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십자가와 주일 성수
날이란, 해의 뜨는 것과 지는 것과 관련 있다. 다음 번에 해 뜨는 데까지를 한 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특정 날을 기억하고 지킨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특정 날을 꼭 지켜야 한다고 계명으로 남긴 적이 있던가? 예수님께서 시키지도 않는 것을 인간들의 머리에서 율법화해서 소위 '주일 성수'라는 것으로 튀어나왔다. 정말 교회에 예수님은 안 계시고 인간들을 조정하는 종교 전문가들만 있는 것 같다.
일반 사회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일손을 멈추고 직장도 쉬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거저 인간들의 관습이요 전통이다. 성경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휴머니즘 입각한 자애심을 나타낸다면서 잔뜩 관심을 가져본다.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휴식 제도를 마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아 전 세계 민족이 다 가담해서 쉬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교회의 본연의 할 일은 이런 인권 문제에 개입하는 게 아니다. 교회가 인간 편이 안 되어도 인간들은 얼마든지 능률을 생각하면서 자기 편한 길로 찾아 갈 줄 아는 존재이다. 정작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인간들의 이러한 편익 위주의 생활 속에서 정말 귀한 것을 놓치고 있으며 더욱 더 무서운 일은 이들 인간들이 시간이라는 가상의 관념에 홀려 꼼짝없이 노예로 되어 있다는 점을 폭로하는 일이다.
'시간 엄수'라는 과학적 인식 뒤에는, 뭔가 자기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실체에 스스로 종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노예성이 깔려 있다. 따라서 그 동안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왔던 그 시간이라는 것의 정체를 파헤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 있다.무수한 세월을 보내었다는 표현도 있다. 모든 언어 표현은 인간에게서 나온다. 언어란, 사람들끼리만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을 주고 받기 위해서 이용된다. 공통적인 느낌이 형성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묘사해내는 언어가 동원된다. 코끼리나 말처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물체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용왕이나 귀신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나름대로 서로 일치되는 상상력이 있기에 그런 용어들도 인정들 한다. 시간이나 세월이라는 언어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시간이 길다 짧다' '세월이 느리다 빠르다'라는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물처럼 시간이라는 것이 실제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마치 뱀이 천천히 지나가는 식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꿈틀거리면서 땅 사이를 지나간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시간을 열차에 비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열차처럼 실제로 속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과거와 앞으로 남아 있는 미래와 현재를 전체로 연결하여 하나의 허리띠처럼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오산이다.
과거라는 시간개념이 있든, 미래라는 시간개념이 있든, 실재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현재 형성되어 있는 이 육신뿐이다. 이 육신은 과거가 만들어낸 육신이며 또 미래가 만들어갈 육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쨌든 현존하는 것은 육신뿐이다. 과거의 육신은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이미 현재 육신으로 변화된 것이다. 아무리 변명해도 미래의 육신은 아직 없다. 아직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유가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로 봐서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 아닌가. 미래라는 시간이 이 육신보다 먼저 가 있어서 우리를 마중하는 실체가 아니다. 계속 홀로 움직이는 것은 영원히 홀로된 이 육신뿐이다. 결국 남는 것도 시간이 아니라 육신만 남는다.
그렇다면 시간은 뭔가? 시간은 자연의 변화와 차이성을 전 후를 따져서 정리할 줄 아는 인간들의 인식 본능이다. 실제로 자연의 모든 변화가 없다면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내부의 육체도 자연의 일부라고 간주해서 하는 말이다. 인간의 모든 내부 기능이 완전 마비가 되면 곧 그것은 죽음이다. 시체가 어떻게 시간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시체가 되어도 시계는 밖에 남는다는 말은 옳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밖이라는 기껏 자연의 여전한 움직임일 따름이다. 자연이 시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노아 언약에 따라 일정하게 움직인다(창세기 8:22)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고 교체된다. 그러나 안식일이 오는 7일마다 변화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연의 변화와 더불어 호흡하고 있다.
외부 환경에 민감하고 교감하고 교류하는 생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시간이란, 대자연의 변화에 감응하는 생체의 변화에서 생긴 인식이 바로 시간이다. 자연은 늘 상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변화된다. 전에 보았던 별이 다시 정해진 주기로 해서 다시 나타난다. 해가 뜨게 되면 해는 다시 지게 된다. 뜬 달도 나중에는 지게 된다.
그 변화는 대체로 고르다. 창세기 1:14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로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빛 때문에 낮과 밤의 구별이 생겨났지만(창세기 1:5) 일단 생겨난 낮과 밤은 천체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지면 낮 밤의 구별도 없어진다(요한계시록 22:5).
인간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 변화의 질서를 포착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서 그 대자연의 변화, 즉 시간에 순응하여 자기 생활을 던져 넣는다. 이것이 대자연이 만든 시계이다. 시계는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자연이 갖고 있었다. 인간의 기계적 시계는 그것은 모방한 것뿐이다. 시계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러나 시간은 자연 속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의식 속에 있다.
이번 변화에서 다음 변화까지의 간격을 인간을 느끼고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달력에 맞추어 자연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달력이 자연의 움직임에 맞추어 조정된다. 윤초며 윤달 보정 작업이 바로 이런 것이다. 순환되지 않는 시간관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날과 달과 해를 기초로 해서 일정하게 제자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은 시간이 순환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라는 시계가 순환된다.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그것을 큰 시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간 의식을 갖는데 여기서 비로소 시간이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인들은 어느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순환되는 천체를 통해서 순환되는 시간관념을 지녔다. 그러나 문서 선지자들이 등장하고부터는 이 일정한 율을 가진 천체가 붕괴하는 시점을 고대하게 된다. 먼저 창조된 이 세계가 멸망되고 새로운 세계로 채워진다고 여겼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이 작업에 동원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과 말씀은 항상 무시간적이었다. 자연만을 통해서 세계관과 역사를 형성하는 여타의 민족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들만의 계시를 약속을 통해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만물과 시간보다 항상 우위에 점하고 영원성을 지닌 것은 말씀이었다. 여기에 비해 자연은 태고로부터 현재까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 자연인의 태도들이다(베드로후서 3:4/전도서 1:1-11).
시계는 인간밖에 있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 안에 있다. 시간개념을 갖고 있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를 차지하지만, 자연은 시간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자연은 노아 언약에 의해서 일정하게 움직이게 되어있다(창세기 8:22). 멸망할 때까지 계속된다(시편 102:26). 그 변화의 기본은 날이며 계절이며 연도이지 결코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이 되었다고 해서 천체 우주가 바짝 긴장을 하면서 질서에 어떤 징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안식일 계약이 본래부터 인간과 관련 있는 것이지 자연과 관련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남아있는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인간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시간 의식을 통해서 새로이 안식일 계약을 맺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을 만드셨지 시간을 만드는 게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시간까지 창조했다면 시간 타락, 시간 구원이라는 해괴망칙한 가설이 성립된다.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을 구원하지 시간을 구원하시는 게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피조물이지 시간이 피조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시간과 의논해서 시간 차원에 구원을 성사시키시지 구태여 인간과 상관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메시야를 보내겠다는 말씀은, 바로 인간과 계약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로 해서 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 감각'이란, 인간이 시간에 대해서 감각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만이 홀로 시간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시간 감각을 인간들처럼 소유하고 있기에 시간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부질없는 상상이다.
진리 해석을 혼돈으로 몰아가게 한다. 분명히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신 것은 빛과 어두움과 자연과 인간뿐이다. 빛과 어두움은 시간이 아니다. 다만 창조 세계의 환경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구원에 시간을 결부시키고자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을 인간에서 분리시켜 시간을 공간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이러한 외부 요소에 인간이 구원을 기대는 비계시성 때문이다. 즉 어떤 획기적인 질적 변화를 일으킨 시간이라는 자연이 인간에게 행여 구원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못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지경에서, 인간의 외적 요소라고 여겨지는 시간 자체가 언젠가는, 또 언젠가 뭔가 획기적인 질적 상승이 생기면 인간은 그 밀려온 시간대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막연한 희망이 인간들로 하여금 막연한 메시야날, 구원의 날을 고대하게끔 한다. 그러니 시간이라는 자연의 요소가 우상이 되는 셈이다. 인간을 분석할 때, 시간을 인간의 외적 요소라 분해하면 이런 우상 숭배의 현상이 벌어진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 성향 중의 하나가 뭔가 희망한다는 희망의 본능이다. 그런데 이 희망성이 오히려 현재 삶을 허하게 해버리는 것이다. 미래 의식이 인간에게 있기에 아직 이루지 못하고 남아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인간은 빈곤을 느낀다. 그런데 이 빈곤성은 아직 미래의 그때가 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메우려야 메울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자아를 핍박하게 된다. 이 미완결에서 오는 허무성에서 자유로와지는 방법은, 그 미래의 것을 미리 취하여 가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선취하는가? 그것은 희망 그 자체를 미래의 담보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간은 이미 희망 속에 사로잡히게 된 미래 안으로 자신을 집어넣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재에 있어 두개의 질적 차이가 나는 시간대를 가지게 된다. 하나는 과거의 연장으로서 이미 완결된 현재라는 실체이고 또 하나는 희망이라는 것 속에 들어있는 현재화된 미래라는 시간대이다. 과거에서 볼 때, 현재는 완성이다. 그러나 미래에서 볼 때 현재는 미완성이며 모자람이다.
그러나 현재화된 미래에서 보게 되면, 미래는 현재로 간주되고 현재는 과거로 간주되기 때문에 과거-현재의 고리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희망을 가진 사람은 항상 '아직'의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의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항상 완성이니깐 미완성의 사슬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의 지배에 놓이지 않는 초자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이러한 희망 자체가 허구로 곤두박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인-결과의 연결 고리를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인을 주지도 안했는데 결과부터 상상해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자기암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래의 완성이란, 반드시 현재가 주는 근거를 토대로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원인이란 항상 결과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없어져 버린다.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재간이 없다는 점에서 희망은 단지 희망으로만 그치고 만다. 이와 같은 불운은, 인간에서부터 시간을 분리해서 하나의 관계 상대로써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지만 시간을 인간 속으로 함몰시켜 버리면 결국 육체라는 몸뚱이만 남게 되고 희망도 조차도 그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 어디에도 자기가 의지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존재, 이것이 인간이다.
이처럼 시간개념을 인간 그 자체에서 분리하면 결국 인간의 자체적인 모순만 폭로될 뿐이다. 진리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서 출발시켜야 한다. 시간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내용으로 하는 계시와 연계해야지 그렇지 않고 마치 자연 속에 실제로 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을 시간의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 섬기고 주님 섬기면 됐지 왜 시간에 신경 써야 하나? 이것 자체가 범죄한 이후에 인간 중심적으로 변질된 사고에서 나온 철학적 관점이 아닌가. 모든 인간들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좀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겠다는 발상은 정말 비복음적이고 비계시적인 생각이다. 더 근본적인 질의를 던져 본다.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가? 인간이 시간의 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인가? 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시간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야 되나? 시간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가? 예수님이 중보자이신가 아니면 시간이 중보자인가?
구약이란 예수님 오시기 전을 말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예수님 말고 단지 자연을 설명한다든지 시간을 구조를 해명한다고 하면 옛 계약으로서의 의의는 상실된다. 이런 뜻에서 구약 성경도 예수님 책이 된다.
단순히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옛날 역사책이 아니다. 예수님을 겨냥하는 것과 상관없이 끼어있는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될 리 없다. 성경의 전체 의도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역사 자체를 계시로 보는 사람은 여기서 결별된다.
목적을 잃은 역사는 무의미한 역사인 동시에 해석자의 이용술이 따라 역사 해석자의 들러리 역할밖에 못한다.'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떠한 해석을 가미하지 말자'라는 주장은, 그 때에 예수님이 이미 계신다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오히려 탈락시키고 부르짖는 몸부림에 불과하다(요한복음 1:1,15/8:58).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을 겨냥하지 않는 사실은 계시가 아니다. 창세기 2:1-3에 나오는 안식일 계시도 역시 예수님을 미리 보이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12:8). 그런데 안식일이란 시간적 차원이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은 한 인물이요 한 인격체이다.
시간이 어떻게 한 중심인물로 변할 수 있느냐가 안식일 해석의 관권이다. 시간과 인물 사이의 연결 고리는 시간과 인물로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인간의 행위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안식일을 지켜야 했던 구약의 선택민과 예수님과의 관계, 이것으로서 안식일의 의의는 해결된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마가복음 2:27). 그리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안식일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과 안식일을 거룩 되게 지키라는 말 사이에 그 어떤 모순점이 없어야 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고 해서 안식일과 무관한 게 아니다.
안식일이 지향하는 그 실체로 인해 인간은 복을 받게 되며 살림을 받는다. 즉 안식일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창세기 2:1-3에 보면, 그 어떤 뜻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언질이 없었다. 다만 처음 7째날을 안식하고 쉬신 것은 하나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안식하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애초부터 계시하셨다. 즉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체였다. 안식일은 안식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보여주는 계시의 장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안식하신 자신'을 계시하게 된다. 안식의 이유는 창조 완성에 있다. 이 창조 완성 계시는 세상의 죄악을 정죄하고 고발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안식의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하여 나타나셔서 인간과 다시 만난다. 죄악 후, 이 만남은 곧 죽음을 뜻한다.
죄악 후, 안식일은 인간을 부정하고 죽이는 날이다. 나중에 안식일 날 무엇을 하느냐를 보게 되면 이것이 증명된다. 안식의 세계를 훼손했다고 심판해서 죽인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이 그 죽음의 자리를 자기 자리로 삼는다. 안식이 깨어진 세상에서 안식의 하나님께서 자리 잡는 방법이다.
이 방법이 바로 계약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다. 이 민족이 안식일을 귀하게 지켜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국가가 될 즈음이었다(출애굽기 15:26; 16:5,23).
거룩이라는 영역 안에 이스라엘은 초청 받았다.안식일을 같이 지켜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안식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같이 거룩 하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안식일을 보여주는 계시의 나라가 되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계약에 참여 받는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키던 안식일을 자기들도 지켜야 한다. 즉 거룩과 안식의 상태와 창조의 완성 상태를 보여야 할 책임이 지닌 나라가 된다. 심판하여 인간을 죽이는 행위와 또한 살려서 하나님의 안식을 담아내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이 두 가지 작업이 안식일을 통해서 어떻게 구현되나? 우선 노동을 중단하고 휴식에 들어가는 일이다.
여기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노동활동이라는 자체 내의 원칙이 붕괴됨을 맛본다. 만약 법을 무시하고 계속 안식일에도 일을 계속하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이라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린다(출31:14-15; 35:2-3; 민 15:32-36).
결국 힘이 남아 피곤치 않다고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융통성을 주는 날이 아니다. 연약한 자가 다음 주간의 노동을 위해 체력 보강책으로 설정한 사회 복지의 차원이 아니다. 안식일은 분명 인간에게 심판을 퍼부울 수 있는 근거를 주는 날이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안식 자체가 인간 노동과는 무관하게 실현된다는 사실에 부각해야 한다는데 근거가 있다. 뭔가 그 날에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노동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쉬어야 하는 날에서 뭔가 보여야 하는 날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성회이다. 안식일이니깐 성회를 여는게 아니라 반대로 성회를 열어야 하니깐 인간 노동은 중지 되는 날이 안식일로 확대된다.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번째 날이 아닌데도 성회가 열리면 늘 안식일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레위기 23:7-8,24,32,39). 안식날, 그 자체가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로 정해 놓고 그 날에 해야 하는 내용이 주도권이 있다. 즉, 태초에 안식일과 연관있는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어떤 식으로 작용했나를 보이는 것이 진정 안식일의 계약 취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 5:15에 보면,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가 새롭게 나와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이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안식일에 담을 계시가 분명 나온다. '강한 손과 편 팔'이 적용되는 대상이 바로 안식을 기억해야 하는 자들이다. 안식일이 완전히 십계명을 통해서 율법화 되었으면 이제부터 후손들은 안식일을 반복해서 기억해야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 일을 하지 아니하면, 전에 '강한 손과 편 팔'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고 구원도 실패한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강한 손으로 구원에 적용되었는가? 그것은 출애굽 당시로 돌아가 봐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된 자에만 해당된다. 애굽의 장자들은 마지막 재앙 때 다 죽었지만 이스라엘 맏이는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출애굽기 13:1-2).
이 하나님의 것이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대속하는(13:13) 성회를 가지고 유월절이라고 한다(13:3). 하나님에 의해 구사일생한 맏이는 그의 운명 안에 하나님의 큰 권능이 새겨진 독특한 존재가 되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장자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 옛날 유월절 의의를 반복하는데 종사하는 사람이다(민수기 3:12-13).
그런데 이 유월절과 관련해서 '손의 권능'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은 쓰고 있다(출애굽기 13:3).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여 바로의 권능에서 구출된 그 시점의 사건을 재현하는 현장에 나타난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것을 최초의 율법으로 고정해 버린 것이다(출애굽기 13:9).
이 최초의 율법을 지시하는 주체는 바로, 창조의 안식을 고수하시는 '안식의 하나님'인 것을 보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손에서 빠져나온 즉시 최초의 율법인 유월절과 그리고 안식일을 결합시킨다(출애굽기 15:26; 16:4).
광야에서 다른 날은 다 만나가 내려도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는 이유는(출애굽기 16:23),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안식의 땅을 목표로 데려가기 위함이다. 거기로 인도하는 말씀역활이 곧 만나이다(신명기 8:3).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단 약속의 땅에 도착하면 정기적으로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먝추절과 수장절은, 유월절의 의미를 곡식 추수와 결부시킨 축제이다. 즉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이 수확이라는 형태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곡식 낟알 하나라도 순전히 안식의 하나님의 손으로 얻어진 것이지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노력이나 의로움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고백은 성회 때의 제사로써 보여진다. 수확된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지만 행사의 핵심은 제사이다. 제사는 출애굽 사건의 연속이다.
기존의 삶은 죽어야 되고 그래서 죽었던 삶은 다시 구원을 보장받는 현장이 제단 위이다. 죽음은 흠없는 희생적 생명에 의해서 교체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생명은 더 이상 자기 생명이 아니라 희생물의 생명이다. 출애굽의 의의를 진정으로 되살리는 것은 이것뿐이다. 죽었기에 죄책이 없어진 것이고 희생물의 생명으로 다시 살았기에 그 사랑의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요구받는 것도 제사 현장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며 거룩이다. 하나님이 진정 요구하는 것은 "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신명기 10:12).
이것이 곧 육체의 할례를 받은 약속의 후손에게만 요구하는 마음의 할례이다(신명기 30:6/10:16).마음의 할례까지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와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 하시며 나그네를 사랑 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기 10:17-19).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시는 하나님이 곧 '안식의 하나님'이신 증거가, 안식년 그리고 희년(7×7+1)이 되면 이들 땅을 잃고 다니는 자에게 하나님의 지시로 땅에 제공된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권능의 손과 편 팔'을 제공하신 '안식의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은혜가 넘치는 땅으로 전환시켜 계속 안식케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신다.
희년이란 단순히 차례 차례 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서열 중의 하나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 해는,지난 49년 동안의 모든 인간의 활동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의미를 지닌 대치되는 특별한 한 해이다. 동시에 그 인간세상의 죄의 얼룩에서 초월하는 해이기도 하다. 49년과 50년째 해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있다.
일종의 시간차원의 홍해이다. 이 '건넘'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바로 여기에 희년의 의의가 있다. 초창기의 해방의 능력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것이다. 자연에서 발생되는 기적, 이상의 기적이 시간대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나중에 인간 그 자체가 변화되는 기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율법적 제사가 단순히 동물 희생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는 이유는, 먼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다. 율법 제사의 원형이다. 이삭이 할례 언약의 최초의 시작되는 인물로서 최초로 8살 때 할례 받았다.
그런데 그 약속의 인물이 제물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지상에 있는 비약속의 인물에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이 천상의 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의가 없다는 것이다. 지상의 육체의 흐름에서 이탈하여 약속의 의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할례를 한 것이다.
이 할례의 약속이 국가화 된 것이 이스라엘이다(수 5:2). 그런데 이 나라에 율법도 가미되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악은 그 율법에 합류되기 시작한다. 율법의 기능은, 인간의 죄를 포함시켜 그 정도를 드러내는 스폰지이다. 겉으로 보면 딱딱한 문자에 매인 법이지만 속을 분해하면 희생과 죄악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하나가 깊어지면 다른 하나도 깊어진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해진다. 이 깊어진 은혜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여기에 이 나라의 제사의 의의가 비로소 드러난다. 율법 속의 제사가 율법 안으로 흡수된 죄를 씻는 것이다. 그 근거는, 할례로서 의에 참여했다는 점에 있다. 이 참여는 옛날 할례자 이삭을 제물이 된 그 제사 원형에로의 참여를 말한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계속 거룩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아벨이나 아브라함에서 원래 번제로만 드려지던 제사가 시내산 밑에서 화목제가 첨부된다(24:5).이는 약속의 땅에 들어와 하나님께 경배함으로써 제사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화목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죽지 않게 된 상태를 뜻한다(사사기 6:24).
번제와 화목제로 된 제사가 레위기에 접어들면 그 중간에 속죄제가 가입된다. 순서상 속죄제부터 먼저 드린다(레위기 8:14,18) 그리고 번제물 위에 화목제를 드린다(레위기 3:5). 그것은 출애굽기 32장을 통해 이미 이스라엘 자체에 어떤 의가 없음을 파악되었기 때문에 죄 씻는 과정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원만한 번제와 화목제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복이란, 바로 하나님의 자리인 성소나 성전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표현했을 때, 그것을 인정한다는 증거로 오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의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복이 계속 오는 근거를 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 작용하게 된 원인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구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함께 계시는 '안식의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먼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출애굽기 35:2). 안식일은 최초의 율법인 유월절의 시간적 배경에 불과하다.
안식일이 제사하는 날이라는 것은 성전이 세워진 뒤에도 마찬가지이다.
안식일에 성전은 분주하다(역대상 23:31; 역대하 2:4; 8:13; 31:3; 느헤미야 9:14; 10:33; 13:15-22; 예레미야 17:21-27).
제사가 지정된 한 장소에서 드려지면서 성전 간수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만약 성전이 파괴당하면 여호와께서 지상의 국가 이스라엘과 더 이상 계약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국가 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히 자국 뿐 아니라 세계를 향한 복의 근거지의 상실이라는 차원에서 전 세계의 멸망이다(이사야 13장-34장; 에스겔 25장-35장). 이것이 종말이다. 종말에는 어느 나라이든 다윗언약에 의해 징벌과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서 하늘의 영원한 왕만을 섬기는 참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발생되는데 하늘나라는 이들만을 영원한 백성으로 삼는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성취시키게 된다. 이렇듯 종말의 심판주로 오실 메시야의 활동은 반드시 두 가지 사역을 담당하게 된다.
하나는 현 모든 인류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 작업의 와중에서 인류의 역사와 상관없이 영원성의 지닌 나라의 백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들 남아 있는 자기 백성들은, 메시야가 자기와의 맺은 새 언약을 근거로 구원받게 된다.
메시야가 세우게 되는 새 언약은 필히 구 언약의 완성체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구원의 의 확보에는 지장이 없게 된다. 구 언약을 완성한다는 것은 안식일 계약의 완성도 포함된다. 어떤 식으로 안식일 계약이 완성될까? 그것은 제사 계약의 완성시키면 그 배경이 되는 안식일 계약도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제사가 완성되면 영원성을 갖게 된다(히브리서 8:24).
제사 계약이 완성되고 나면 더 이상 성전과 안식일이 불필요하게 된다. 성전이 헐리게 되면(요한복음 2:19), 성전과 한 조를 이루어 제사에 참여했던 레위지파나 제사장이나 안식일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제사 행사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제사의 영원한 성취를 위하여 성전의 거룩성과 안식일의 거룩성을 유지하겠다고 예언했다(에스겔 20:20/예레미야 17:22/이사야 56:6). 영원성이란 시간의 관계에서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시간과 관계를 끊었다는 말은 피조세계에 더 이상 얶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간이란 피조세계의 움직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그 동안 율법에 기초해서 수고한 모든 종교적 행태와 노력은 이제 지나간 날에나 적용되는 것으로서 다 낡아져 사라졌다(히브리서 8:13).
성전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고 기타 모든 율법도 하나님이 신이 임해야 가능하다(에스겔 36:26).그 동안 지상에서 남겨졌던 모든 율법들은 이제는 부서져야 될 모형들이다(히브리서 8:5). 하늘에 존재하신 분이 왔기 때문이다.
영원한 상태를 위해 영원의 나라에 계신 분이 지상에 투입된다. 다니엘 7:9-14에 보면,'인자 같은 이'가 영원한 나라를 몰고 이 땅에 오신다고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부른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옛 언약을 영원한 성취 상태로 만드는 것은 제사 제도를 완성하면 된다. 모세율법의 중심은 제사였다. 제사의 완성은, 제물과 제사장이 영원하면 된다.
예수님이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제물이 되시고 또 영원한 제사장 되셨다(히브리서 7:11-25/9:23-26).제사가 완성되니 의가 생겨났고 그 의에 기초해서 영생의 복을 받는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진정한 완성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보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완성된다. 또 다시 사람을 살리는 특정 날이 필요 없다. 마태복음 12:5-9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 하였느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노동하는 것이 안식법에 어긋나느냐 하는 것이다. 어긋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그 날 노동을 중지하는 것은, 제사장의 노동의 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완성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는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 그 자체가 아니라 자비이다.
자비가 모든 제사의 완성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안식일 제도를 통해서 구원 얻고자 한 그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자비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즉 안식일의 지향점이다. 갈라디아서 4:10에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 헛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을 헛되게 하느냐?
특정 날을 성수 한다면서 다른 날과 차이 난다고 가르치는 그 율법적 가르침이 복음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행위가 복음을 깨고 있다. 주일 성수를 널리 전하면 전할수록 사람들이 사이에서 복음은 점점 사라진다. 왜 사도바울은 특정 날 준수를 복음을 허사로 만드는 이단적 행위로 간주하는가?
그것은 특정 날과 절기와 해의 준수가 시간에 속한 법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가 선택한 인간과 상대해서 의를 추적하던 그런 시절의 유물이라는 말이다. 특정 날을 지키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이 뭘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발상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허사로 간주하고 뒤로 빼돌리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들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요(요한복음 17:1-5)
하나님의 일이란, 아들을 믿는 것이다(요한복음 6:29). 이 아들이 이미 완성하신 일에 감사하고 반응하면 되지,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첨가해야 비로소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복음을 방해하는 짓이다. 인간들이 무엇을 성수해서 의가 된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야 했는가! 골로새서 2:16에 보면,"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되어 있다. 폄론이나 나쁘게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안식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성도에게 비난이 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특정날 안식일은 비난거리가 안 되는데 그 자리에 주일이라는 특정 날을 집어넣으면 비난해도 좋더란 말인가? 특정 날인 주일이라는 날을 성수 안했다고 누가 함부로 성도를 폄론하나? 무슨 자격으로? 십자가 지신 분께서도 비난받지 않도록 당부하셨는데 누가 주님께 용서받은 형제를 비난하나? 도대체 주님보다 더 센 사람이 누구인가?
사도의 복음의 진수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방문했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의를 다 이루었다는 복음의 완성도와 관련 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의 완성도에 흠집을 내는 자는 저주받는다(갈라디아서 1:8). 구원은 선물이지 행함의 대가 아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는 없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어찌 인간들의 꾐에 빠질 수 있는가!(갈라디아서 3:1).
그러면 어떻게 해서 아직도 주일 성수에 매달려 구원받고자 하는가? 그것은 '역사'라는 하는 인간의 철학적 허구성이 진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기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대기권 모양 희미하게 둘러치고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하나님 만나려면 시간이라는 차원을 돌파해야 된다고 믿고들 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소위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란 허구이다. 오직 실제 하는 것은 인간과 그리고 그들이 저질러 놓은 문화와 문명뿐이다. 인류의 역사, 구속사라는 표현은, 성경 자체를 계시로 간주하지 않고 역사를 계시로 봐서 그 역사라는 밑받침 위에 떨어진 계시의 파편들을 모아 성경 대신 계시로 간주하려는 계몽주의 사고가 깔려 있다.
역사 자체가 허구이니 그런 계시관도 철학의 일종이다. 과연 역사가 계시가 제대로 될 수 있을까? 계시의 객관성을 보장받기 위해 역사에 대해 관심이 높아갔다. 그런데 사실은 과거의 유물들의 변천 과정이다. 그 역사 속에서 계시를 찾기 위한 작업에서 제일 큰 골치 거리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점이다. 우연은 계시의 일관성을 망치는 성질이다. 우연만 계속된다면 미래가 예측되지 못한다. 고정된 미래가 보장받지 못한다.
그래서 역사 자체가 계시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필연]만으로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 흔히 [우연]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도 모두 [필연]으로 통역되어져야 한다. 우연을 필연으로 고치는 작업, 이 작업은 정말 대단한 논리의 비약이 투입되는 작업이다. 이것은 [변화] 속에서 [불변]을 정립하는 작업이며 [운동]에서 [궁극적 존재]를 파악해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둘 사이에 중간자를 삽입 시켜 봤자 역시 어정쩡한 위치만 점할 뿐이다.
쉴새없이 총총히 교각들을 심어보지만 교각과 교각 사이를 이어주는 필연은 생기지 않는다. 임시조치로 걸쳐놓은 허구의 구름다리는 오히려 성령님의 공격의 표적이 될 뿐이다. 과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얼굴을 내밀고 있을까?
역사를 올바르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탐구자 자체가 역사로부터 초연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객관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가 역사로부터 초연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사의 인물이다. 역사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역사로부터 영향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이탈하지 못한 존재가 역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이 요구된다.
첫째는, 역사와 무관한 순수한 인간의 본질을 역사 속에서 하나 찾아내어야 하고 둘째는, 그렇게 분리된 순수 객관화된 인간을 다시 역사 속에 집어넣어 그 중에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골라내는 작업에 관심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와 무관한 순수한 인간을 과연 역사 안에 있는 자가 알아 모실 수 있을까?
이미 인간들은 역사의 포장 속에 갇혀 있는 역사의 인물들이 되고 말았기에 무엇이든지 역사를 통해서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역사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있다.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을 찾으려 왔지 역사밖에 초월해 있는 인간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 의견으로 인간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간이 만남은 우정의 만남이 아니라 심판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협조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가리워지지만 그 심판을 믿음으로 겸허하게 수용하려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믿음이라는 행위는, 자기 이해를 스스로 파기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을-특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포함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직면해 보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가차 없이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에 강조를 두는 쪽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은 수용하지만 구속이 역사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구속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 주장하기를, 역사란 원과 결과의 사슬이다.
그러기에 따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더라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역사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조립하는 행위이므로 신앙의 설 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양쪽의 의견이 상반되는 것 같이 보인다. 구속사를 주창하는 쪽과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 쪽이 서로 반대 의견 때문에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구속사 쪽은 구속사와는 별도로 세속 역사를 내세운다. 걷기에 비해 구속사를 인정하지 않는 쪽도 수평적인 역사와 수직적인 역사를 들먹인다. 그리고 두개를 분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현대 신학자들이 역사의 의미를 꼭 둘로 나누어야지 만 이야기가 되는 이유가 무얼까? 물론 역사를 하나로 해서 구속사와 세속 역사를 동일시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있어 역사의 의미란,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최종 계시로서의 의미가 서로 다른 두 차원으로 분리된다.
역사 속에서 서로 대립되는 두개의 실체를 끄집어내어야 역사 속에서 계시를 설명할 수 있다는 발상은, 신학으로 구출(구원)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바램에서이다. 구출이란 구출되어야 될 상대와 상황이 먼저 있으며 그 다음에 구출되고 난 뒤의 누릴 새로운 상황이 있는데, 전에 누렸던 상황과 필시 달라야 한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계시를 표현하면서 가지는 딜레마는, 구원에 치중해서 역사를 보면 필연적으로 구원이 바탕이 되는 현 역사 전부를 부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직 신앙하는 자에게만 가져다주는 제대로 된 세상을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정죄해 버린 현 역사에서 어떤 가능성이나 가치를 새삼스럽게 추스려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물론 새 세상의 모습을 알려주는 계시가, 곧 처분해야 될 현 세계에 미리 들어와 있다. 그러니 처분한다고 다 처분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계시가 이 저주받은 세계에 떨어지는가?
저주의 대상인 세계 속에 있는 이미 들어있는 인간도 저주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 인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소개할 계시도, 그들이 뭔가 알고 있고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을 전적 거부한다. 그들의 이해도를 능가할 뿐 아니라 분명 이해도를 능가하는 무엇이어야 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이미 체험하고 경험되고 이해한 적이 있는 세계를 소개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는 아니다.
단지 과거 역사 속의 세계를 반복해서 환상화 시킨 것뿐이다. 계속 양편의 입장을 들어보자. 구속사를 반대하는 근본적인 입장은, 인간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기껏해야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자기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가 무엇이냐 보다 역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그대는 누구냐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결국 역사는 인간학에 머물고 만다. 역사를 알기 전에 인간을 알아야 하고 인간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과 만나고 나니 역사에 대한 중요성보다 지금 영원한 실체와 접합하게 된 사실이 더욱 치중한다. 세상의 역사 연구는 항상 뒷북치다가 볼 일 다 본다.
지나온 것을 현실에 맞게 각색이나 잘하고 해석해 하고들 있지만 문제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란, 과거의 의해 규정된 역사이다. 과거에 매이고 과거의 연속선 상에 있기 때문에 뭔가 새로움을 허용되지 않는 철학이다.
거기에 비해 신앙이란 미래를 위하여 과거에 얶매여 있는 역사를 결별하고, 과거에 의해 객관화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하여 결단 내리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미래를 앞당겨 뜻에서 초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역사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원한 현재에 이미 참여된 것을 뜻하기 때문에 아직도 역사 운운하는 것은, 오직 신앙 안에서만 밝혀지는 진리를 인간의 자기 이해 속에서 끄집어내려는 불신앙적인 소치이라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인간 속에는 신앙을 유발시킬 그 어떤 요소로 미리 들어가 있지 않다.
종말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생기며 그 인간의 만남이란, 인간이 이해하는 역사의 관념이 정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계는 현 역사 속에서 객관성을 품을 그런 입장이 못된다. 그런데 구원받고 난 뒤에 또 구속사라는 역사관을 들먹일 수 있단 말인가. 역사 자체도 인간의 이해에 불과하다면 구속사라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을 옛 역사관이란 도형 위에서 그림을 그대로 베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 때 그 그림은 밑그림과 채색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동일한 실체가 못된다. 이와 같이 비 구속사쪽은 구속사 쪽의 거짓됨을 비난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구속사 쪽은 다음과 같이 공격하게 된다.
복음에는 뭔가 내용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다시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일관성 있고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계획을 개인의 구원과 신앙을 위한 근거로만 압축시켜 주장하는 것은, 입구만 소개하고 집안의 구조를 설명하지 않는 게으른 청지기와 같다는 것이다. 계시론이 인간학으로 전환되고 나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역사 속에서 실존하는 인간됨을 완벽하게 분석해 내어주었느냐 하는 점이다. 정죄받는 현 세계가 왜 나쁜지 그 자체에서 해명해 내어주지 못하고 단지 새 세계와 비교해서 폐기되어야 한다고 결정된 선에서만 소개하고 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를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옛 세계와 비교해서 해명 불가능한 세계라는 정도에 그쳐서야 되겠는가. 이 사이에 인간이 놓여 있다. 이 두개의 세계를 알자면 그 속에서 다리 역할 하는 인간을 알아야한다.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켜 자기 안에 신세계를 건설하고 또한 그 세계관으로 외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 영향이란 끊임없이 외부 세계와 접촉해서 자기 내부의 본능을 만족시키려 하는데서 발생되는 영향이다. 그러면 이러한 충동은 어디서 왔는가? 이는 필시 인간이 인간이기 전에 인간 이외의 외부 세계와 연결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부 세계는 분명 인간들의 주관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데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객관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자기 한계를 표현한 것밖에 안 된다 할지라도 어떤 객관과의 만남에서 주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그 상황에서 새로운 주관이 주어졌을 때 그 내용을 형성시키는 객관이 따로 있을 게 아닌가? 만약 객관을 순수한 객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주관의 노예가 되어있다면 그 객관이 어떻게 제 구실을 다했다고 할 수 있나? 이럴 경우에 객관 쪽에서 보다 충분한 객관으로 인간에게 나타내지 못한 잘못이 있다.
강한 객관의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관의 노예로부터 구원받은 그 사건들이 일관성 가지고 있다면 이 또한 위대한 객관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이 일관성 있는 증거들의 나열을 구속사라 했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라고 구속사 쪽은 말하고 있다.
문제는 양쪽 다 계시를 인간의 이해 측면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계시론이 아니라 신앙하는 인간론으로 신학의 기조를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성령'이라는 용어가 들어갈 틈을 주질 않는다.
이 언급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써 '주일 성수'라는 발상을 하게 된 배경을 말해준다. 즉 교회를 인간들이 이해하는 인간교로 전환시키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인간들이 이해하는 방식의 교리 창조를 추진해서 주일 성수 율법이 튀어나온 것이다. 즉 성령이 하실 일을 인간들이 율법을 지켜내어서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신앙을 강조하는 쪽은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역사로부터 탈출하는 인간이 생각해낸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구속사 쪽은 인간의 실존을,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역사와 대화하면서 구성되어 간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 동안 인간이, 인간 바깥에 설정해 놓은 우상과 대화한 것이다.
그 우상이란,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발전시켜 온 요령과 전통과 경험의 집결체로 잘 다듬어진 종교로서 이 종교의 계시는 다름 아닌 전통이 된다. 즉 성경을 신앙 전통의 집합으로 보는 입장이 구속사적인 입장이다.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가톨릭이나 또한 전통보다 성경을 우선한다고 주창하고 뛰쳐나오면서 그 성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새 전통을 만들려는 개신교나 똑같다. 양쪽 다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질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를 빙자해서 자기 체제 다지기에 바쁘다. 그 체제 속에는 복음이라 불리는 인간들의 전통만 들어 있을 뿐이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만을 보이는 목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 인간들의 피눈물나는 종교적 투쟁과 노고를 널리 기념하고 영원히 기리는 목적에 부합되도록 전통으로 전환해 버린 내용일 뿐이다. 이로써 기독교는 가톨릭과 경쟁적으로 인간교가 되어 간다.
종교와 법은 집단생활에 있어서의 물려받은 유산이다. 인간 사회는 공통된 목적의식과 사회질서 및 사회 정의를 가지려고 한다. 개인은 그 사회와 환경에 대한 친화력을 가지려고 한다. 이 친화력이 공식적 종교와 공식적 법 체제를 형성하면서 선과 악의 표준으로 사용된다. 이것이 문화적 전통이다. 이 전통 가운데 하나가 '주일 성수' 발상이다.
성경에서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될 좋은 전통을 찾고자 하는 정신으로 성경을 탐구한 결과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게 함으로서 뭔가 전통성 있는 초대 교회와 연결 고리를 가질 수 있지 않는 게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통적 교회라면 오늘날 교회가 초대 교회의 좋은(?) 전통 속에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들이 밑에 깔려있다. 즉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전통의 중요성이다.
역사에 관심 둔다는 것 자체가 성경 자체에서 마음이 떠났다는 말이다. 성경만 가지고서는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어 확신이 서지 않으니 역사를 통해서 확실히 해결책을 찾겠다는 심보이다. 성경만이 계시가 아니라 역사도 의미 있는 계시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즉 성경은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의미를 아는 것이기에 이 성경이라는 계시를, 역사라는 계시로 번역해 줌으로서 누구든지 역사를 체감하는 자에게 설득을 하게 하는 의향을 보인다.
이 수법이 성령님의 사역을 욕되게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대로 신앙있는 신학자라면 성령 사역의 이질성 고스란히 보여야 한다. 이것만이 성령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역사 안에서 참된 성도와 거짓된 성도를 자기네들이 한 번 골라 보겠다는 것이다. 인류가 역사를 가짐으로 드디어 인간의 우상성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국가가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본격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거기에 온갖 자신들의 노고와 땀의 결실들이 영광을 받기 위해 삽입되어 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본격적인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는 패망의 기록이며 죄의 일기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들은 자랑한다. 선택된 민족이라고.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나타나겠고 이미 한 일이 후에도 반복된다(전도서 1:9). 역사가 아무리 발전해도 속성과 질은 해 아래서 변함이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쯤 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 하셨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사도행전 1:7).
그리고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다고 하셨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이 후에 역사가 사라진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역사가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꼭 안아 쥘려고 하는 전통 고수주의자들의 제일 큰 문제점은, 전통 속에 여러 가지 신학적 이슈들을 한데 모아 조합해서 이상적인 신학 체계를 확립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있다.
마치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도 같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누가복음 5:39). 그들은, 하나님, 예수님, 교회, 성례 의식, 성령, 기독교 윤리, 계시, 신앙고백서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교회를 인간들 손으로 이어나가는데 필요한 요건들로 여기고 구멍가게에 구색 맞추기 위해서 진열된 상품처럼 선반 위에 동일하게 올려놓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전통 속에만 들어있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론과 교회론을 다루고는 있지만 실제로 여전히 계셔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 복종하려 하질 않는다. 그들은 마치 자기 손에 그런 가치들이 놓여 있다고 여기고 후대를 위하여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존폐 여부가 자기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사고하고 실천에 옮긴다.
교회란 어쨌든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니 역사란, 권위와 전통의 허구적 대치물이 된다. 시간이라는 작업대 위에서 성경과 인간의 열심이라는 공작 기구를 동원해서 예쁘장한 교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소망한다.
이런 고정관념으로 인해 살아 계신 하나님 대신, 하나님이 역사 속에 남긴다고 여겨지는 역사를 믿음의 내용으로 삼으려고 한다. 믿어야 될 분을 믿지 않고 믿어야 될 분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든다.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기보다는, 믿음 없음을 용납하고 허용해 달라는 식으로 나아간다. 그 믿음 없음을 대체해서 역사와 전통 탐구와 형식 세우기에 몰두한다. 그 역사 속을 파헤쳐서 민중들이 납득하고 믿을만한 것을 따로 걸려내려 한다.
그래서 민중들로 하여금 주님의 살아계심 대신 교회 내에서 보여지는 활동을 믿기를 종용한다. 교회 내의 조직체의 활동을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의 일로 간주시킨다. 그리고 세상일을 상대적으로 비속한 일도 구분하려 한다. 결국 노리는 것은 모든 이가 이런 작업에 동조해서 자기들과 함께 믿음 없는 대열에 합류되고 동화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보다 뭘 만들어내라고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은 인간의 시간계를 무시해 버리고 그 구조를 해체해 버린다. 얼마동안 무엇을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나의 지시에 따르고 있느냐를 물으신다. 하나님이 죽이시는 시간계를 인간들이 되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역사를 회생시켜 보았자 거기에는 인위적인 권위와 전통만 수면에 올라 올 뿐이다. 이처럼, 종말에 와서 역사는 성령과 경쟁관계에 놓인다.
칼빈과 루터는 훌륭하고 그들의 적은 나쁜 자들이라 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가? 역사 속의 유명세가 진리를 대신할 수 있다.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줌의 재로 사라져 간 미미한 민중들 속에 칼빈이나 루터 이상으로 신앙대로 살았던 사람이 정말 존재한다고 한다면 칼빈과 루터의 부각은 신앙 기준을 흔들리게 하는 요소일 수도 있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영웅 위주이며 따라서 이 영웅의 빛이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그 그늘에 숨겨 들어온 죄에 대해서는 눈이 감겨 보이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자체로 성경에 의해 판단 받아야 하는 죄의 사슬이며 고리이다. 역사가 죄의 고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은혜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선의 연결체는 아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자체적으로 선이라 평하는 것은 은혜를 가장 크게 모독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의 연결 속에서 무슨 토대로 진리를 추려낼 수 있는가? 은혜라든지 죄라든지 믿음이라든지 선이라는 것을 역사의 탐구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그냥 은혜를 확인해 줄 뿐이다.
교회는 인간이 성경과 호흡을 맞추어가며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움직이는 성령님의 호흡으로만 등장된다. 가톨릭이 달리 생겨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이 과거의 유물과 문화를 모방함으로써 계속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로 남겠다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들이다.
동시에 예수님이 현재의 주되심을 망각하고 과거의 주되심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결과로 볼 수 있다.이들은 또한 신약이나 구약에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모른다. 성경을 상고하여 예수님을 알아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사명을(요한복음 20:30-31; 5:39) 그들을 기피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종교 조직체가 자동적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천국에 보낼 수 있을까 하는데 있다. 어쩌면 이렇게 유대교와 똑같은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도들이나 교회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이려고 애썼다. 주되심을 보이기 위해 주일 성수라는 율법이나 교회법이나 전통을 제조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 안식일 문화를 의식하면서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에 주로 모였다(사도행전 13:14,27,42,44; 15:21; 16:13; 17:2). 그 이유는, 그 때 제일 많이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며 복음을 많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안식일 그날에만 모인 것이 아니라 안식일 후 그 다음날에도 모였다(사도행전 20:7).
이는 그 당시 안식일 문화를 의식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그 당시 안식일의 의의가 무어가? 특정한 한날의 가치가 평범한 다른 날보다 능가하고 특별나다는 뜻이다. 이것을 바로 초대 교회는 이것을 부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자주 모였다(사도행전 2:46).
도대체 주일 성수라는 율법이 나올 구석이 전혀 없다. 아니, 날마다 모이는 사람들을 보고 날마다 모이지 말고 예수님이 부활을 기념에서 안식 후 첫날에만 모이라고 사도가 당부라도 했단 말인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신 사도가(히브리서 10:25) 일부러 안식 후 첫날만 골라 모이는 사람들이 되기를 유도라도 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주일 성수라는 발상이 어디서 나온 주의인가?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여주는 멋진 계시적 날이라고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똑같이 초대 성도들이, 안식 후 첫날이 예수님의 부활을 날이라는 보여 주는 멋진 계시적 날이라면 왜 그들이 처음부터 십계명이라도 만들어서 일부러 라도 안식 후 첫날을 고집하지 않았겠는가?
처음 있었던 사도 회의 때 구약의 안식일 계약처럼 중요한 사항을 거론조차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사도행전 15:20) 아직 그만한 수준 높은 계시를 은사로 안 받아서가 아니라 주님 자체가 시간을 초월하고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분명히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18:20).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 모여든 모임 그 자체이지 날이 아니다. 안식 후 첫날에 안 모이고 화요일 모인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가? 수요 기도회가 주일날 낮 예배 보다 못한 집회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있는가? 주일날에는 예수님이 직접 함께 하시고 수요 기도회에는 예수님 대신 천사가 파견되는가?
사도가 고린도교회에게 당부하기를 매주일 첫날에 갈 터이니 연보 마련하라는 것이(고린도전서 16:2) 사도가 안식일 대신 주일 지키라는 명령으로 보는가? 매주일 첫날은 그냥 매주일 첫날이다.
구약 때도 매주일 첫날은 있었고 이 세상 생겨날 때부터 매주일 첫날이 있었었다. 이게 무어 거리 이상한 일인가? 사도가 사무적으로 일하면서 매주일 첫날이 편리해서 그날 가겠다는 것이, 그 날만 모이라는 율법으로 꼭 변질되어야 하는가? 고린도교회가 매주일 첫날에만 모이고 다른 날에는 중요한 날이 아니라서 안 모였다는 무슨 증거가 성경에 나오는가?
매주일 첫날에 모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다른 날에도 정기적으로 모인 것은 부정하는 근거라도 된단 말인가? 오히려 반대이다. 로마서 14:5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이 말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언급해서 한 것이다(14:1).얼마나 믿음이 연약해서면 특정날에 의미를 두고자 할까.
사도 바울을 이런 연약한 믿음을 신앙의 표준으로 장려하지 않는다. 날마다 떡을 뗀다는(사도행전 2:46)이 초대 교회 모습이 꼭 도중하차해야 될 신학적인 근거가 있는가? 왜 오늘날 교회가 초대 교회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날마다 모이는 이 모습을 법으로 정해서 '날마다 성수'를 본받을 생각 안하고 하필이면 꼭 안식 후 첫날만 고집하고 있는가?
처음에는 자주 모였는데 나중에는 안식 후 첫날 즉 주님의 부활한 날을 기념한 모임으로 정착되었다는 주장을 흔히 하고 있는데, 정말 세월이 지나서 그런 일이 있다면 과연 이게 잘한 일인가? 본을 봐도 잘한 것을 본 받아야지, 사도의 소원과는 달리 어긋나게 점차 뒤로 낙후되는 신앙 태도를 꼭 본받아야 옳은가? 뒤로 물러서는 자는 침륜에 빠진다고 하는데(히브리서 10:38) 현대 교회를 모두 침륜에 빠뜨리는 쪽으로 꼭 법을 정하는 이유가 뭔가?
신약 성경에서 구약 성경에서나 주의 날이란 한결같이 주님이 주되심의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날이다(스바냐 1:14; 2:2; 아모스 5:18; 요엘 2:11; 말라기 3:2; 이사야 13:6,9; 63:4; 예레미야46:10; 에스겔 30:3; 39:8).
신약 성경에는 두 번이 나오는데 우선 베드로후서 3:8-10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온다는 말씀은, 주의 날이 시간에 예속되는 날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표현 방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천년이 하루 같다고 2000년이 이틀에 해당된다는 말이 아니라 지상의 시간 계산과 상관없이 주의 날이 이 세상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의 날이란, '날'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주되심'에 강조점을 가지면서 내용을 주도한다. 즉 주께서 심판주로 나타나시는 그 사건이 지상의 날을 초월하는 주의 날이 된다.
주의 날이 결코 부활 기념일과 관련있는 게 아님이 누가복음 17:22에 잘 나와 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인자의 날', 즉 주의 날은 주님께서 번개 같이 나타나서 이 세대를 버리시는 한 날이다. '주일'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 '주의 날'이고 '인자의 날'이다. 곧 심판주로 계시하는 날이다.
'주일'이라는 것은 부활 기념일로 인간들이 조작한 날이다.7일 단위로 시간을 인식하던 유대교적 전통에다 기독교의 특징을 부각하기 위해 부활 기념일을 심은 것이다. 사도 이후 시대부터 생긴 관행에 불과한 것을 마치 계시처럼 사용한 것은, 조직의 전통 유지가 마치 복음 팽창의 사활을 결정하는 것처럼 과민한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10의 표현도 이와 같은 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한 날을 개인적으로 가졌었다. 곧 그에게 주의 날이 이미 온 것이다. 매주 첫날 같으면 '안식 후 첫날', 혹은 '주일'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날에 나타난 예수님은, 구약 때 예언된 대로의 여호와의 날에나 나타나실 바로 그 주님이었다. 그는 심판주를 본 것이다. 전에 나사렛 동네에 함께 다녔던 그런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곧 '인자의 날'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 금띠를 띠고 눈은 불꽃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오른 손에 7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로 날 선 검이 나왔고 얼굴은 해같이 빛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이미 다니엘도 보았는데 (다니엘 10:5-9) 그날은 세상 나라를 전쟁을 통해서 심판하는 주의 모습이었다. 사도 요한도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그분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사도 요한은 그날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분명 주의 날이었다.즉 주님께서 자기에게 특별히 심판 주로 계시한 날이었다.
구약의 예언서와 연관 지우면서 계시록을 이해하자면 용어 자체도 구약에서의 의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요
한계시록의 기록 연대가 이미 후대이기 때문에 온 천지의 교회들이 거의 다 안식일 대신 주의 날을 지키고 있었는데 마침 사도 요한이 그 주의 날에 계시를 보게 되었다는 주장은, 요한계시록의 구약 용어를 사용하는 계시록의 취지를 무시한 처사이고 또한 그러한 주장이 정경성을 상실한 불투명한 역사 문헌에 의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묵시와 역사도 구분 못하는 성경 이해의 원인은 구약이 제대로 정리되어 않기 때문이다. 구약이 주님이 오심으로 구약이 폐지해야 하는(히브리서 10:9) 이유는, 인간이 주변에 있는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이나 교회의 세우심도 인간의 교회법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하게 된다.육이 구원받는 것은 영이 와야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한복음 3:5-8). 영은 마치 바람 같아서 임의로 불어 사람을 건지신다. 만약 어떤 설교자는 본인부터 진정으로 오직 성령의 오심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율법에 얶매이게 하질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할 것이다. 모든 성경 구절을 가지고서도 오직 예수님을 보일 것이다. 결코 성경 구절로 새삼스럽게 그럴 사한 교회 전통이나 조직체 자체에 관심 갖도록 유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교회법이나 조직체가 사람을 건지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구약의 안식일 계약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오늘날 주일 성수라는 율법 수립을 정당화하는 들러리로 이용되는가? 그것은 민중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천국 가는 방법론을 제시하라 한다. 그들은 아담 노선이다.
그래서 율법과 규칙밖에 모른다. 천국도 어떤 규칙을 준수함으로서 가는 걸로 알고 있다. 교회에서 시킨 대로 다 할 테니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이런 천국 가는 규칙을 제시하지 아니하면 하나 둘씩 민중들은 교회에 나오지를 않는다.
목회자들이, 목회적 차원에서(?) 이들 민중들을 붙잡기 위한 방도에 나선다. 이 방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도들 시대가 지나자마자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을 붙들려고 하니 일단 복음과는 헤어져야 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1:10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반대급부로 제공해야 한다.
사람을 좋게 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엄포도 이들 목회자들에게는 관심 없다. 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한번 온 사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걸림돌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도 이들 목회자들에게 소용없다. 겉으로 이들의 주장은 한결 같이 하나뿐이다. "사람을 구원하려면 일단 사람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는 당장 복음을 수용하는 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형식적인 교인들도 있다.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뜻은 자주 모이고 날마다 모이는 것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신앙생활에 부담을 느끼고 두 번 다시 교회 오기를 꺼려할 수가 있다.
그렇데 되면 그들은 복음들을 기회를 놓치기 때문에 지옥 가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해서 신앙이 약한 사람과 초보 교인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일단 교육적으로 주일날 예배 참석한 것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라고 부축일 필요가 있다. 물론 진리를 겨냥한 교육적 차원에서의 교인 관리이다.
만약 주일 성수라는 규칙마저 세우지 아니하면 이들은 제멋 대로며 그들의 욕망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세상 생활에 젖으면서도 죽어서는 좋은데 갈려는 것이다. 그냥 믿음으로 천국 간다고 하면 이들은 요령을 피우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르니 목회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매를 맞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입장에서라도 주일 성수라는 규칙을 세웠다.
어쨌든 주일날은 옛날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는 그러한 단호한 신앙적 결단을 보이게 하므로 자기 신앙체계를 도움이 되리라 본다. 목적이 이렇듯 좋으니 하나님도 무척 기뻐하실 줄로 안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의 힘으로 해내겠다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가복음 10:27에 나오는 "사람으로 할 수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도발행위이다. 목회자 자신이 탐욕에 무장된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가짜 하나님을 창안하고 제조한 것이다. 실제로 있지도 않는 가짜 하나님을 이런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 열심히 한평생 동안 전도(?)하고 있다.
마가복음 7:6-9에 보면 이런 자들에게 해당되는 주님의 말씀이 나온다."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소위 교육상 또는 목회적 차원이라는 수완을 동원하여 사람을 다루려는 심보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삼아서 자기 손에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의 유전과 규칙과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일반 신앙 제조 기술자들이 이 사랑을 훼손하고 무시하고 방해하고 냉대하고 있으면서 그 자리에 법으로 교체해서 집어넣는다.
주일 성수가 무언가? 일요일 낮에 집회가 있으니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이야기는 사랑이지 주일 성수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즉 집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다. 날과 상관없이. 만약 수요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참석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수요일 성수'라는 율법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이 다 지켜서 메울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늘 죄이고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안다. 이럴 때 십자가의 사랑이 더욱더 부각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러나 '주일 성수'하시오 라고 하면 이것은 율법이 되어서 일요일날 예배 참석하는 자는 죄를 인지할 수 없다. 자기가 주일 성수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십자가 은혜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슨 사랑이 나오고 영광이 나오겠는가. 인간의 자기 영광밖에 안 나온다. 일요일 날 교회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안식일을 완전히 지키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것은 완벽한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예수님을 살해한 이단들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의 산물이다.
교회는 머리 부분이 예수님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의를 감사하는 집단이 참된 교회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이 규칙이나 법을 준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께서 다하셨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의를 가지고 세상을 고발하는 일이다(요한복음 16:8-11).
율법을 놓지 않고 자체적으로 의를 만들 수 있다는 자를 철저하게 공격하지 않는 자는 성령이 없는 자이다. 공격하기는커녕 뒤따라 다니면서 주일 성수 했으니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거라고 아부를 하니 그 교인들이 자기 죄를 알 리가 있나? 이런 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 목회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된 자이다. 즉 교회를 자기의 사조직화 하는 자들이다. 성령이 하는 일을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자신의 교인 관리로 구원받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자이다. 교회가 복음을 이탈하면 교회가 아니다. 꼭 복음과 반대로 하면서 교회라고 주장하는 그 증거는 '주일 성수'라는 외침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서 빠져나간다고 목회자가 초조 하는가? 목회자는 교회를 확장시키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지 목회자가 아니다. 자기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복음을 전하게 되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나중에 오든 영영 교회 안 오든,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 자기 소관이 아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 목회자가 교인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교인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자신이 주님의 자리에 올라앉은 자이다.
목회적 차원이라니 교육적 차원이라는 말 그 자체가 성령 대신 자기의 경영술과 관리력을 발휘해 보겠다는 의도이다. 본인부터 철저한 불신앙자이다. 신앙이 낮은 것도 신앙이 높은 것도 목회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목회자가 바른 복음만을 전하고 기도에 전념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알아서 할 일이다.복음은 전하는 과정 속에서 복음인지 아닌지 가름된다.
정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아는 자 같으면 민중들을 교회에 붙들어 매기 위해서 '주일 성수'라는 율법을 창안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모이기에 힘쓰라면 힘쓰면 된다(히브리서 10:25). 그것뿐이다.
그리고 날 준수와 관련해서 폄론하지 말라면 안하면 된다(골로새서 3:16). 날과 달을 준수하는 것이 복음을 망치는 것이라면 망치는 거라고 알아라!(갈라디아서 4:10).
너무나도 명확하고 분명한 성경 구절은 다 제쳐두고 무슨 근거도 없는 전통과 율법을 만들어 가지고 고집스럽게 민중들을 붙들려 하는가. 꼭 이런 식으로 해서 복음을 망쳐야만 하는가?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지지 시간을 통해서 접근해 나가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의 완성은 주일이 아니라 늘 현존하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시간이라는 중간 매질이 필요 없다. 성도는 주님의 종이지 시간의 종이 아니다. 시간이라는 미신으로부터 도망쳐 나아야 한다. 인간에서부터 출발한 신학과 설교는 항상 복음과 이처럼 충돌된다. 이런 주장들은 교회를 인간교로 만드는데 기초 교리가 된다. 참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완성을 믿는 것이다. 교회 커나가는데 보람을 느끼는 세속적인 발상에서 떠나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참된 교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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