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심을 기억할지니라".

 

여기에 비해 가짜 사도의 모습을 보자. 고린도후서 11:13-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결국 그 행위대로 되리라"

 

20절 보면,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라고 되어있다. 사도와 가까운 사도 중 누가 십자가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를 보이는가는 너무나도 명백해진 일이다. 교회의 감독자가 어떠해야 하는 지는 너무나도 확실해졌다.

 

동시에 무엇이 '흉악한 이리'인가도 밝혀졌다.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피'를 간직한다는 것은 '율법 외의 한 의'를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보여주게 되나? 이 방법에 대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배워야 한다. 그 분은 현재 교회의 머리가 될 뿐 아니라 지상에 있을 때 이점 때문에 여러 가지 겪은 일이 있었다.

 

예수님이 겪은 일은 단순히 그분 혼자만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2:17-18에 보면,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되어있다(히브리서 4:15-16/5:7도 참조).

 

제자로서 당하는 고생은 스승의 고생과 연속선상에 있다. 그래야지만 그 스승의 그 제자이다(요한복음 15:18-20). 스승을 공격했던 그 공격이 여전히 제자 된 자를 향하여 날라 들어온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율법 외에 한 의"를 어떻게 전했던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했던 그 완성체를 예수님은 이미 가졌다는 점에서 율법의 부적합성을 밝혀내고 율법에 도통 매이지 않는 자유성을 보여주는데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은, 인간 나 혼자 남았다는 말이 아니다. 즉 인간이 진리로부터도 벗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속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내가 진리를 알아서 내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나를 사로잡아 율법 체제에서 빼내어간다는 말이다. 진리 안에 들어오면 더 이상 율법의 간섭과 통제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비유든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과 혼인한 여자가 성령의 세계에 들어오면, 전 남편이 죽은 것이 되어서 더 이상 전 남편인 율법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로마서 7:6).

 

예수님의 지상 생활도 철저히 성령에 매였던 생활 였음을 감안하자. 그런데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할 수 없던 것이 성령 안에 있는 자에게는 성령의 선물로 말미암아 이미 완성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준수에 얶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완성했기에 예수님은 미완성인 율법 체제를 공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떤 자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미완성인 지금의 처지에서 노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따라서 율법을 공박할 처지도 못된다. 오히려 율법의 도움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보다 완성을 향해 자신이 옮겨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런 자에게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터부시한다. 마치 철교를 이탈해서 허공에 붕 떠서 낙하 중에 있는 불쌍한 열차처럼 느껴질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 자유일 것이다. 끔찍한 최악의 경우가 바로 자유 상태라고 알고 있다. 이런 사람 앞에서 예수님은 밀침을 당한다.

 

차라리 흉악한 살인자 바나바에 정이 더가고 좋아진다. 예수는 꼴 보기도 싫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의 가능성 그 자체를 모멸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영원히 예수를 없애버리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다.

 

인간들은 어떤 형태로도 항상 율법적 행동을 견지해 왔다. 율법주의는 모든 인간의 본능이며 본성이다. 일생을 그런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살아온 적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율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양심상(로마서 2:15)

 

율법으로 자기를 변명하고 하나님께 항변해온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 집단을 결성한 자들이며 자체적으로 성스러움과 속됨을 가르는 규칙들은 제정했었다. 예배와 고사를 지냄으로 신의 분노가 진정되기를 간절히 기원한 자들이다. 지극히 성스러운 공간에서, 거룩한 날을 기하여 드리는 성스러운 제사 형식이 자기의 죄를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신임한 그들이었다.

 

그들은 공격한 예수님을 그들도 또한 공격으로 줄기차게 맞섰다. 급기야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드디어 최악의 사태가 도래했다. 율법의 자식들이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로 예수님이 무덤을 박차고 일어날 줄을 몰랐다. 하나님이 예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하나님은 율법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자유 편에 선 것이다. 베드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셨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사도행전 2:35).

 

베드로의 소식에 위기를 직면한 일부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가슴 아파했다.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 2:37). 그러나 '어찌할꼬' 라는 외침은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담 계열의 모든 족속에게 다 요구된다. 땅 끝에 있는 족속들도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기존의 유다이즘적인 예배를 철폐해 버리시면서 도대체 무엇을 구상하셨는가? 예배 없는 예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배를 거부하시는가? 예수님은 구약의 성취를 원하셨다. 모세율법에 기초한 예배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기초한 원 노선에 나온 원 예배를 이루고자 하셨다.즉 "율법 외의 한 의"를 구현하는 예배이다.

 

그렇게 되려면 모세 율법에 기초한 예배를 거부하면서도 그 기대치를 만족하는 예배이어야 하다. 바로 이점을 고려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요한복음 4:24에 나와 있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방인 취급받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한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와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배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구원이 유대인에게 난다는 사실이다(4:22).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의 자격으로 그녀 앞에 서있다. 다른 유대인들인 제자들은 궐석상태에 있다. 유대인만의 예배가 어떻게 이방인에게까지 넘어 갈 수 있는가?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실정을 공개한다. 그것은 전체 사마리아인의 예배 장소와 더불어 유대인들과의 생활과 예배와는 전혀 괴리된 위상에 있다.

 

여인은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데 자기네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 드려왔다고 한다. 그 여인의 개인적인 행실과 그 민족이 참여하는 예배 장소는 율법적 관점에서 봤을 때 함량에 미달된다. 따라서 구원의 축복과도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인도 이제는 이쪽 유대인의 예배에 참여해서 함께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주신다. 일단 예배 장소는 상관이 없다. 참된 예배는 진리와 영으로 드려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세적 율법 예배는 탈락이 된다.

 

유다이즘적 예배가 와해되면서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메시야 앞에서 똑같은 입장이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언급하기를, 영의 예배는 메시야가 앞서 등장해야 가능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 사실은 에스겔에 기인한 내용들이다. 에스겔서에 의하면 다윗이 새로운 목자가 되어 왕으로 군림하고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했다(34:20-24).

 

뿐만 아니라 쪼개진 나라는 다시 결합시켜 하나가 되고 고 맑은 물을 뿌려 정결케 하고 새 영을 자기 백성들 마음속에 두어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키게 하겠다는 것이다(36:25-27/37:16-19,24-28).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방법은 오직 이스라엘이 왕이 오시고 그분에 의해 새 영이 주어질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다"(요한복음 4:25).

 

이스라엘에게 있어 참 예배는 그 자체가 곧 구원이었다. 참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이 여전히 왕이 되셔서 친히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리는 형태이다. 만약 참 예배가 깨어지면 국가도 와해되고 구원도 소실된다. 그래서 참된 예배의 초점은 형식이나 의식에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왕이냐에 철저히 근거한다.

 

그 분에게 보다 완전히 복종하고 지시에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그런데 유다이즘은 참된 예배를 형식화하고 고정화 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새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왕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밖에 그냥 문자로만 남아있는 율법이 무슨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겠는가.

 

그들은 마음밖에 또 하나의 새로운 우상의 전을 만든 셈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성전 파괴는 제사 예배의 종결을 의미한다. 새로운 예배와 제사는 영으로 한다. 이는 성전 대신에 성령을 처소로 삼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함께 만나는 상태이다(요한복음 14:1-23).

 

성령이 주도하는 예배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한 그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의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했던 그런 식의 삶을 이제는 성령 안에 있는 자기 제자들의 삶이 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전에는 예수님 만의 아버지이신 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너희(제자들)의 아버지가 비로소 되신 것이다(요한복음 14:10-12과 20:17을 서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음).

 

예배, 그것은 곧 교제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믿었던 그 믿음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예배의 다른 목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지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란 참된 예배자를 찾는 거라면,(요한복음 4:23)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한복음 6:29). 바로 이런 점이 모세 율법과 다른 점이다. 오히려 모세 율법의 완성태의 모습이다. 이 완성태는 오직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이점에 대해서 니고데모도 이해되질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육의 사람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진 세계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율법적으로 아무리 요란스럽고 화려한 예배 의식을 거행한다할지라도 여전히 육이다. 그것은 육의 잔치이다. 하나님 나라와 전혀 상관없는 종교 몸부림에 불과하다.

 

예수님 보시기에 니고데모의 세계는 전부가 육 그 자체였다. 영생은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는데 있다. 인자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생명 그 자체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명을 확보하겠다고 아직도 육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진정한 예배인가.

 

성령은 형식 예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예배를 죽이고 예수님 자체만을 소개하신다(요한복음 7:37-39). 끝없이 터져 나오는 성령은 더욱더 예수님만 부각시키신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예배라고.

 

'율법 외의 한 의'에 근거한 예배는, 인간의 모든 불실한 예배를 지적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율법적으로 완전한 예배를 구비해서 축복과 구원을 받아내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다 허사로 끝남을 미리 알게 되는 예배이다. 일천번제로 드려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예배를, 인간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기 위한 예배로 사용하고들 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온 영광을 마다하고 자체적인 종교 노력에서 나오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도중에 개입된 것에 불과하다.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아집에 매달려 있는지 그 죄악을 폭로시키기 위한 의도로 도중에 투입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구원의 원 노선이 아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 쏟고 성실하게 규정을 지켜도 제사 드리는 마음 속에 원초적 죄악으로 충만한 원죄의 인간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쁘게 열납하겠는가? 율법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한 인간에 의해서도 참 예배로 성공했다면 메시야가 구태여 오셔서 꼭 희생 제물이 되어야 될 필요가 있었겠는가. 구약의 모든 예배 의식은 예수님의 사역과 활동을 부분적으로 현시한 것뿐이다(히브리서 1:1).

 

따라서 그것들은 모두 진정한 예배의 최종태가 아니다. 참된 예배의 종착 지점은 성도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 교제 속에서 신자는 사랑을 새롭게 이해한다.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됨을 예수님을 통해서 파악하게 된다. 교제, 즉 예배의 속 알맹이는 낯선 하늘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행위로 규격화될 수 없는 사랑이다. 법률화 시킬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고 윤리나 도덕과도 무관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초월한 당사자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이요 세상의 윤리와 도덕 기준 때문에 죽음을 당한 그분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랑은, 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세계로 만들기 위한 협력심이 담겨있는 사랑이라면 교제 안에서 느끼는 이상한 사랑은 이 세상 전체를 훌훌 털어버리게 만드는 사랑이다.

 

초대 교회에서 예배의 형식은, 성령의 현존을 보이는 모습이다. 교회, 즉 '모임'이란, 성령에 의해서 모여든 모임이다. 성령의 의도에 의해서 집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하늘의 사랑'이 성령의 현존의 모습으로 그 모임에서 주도권을 지닌다. 집회의 주도권은 사람이 아니다. 성령님이라는 하나님이시다.

 

만약 사도나 특정 감독자가 주도권을 갖는 집회라면, 그 집회를 유도해나가는 사랑이란 그 지도자의 사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운집한 신도들은 그 사적인 지도자에 종속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공동체는 반대로 '낯선 사랑'이 사도뿐 아니라 집회 참석자를 장악한다.

 

사랑으로만 느껴지는 성령의 현존은, 사랑 이외의 것을 척결하므로 예수 메시야 사역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어도 지상을 향한 영향력 행사는 교회를 통해서 지속할 수 있게 한다(에베소서 1:23).

 

오순절날 성령이 지상에 밀려옴으로 성령이 주도하시는 모임(교회)이 발생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임의 활동들이 단순히 인간들의 종교적 환희의 결과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계속 조심스럽게 보게 되면 거기에 세상 사람들마저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들이 일어난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기적의 발생처를 지상의 사도 활동에서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한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사도들이 병을 낫게 했다고 여긴다.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했다(사도행전 3:11-13).

 

여기서 베드로가 정중한 겸손을 보이는 게 아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요한은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실제로 예수님은 하늘에서 일을 진행시켰다. 그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지금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자기의 믿음을 그 앉은뱅이에게 공급해 주므로 그자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사도행전 3:16).

 

왜 예수님은 그 앉은뱅이에게 믿음을 주었는가?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여전히 주가 되어 있다는 것을 지상에 밝히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과 앉은뱅이 이 둘 만에 있었던 관계를 사도들은 외부인으로서 설명하고 해석하고 확인만 했을 뿐이다. 같은 경우가 사도행전 5장에도 나온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서 땅값 일부를 감추고 베드로에게 주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 즉각 징벌의 죽음이 주어진다. 왜 죽어야 하는가?.사도 베드로를 속였기 때문인가? 아니다. 사도는 권리 행사 밖의 존재이다.

 

베드로는 그 이유를 이 부부에게 설명해 준다. 성령(5:3) 즉 "주의 영"(5:9)을 속였다는 것이다. 사도가 아니다. 이 부부는 교회 내에 성령의 현존을 인정하려 하질 않았다. 성령을 빼고 교회를 생각할 때,남은 것은 사람들의 군집이다. 모두 다 평등한 자기 영역을 고수하고 있는 공동체에 불과하다.

 

이런 공동체 집단에서의 속임이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타인의 영역에 침해했을 경우에만 악으로 성립한다. 그래서 얼마 내든, 전부를 내든 일부를 내든, 땅값을 속여 내든 그것은 본인들의 재량이다. 사도든 누구든 왈가 왈부할 문제가 아니고 관여할 문제도 아니다. 하자만 초대 교회 내에서는 이 부부의 행위를 교회의 위기로 간주한 것이다.속이는 자에 의해 속임을 당해야 하는 주체는 성령이셨다.

 

인간세계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연속적인 주님의 활동을 부인하는 처사로 해석된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과연 계속해서 사역하신다 하는 것을 교회라는 방식으로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을 못 보여준다면 교회는 예수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있지 않는 사이비한 단체이다. 교회의 존재는, 예수님의 현 위상을 말해준다.

 

이미 주님 되셨다는 증거로서 성령이 왔고 또 그 성령의 현존으로써 교회가 있다면,교회 내부에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예수님이 한번도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오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한복음 12:48-49).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면서 심판을 아버지의 몫으로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제 주의 자리, 즉 심판의 자리에 앉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 심판 주의 모습을 지상에 남기는 것이 성령님이 하실 일이고 교회가 보여줄 일이다. 지상에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아세우고 계시를 무시했던 그 오류를 근거로 해서 계속해서 심판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되심이 역사 속에서 무효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연속적 심판 행위에서 확인된다. 사도는 그 확인의 자리에 서있을 뿐이다. 결코 사도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니라 터로 사용되기 위하여(에베소서 2:20) 증거적 은사만 받을 따름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로다"(5:4). 심판의 적용은, 예수님의 제자군의 특색임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미리 드러나고 있다.

 

마태복음 18:15-20에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나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 심판의 구체적 경로가 '주의 이름'으로 확정되려는 시점에서 제자들의 할 일은, 구원과 심판의 범주를 새롭게 구획하는 일이다. '주의 이름'이 소지한 영향력은 하늘과 땅 모두를 커버한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늘의 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주의 이름'이 하신 기능이 땅에서 분명한 결실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열매는 교회이다.

 

심판 당해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교회가 된 것이다. 따라서 주의 위치에서 예수님이 갖는 새로운 심판 기준은, 심판 당해야 마땅한 인간에게 공여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한다.

 

'주의 이름'이라는 경로로 무한정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가,'주의 이름'의 고유성과 배타성을 보인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되는 태도를 보일 때는, 다른 제자들이 '주의 이름'의 고유성을 수호하기 위해 심판의 구역으로 그 사람을 추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으로서의 사역은, 지상에서 새로운 방식을 수반하게 되었다.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언하는 증인들의 모임이 있는 한 아직도 예수님은 지상에서 일하고 계신다. 직접 증언과 동일한 효과를 지니는 교회 증언은(요한복음 20:23), 주님께 철저히 종속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종속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령이 오시고 난 이후에 가능하다. 교회가 성령 종속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치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성령에게 종속되었듯이.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생긴 단체가, 주님께서 새롭게 일하시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기능의 적용 상대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는 계속해서 사랑의 은사가 쏟아진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 못하는 자는 교회 전체를 사랑에 의해 생겨난 단체라고 여기지 못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과 격리시켜주는 사랑이다. 심판의 자리에서의 탈출시켜주고 지켜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교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 마치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계속 사랑하신 것처럼 (마태복음 3:17/17:5/마가복음 1:13:22/누가복음 3:22/요한복음 3:35/5:20/10:17/15:9).

 

그 때도 예수님이 성령에 종속되어 있었기에 그 지속적 사랑의 교제는 가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성령 안에서 배타적인 사랑을 제공받는다. 이런 사랑의 부여가 곧 성령의 은사이다. 이 성령의 은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모든 은사가 반드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동기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유발시켰고 또 예수님의 자발적인 사랑이 성령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랑의 차원에서 활동하게 하셨다. 항상 사랑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구체화되었다(갈라디아서 2:20/에베소서 5:2/데살로니가후서 2:13).

 

그리스도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결실이, 교회에게는 성령의 은사로 드러난다. 이 은사들은 사랑을 확인하고 증거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은사들이다.계시 전달 은사도 있는가 하며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질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기능도 있고, 봉사로 사랑을 표현하는 은사들도 있다.물론 계시 전달 은사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질서를 강조했다.

 

너도 나도 터져 나오는 계시는 자칫하면 교회를 어지러운 마당으로 변하게 해서, 덕과 사랑을 유지해야 하는 주님의 사역에 지장이 될 수가 있다(고린도전서 14:26-40).그러니 모든 은사는 끝까지 성령 종속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적 사역은 중단이 되지 않는다. 전에 지상 생애 시절처럼 직접 사람 음성으로 계시와 교훈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승천 이후의 예수님의 종말론적 상황을 절실히 드러내지 못하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종말이 되어야 비로소 나타나시는 성령님에 의해 주도된 그리스도의 사역이야말로 언약 성취적 방식에 따른 '주'의 자격으로서의 사역이다.

 

따라서 이 성령 종속적 은사들은 모임을 가질 때마다 반복하여 예수님의 사랑에 반응하고 확인하고 전달하고 주지시킨다. 그리고 이 사랑에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보이면서 하늘의 심판을 기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성만찬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즉 예배는 예수님의 메시지 전달을 위함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1:23-25,27).

 

'예수님께서 잡히신 날 밤'이라는 표현을 사도 바울이 사용하므로써 현재 성도들도 하여금 지상 생애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지속적인 계시 전달에 반응하기를 독촉하고 있다. 그때 그날 밤은 이미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대로 버림받은 상태에서 나온 제자들에 대한 최후 사랑을 표현한 모임이었고 교제였고 예배였다.

 

성령이 오시고 난 뒤, 교회는 그 버림받은 폐쇄적 사랑을 개방적으로 사랑으로 전환하여 다시금 회개를 촉구하는 기회로 삼게 된다. 성만찬이 단순히 유다이즘적인 경건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친교하고 형제들끼리 주께 받은 사랑을 확인하고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부탁하신 새 언약의 계시를 다시금 신앙으로 수용하는 모임이다.

 

만약 이 새언약 계시 표현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자 있다면 그것은 주께로부터 저주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고전 11:27-32). 여기서 말하는 부정적 태도란, 예수님의 사역이 현 역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제공하는 사랑의 회개 촉구에 대해서 안일한 타성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회개 촉구는 예수님만 하실 일이 아니라 현 세대에서 교회가 지속적으로 해야하는 일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그 자체가 사랑의 실천이다. 배고파하는 가난한 형제는 그런 기회를 통해서 교회가 제공한 사랑을 맛보게 된다. 떡과 잔은 그들에게 식량이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는 식량인 동시에 예수님이 전해준 계시를, 먹고 마시는 가운데 인식하게 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이 물질의 나눔이 곧 성령 안에서의 사랑이 나누어지는 축제이다. 예수님의 죽음의 선포라는 복음이 축제 형식화되어 파급되고 확산된다. 여기에 먹는 마시는 소문만 펴져 나가는 게 아니라 노래와 시와 찬미도 함께 확산되고 더 나아가서 서로 섬기고 서로 도와주어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중심 사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참된 예배란, 성령 안에서 온 교우들이 한 몸 되어 서로 섬기는 일이다. 마치 12제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여러 해 같이 생활한 것처럼 말이다. 마태복음 12:48-50에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들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예수님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에서는 그 지향점이 하나님 아버지였고 그 중심점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승천을 기화로 새로운 차원에 돌입된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율법 외에 한 의"가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이 예수님의 사랑이 다양한 은사들을 하나를 향하여 움직이게 한다.

 

만약 하나로 모여들어 움직이지 아니하면 가짜 은사이다. 사도행전 4:31-32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라고 되어 있고,

 

또 에베소서 4:3-6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라 만유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되어 있다.

 

교회가 지향해야 될 그 하나에서 소위 인간들의 지도자는 탈락된다. 마태복음 23:8-10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 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나'에 해당될 구심점 위치에는 그 어떤 인간이 들어설 수 없다.만약 들어서기를 고집 한다면 필히 이단이다(요한 3서 1:9).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인간이나 총회나 교단 협의회 같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고 위임될 수 있다고 하시질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현존이 깨어지기 때문이요 예수님은 교회 내에서 비실재하는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제간의 하나 됨을 교단연합체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짜 교회임이 분명하다. 인위적인 팀 구성은,그리스도 몸의 하나됨을 공격하는 최후의 적이 우상으로 작용한다. 성령이 주신 자연 그대로의 사랑과 자연 그대로의 소망과 자연 그대로의 믿음을, 수용할 수 없는 허위적으로 것으로 간주한 배도적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은사의 교류와 나눔은 나눔이 있는 이유는 마태복음 23:11-12에 잘 나와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지체들은 서로서로 관계를 통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고 지도자도 아비도 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입고 사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교회란 자기의 종교 재주를 피워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영역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은 서로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로 사랑하고(요한복음 15:12)

서로 교제하며(사도행전 2:42)

서로 앞장서서 존경하고(로마서 12:10)

서로 합심하고 (로마서 12:16)

서로 받아들이고 (로마서 15:7)

서로 충고하고 (로마서 15:14)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고(로마서 16:16)

서로 기다리고(고린도전서 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해주고 (고린도전서 12:25)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갈라디아서 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디아서 6:2)

서로 위로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서로 덕을 세우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데살로니가전서 5:13)

서로 선을 행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5)

서로 사랑으로 참아 주고 (에베소서 4:2)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에베소서 4:32)

서로 순종하라 (에베소서 5:21)

서로 용서하고 (골로새서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히브리서 10:24)

서로 나누어주고(히브리서 13:16)

서로 죄를 고백하고 (야고보서 5:16)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야고보서 5:16)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하고 (베드로전서 1:22)

서로 대접하고 (베드로전서 4:9)

서로 겸손하게 대하고 (베드로전서 5:5)

서로 친교를 나누는 것(요한1서 1:7) 등에서 '서로'라는 것은 관계를 짓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계시적 차원에서 보여주는 기능들이다.

 

이 '서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마지막 때가 될 수록 자주 모여야 하고 폐하기를 원치 않아야 한다(히브리서 10:25).

 

그래서 예배란 단순한 종교의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모임을 통해서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했던 그 상황을 현재화로 돌려 계시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예수님에 의해서 싫어버린바 된 것을 교회도 같이 싫어하면서 배척해야만하고 그리스도가 원했던 사랑의 교제를 '서로 관계'를 통해서 성사시키는 곳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심판 기능과 구원 기능이 유효한 모임이 될 수 있을 게 아닌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예배이다. 물론 형제들끼리 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두고 언급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 자체가 우상이 된다. 오히려 공동체를 지양해서, 영 안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항상 어디서는 함께 사는 것이 예배이다. 로마서 12:1에 보면 다음과 말이 나온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되어 있다.

 

유다이즘적인 예배관에서 볼 때, 몸을 드리는 것은 몸적 예배요 육적 예배가 된다. 마치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것 같은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리 말한다.

 

결코 종교의식의 소품으로서 동원되는 육체 덩어리를 바치는 게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아니라, 연이은 본문에 의하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되어 있는데(12:10-11),이와 같이 것이다. 지체들끼리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예배이요 몸으로 드리는 참 예배이다.

 

성도의 모든 육체가 다 하나님이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가진 그대로, 현재 지니고 있는 지체를 자연스레 사는 것, 이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로 어떤 형태를 만들어서 영광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고린도전서6:19-20).

 

이렇게 보게 되면 예배란,틀에 박아놓은 종교의식이 아님이 드러난다. 규범화된 의식 자체가 자동적으로 하늘을 복을 따내어 오는 것이 아님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형식적 예배가 자동적 구원의 축복을 주는 게 아니다. 구약 선지자 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리를 아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들을 하였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편 40: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6-17).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는 상한 심령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사랑이다. 즉 사랑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그냥 사랑이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는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적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0-17).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이웃사랑이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를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공의로움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라기 1:10).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이웃사랑이다.

 

이상의 귀절을 가지고 한 번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무런 공로를 보시지 않고 상한 심령인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택하사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을 담아 이웃에게 보일 때 이 전체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라는 말이다.그러면 이와 같은 참된 예배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예배의 형식은 왜 도입되었는가?

 

선지자들은, 양과 소를 제물로 대신 바치는 의식 예배를,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원예배의 가치를 보충하는 선에서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간주하고 의식 예배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한 자들이다(히브리서 1:1/8:7/10:1-10).

 

인간의 죄를 위해서는 오직 인간의 몸만이 제물로 대신되어야 한다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 제사의 본질은, 죄인을 대신할 무흠한 의인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여부에 의해 성취, 미성취가 가름된다. 예언자들은 부지런히 현 백성의 비의인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오실 완전한 제사장을 고대하면서 회개하기를 요청한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그 겸손 가운데 주의 날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

 

제사의 중심이 장소적 의미의 성전이 아니라 회개하는 심령 그 자체에 임하는 하나님 본인이 성전이 되는 날이 온다고 선지자들은 내다봤다(에스겔 37:24-28). 범죄한 이스라엘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께서 흐르고 넘쳐서 성전으로 구성되는 날이 온다고 스가랴는 말하고 있다(스가랴 4:6).

 

성전이라는 것이 정기적으로 성대한 종교 의례가 이루어지는 지정된 공간을 두고 말하는 그런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의가 어디서 움트는가가 관권이다(이사야 45:8). 만약 하나님이 특정 건축 구조물 속에 있으면, 인간 속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님을 부정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 즉, 성령이 계신 곳은 예배당이라는 처소가 아니라 성도의 몸이다. 성령이 계신 성도의 몸이 곧 성전이다(고린도전서 3:16-17/6:19).

 

성령이 안 들어 계신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못된다(로마서 8:9). 성도는, 자기 속에 자리 잡고 계신 분에게 순종하기 위해 자기밖에 있는 규칙을 도외시하는 사람이다(예레미야 31:33-34). 성령님이라는 또 다른 인격체가 자기 속에 없다고 여기니 그 성령을 딴 데서 추상적으로 찾고자 한다.

 

단체로 구성된 교인들의 집회 때만 잠시 왔다가 종교의식 끝나고 다시 어디론가 다른 집회 장소를 찾아 홀연히 떠나버리는 그런 성령님으로도 생각들하고 있다. 성도에게 성령님이 계시는 방식은, 예수님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방식과 동일하다(요한복음 14:10,17,20).

 

늘 그 당사자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배란,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지, 하나님도 안 계시는데 일부러 광적으로 하나님 초빙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의 몸으로 날마다 영적 예배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고 스데반집사는 전도했다.

 

그러면 어디 계신가? 그렇게 전도하는 스데반집사 자체에 계셨다.성경에서는 그것은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사도행전 7:55). 이처럼 성령의 활동은 교회로 하여금 예배 처소나 시간에 얶매이게 하지 않는다.늘 현장성을 지닌다.성령의 교회는 그때 그때마다 발생된다. 성령의 활동이 개시되는 곳에는 인간들의 종교성과 마찰을 이르킨다.

 

완전한 교회를 인간들은 보고 싶어 한다.따라서 이런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노력한다. 바로 이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흔적을 보이다가도 곧 사라지고,사라졌다가도 또한 다시 등장된다. 이제는 완전한 교회이겠지 하면 어느새 성령은 인간들의 교만을 걱정하며 멀리 피해버린 후이다.

 

그러나 다시 용서를 구하면 그 회개 속에서 십자가를 드러내신다. 인간들은 수시로 교회를 붙잡아 두려고 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이와 같은 인간화를 공격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늘 공격하고 또 늘 회개를 촉구하신다. 하나님이 회개를 요구한다고 해서 교회가 회개하는 인간들의 손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그들의 회개를 통과해서 교회가 나타날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이미 방향이 정해졌다. 인간들의 창의적인 의식으로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임의로 의식의 틀을 벗어버리고 한껏 자유로움 분위기를 유발시킨다고 성령의 예배가 아니다.

 

예배의 본질은 형식의 유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무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형식의 유와 무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약점과 죄과를 가려보겠다는 심사에서 그 조직과 제도 자체를 소지하고 다니려한다.

 

직분의 소유화이다. 사울왕의 제사나, 발람선지자의 예배나, 갈멜산의 850명 바알, 아세라선지자의 예배를 비롯하여 예수님 지상 생애 당시, 유대인들이 드렸던 율법적 유다이즘 거짓 예배들은 모두 다 예배를 자신들이 소유화하려고 한데서 비롯된다.

 

예배를 소지하므로 거룩을 항상 자동으로 소지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늘 거룩한(?) 존재로 남기 위해 거룩하다고 여김 받는 직분과 직급을 동원한다. 그리고 평생토록 자기 것이 되도록 외부에 공표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필히 외부적으로 정치적으로 담합하고 교회 내에서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한 번 거룩한 직분자는 곧 영원토록 거룩한 직분자로 추앙받기 위한 완벽한 사후 대책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런 사탄의 유혹에 늘 놀아난다는 것을 아신다. 이런 와중에서도 계속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오늘날에도 성경이 있다. 즉 신약에 나와있는 각양 임무들은 사실에 있어, 바로 이와 같은 직분자 고정화 작업을 철저하게 고발하고 정죄하기 위해 존재한다.

 

누구든지 그 은사에 합당하지 못하게 움직이면 한시라도 그 자리에서 제거시켜야 하는 것이다(고린도후서 11장/로마서 16:17-18/디모데전서 6:5/요한계시록 2:2). 인간이 만든 법에 결정권이 있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계속 보여주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아무리 성경에 나와있는 직분의 명칭을 그대로 도용한다 할지라도 전혀 계승권이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승은, 형식의 유사성에 잇는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국한되기 때문이다.(요한1서 3:13-16).

 

"율법 외에 한 의"에 기초를 놓지 않는 예배는, 예배도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예배와 거룩을 소지하기 위해 엄청난 자기 노력을 한 것같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예배로 초대된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 창조 사역을 계속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이다. 예배의 반복 속에서 죄는 극복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의 복은 막힘없이 정상적으로 그들에게 제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예배자 자체가 이미 죄의 노예로 전락된 상태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정기적인 예배는 필연적으로 비계시적 예배의 모습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 안으로 십자가 지신 자기 아들을 던지셨다. 정기적 예배.그 자체만의 의미는 상실되었다.

 

참된 예배는,바로 던져진 십자가에서부터 새로이 시작된다. 십자가를 사건을 통해서 자체의 의 추구를 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베드로전서 4:11).

'제자 양육 자료실 > 십자가를 아십니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십자가와 상급  (0) 2009.09.24
4. 십자가와 주일 성수  (0) 2009.09.24
3. 십자가와 헌금  (0) 2009.09.24
2. 십자가와 기도   (0) 2009.09.24
서론 -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  (0) 2009.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