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양육 자료실/십자가를 아십니까?

2. 십자가와 기도

JORC구원열차 2009. 9. 24. 11:26

2. 십자가와 기도

 

모든 인간은 기도할 줄 안다. 타고났다. 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긍정을 하든 부정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들은 개인 신을 갖고 있다. 이 세상은 각인이 각자의 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기도 장터이다. 온갖 기도들이 난무하는 혼돈의 세계이다. 개별적 신들을 앞장세우고 그 신에게 쉬지 않고 탄원하면서 인간들은 살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그들의 신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이 빛이다" 동시에 세파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종이다. 인간에게 있어 기도가 성립되려면, 기도를 받는 그 신을 지상에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을 구비해야 한다. 전적으로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적 신을 하나 키우려면 그 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호감을 갖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마치 개를 부리려면 먼저 그 개가 좋아하는 먹이를 주어서 주인의 원대로 부릴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급선무 듯이. 예를 들어,신은 경배 받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지상에서 그분에게 마음껏 성의를 다해서 경배해준다. 그러고 난 뒤 내 쪽에서 달라 걸 달라고 한다면 설마 신이 거절이야 하겠는가.

 

자기도 받은 게 있는데….꼭 이런 식이다. 또 신께서 겸손을 원하면 자아를 겸손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게 된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금식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낮추어 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이것이 저의 최선의 노력입니다.

 

하나의 겸손을 들어주신 하나님,(사무엘상 1:10) 저의 겸손을 거두어주소서". 겸손뿐 아니라 찬양을 원하면 찬양을,회개를 원하면 회개를,금식을 원하면 금식을,구제와 헌금을 원하면 구제와 헌금도 아끼지 않고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도 동원할 것이며 또한 가로막은 난관도 돌파하고 말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말로 해서 안되면 두드리고, 두드려서 안되면 발로 차서라도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도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정말 인간의 근원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발상이다.

 

가인은 새로운 아담형을 추구했다. 자립하는 인간형이다. 이런 상태에서 신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러니 가인형의 인간들로서는 무엇보다도 확고한 자아 정립이 우선이다. 확고하고 다져진 자기 자리에서 매사를 출발시킨다. 신과 관계에 있어서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신의 품성 또한 인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품성만으로 계시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기 쪽에서 나간 메시지가 무사히 신의 영역까지 도달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으로부터 날아오는 기도의 응답도 쉽게 수용되리라 여긴다. 자기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만 신과 교류를 시도하므로, 기도의 주도권을 인간 쪽에서 갖기를 도모한다.

 

여기에 여러 가지 종교적 장치들이 동원된다.예수님께서 이러한 인간들의 기도 장치를 공격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는 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자부한 그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계시가 아니라 욕망의 본능이다.본능의 만족은 순간적으로 편한 것이다. 그들은 편한 길을 원한다.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있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내부,외부의 고통들.이 고통의 무풍지대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계시는 이질적이다. 계시가 왔다는 것은 인간세계에 위기가 도래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신 모습도 변해야 한다. 변화된 신 관념은, 먼저 인간 자신의 기조가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여진이다. 그 동안 신과 교신하던 수단도 믿을게 못된다. 모든 것에 균열이 일어난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미 자기가 확고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를 무서워한다. 기도는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확고하게 잘하고 있는 기능이라고 믿고 있다. 계시가 새삼스럽게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도만큼은 계시 이전에도 기도요 계시 이후라도 역시 같은 기도라고 쉽게 생각해버린다.

 

이 고정된 관념이 예수님을 살해한 동기가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계시에 의해서 인간 고유의 기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님이 수난 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미 발생된 십자가 사건, 이 우주적 사건을 가지고 기존의 기도의 허점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리고 참된 기도가 오직 십자가를 아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특혜임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인간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추악한 충동과 구역질나는 욕심이 한데 어울러져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작태, 이것이 인간들이 하는 기도이다.

 

인간은 받는 존재이다. 받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 인간들이 달라고 요구하기 전부터 뭔가 있었다. 그것은 에덴동산이었다. 모든 게 풍성했고 부족함이 없다. 달라는 것을 배울 필요도 없이 인간은 누리기만 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받아 누리는 존재에서 만약 더 요청하는 존재로 전락했다면 이는 비본래적이다.

 

부족함이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게 있다고 억지를 쓰는 식이 된다. 인간들은 악마의 유혹을 받은 이후, 누리는 존재에서 더 달라는 존재로 변했다. 기도란, 인간이 에덴동산에 추방당하고 난 뒤에 결핍에서 고통의 표현 방식이다. 다시 생명나무와 어우러져서 살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인간형이 생겨난다. 천상으로 이동해 버린 생명나무를 그리워하면서 천상의 존재를 표현한 제사와, 땅의 소산의 풍성을 기원하는 땅의 제사 두 가지이다.하나님은 아벨 쪽을 선택하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보였다. 동시에 가인으로 하여금 악의 현존에 눈뜨기를 바랬다. "악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창세기 4:7).

 

악이란, 아벨이 드린 제물을 기준으로 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아벨 쪽을 선택한 하나님과 아벨 쪽을 배척한 가인형 인간 사이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기도가 생겨난다. 세상에서 흔히 유통되는 기도의 옳고 그름을 파악하려면 먼저 아벨같이 [선택된 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벨이 죽고 난 뒤 그 계통 안에서 여호와께서 기도하는 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26).

 

여타의 모든 기도는 사실상 악의 표출임이 이 [선택된 자]의 기도와 견주어 볼 때, 알게 된다. 땅에 아벨의 제사로 처음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여호와께서는, 아벨 정신과 맞지 않는 자에게 가인에게 행했듯이 연속적인 저주 행위를 시행하신다. 그것은 땅의 안식을 겨냥한 것이다(창세기 5:29).

 

여호와께서 수용하는 기도는, 새롭게 주어진 계시의 내용을 근거로, 그 내용대로 시행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아의 제사와 기도는, 가인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아벨에 대한 하늘의 보복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의인의 희생을 근거로 홍수 재앙이 전 세계에 미침을 고백하는 제사로써 노아는 방주 안에 있는 부정한 제물을 놔두고 정결한 제물을 잡아 번제로 드린다(8:20). 이 제사의 열납은 곧 아벨제사의 회생과 연속성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다음과 같이 이 제사의 의의를 설명해 주신다."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세기 8:21). '사람의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라는 하나님의 평가는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의인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저주가 은혜로 바뀐 것은, 사람의 계획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의인의 의로운 희생물의 헌신적 희생 때문이다 는 것이다. 땅의 대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축복은, 선택한 자의 기도에 근거해서 계속 유지된다.

 

저주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총은, 마치 구름 속에 숨어있는 무지개와 같다. 하늘에서 이미 마련되어 간직된 상태로 있는 은총은, 지상에서는 '의로운 자의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기도란? 하늘에 있는 은총의 실현태로서 '의로운 자의 희생'을 지상에 계속 등장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땅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구원 약속이 천상과 지상에서 동일한 고리로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연결 고리에 등장되는 인물은, 오직 약속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안 가야 한다. 그런 자는 아벨과 같이 선택된 자에 한한다.

 

땅의 세계에서의 세속적 인간들의 염원은 바벨탑 건립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그들은 [자기 이름]이 하늘에까지 닿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이 그런 자들의 의지에 반영될 리가 없다. 하나님은, 지상에 하나님의 약속이 반영되는 이름을 원했다. 그래서 선택된 자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 아브라함이 행하는 기도의 내용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펼치고자하는 자신의 뜻의 반영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언약의 상대자로 삼았다. 그의 생존과 확장은 하나님이 복 주셨기에 가능한 조치가 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브라함 민족의 확장을 막을 자 없다. 누구든지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이 내려지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가 내려진다(창세기 12:1-3).그 안에서 하나님은 살아 일하신다.

 

복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임이 그 민족의 확장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민족의 확장은 다른 민족의 퇴패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확장되기를 기대하는 유일무이한 민족은 아브라함 후손에 의해 구성될 국가뿐이다. 이렇듯 다른 민족 다른 국가들은 이 지상에 은퇴해야 한다. 아브라함 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기도란, 이미 그 중심 내용이 확정된 입장이다.

 

이 내용을 거론하여 [언약]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언약 환경으로 바꾸려고 하신다. 그 중심에 아브라함과 그 민족이 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국가가 하는 기도 여하에 따라 역사는 진행된다. 그들의 기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인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에 호응하는 인물들이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복의 민족이 되기 이전에 먼저 그들 자신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지배당해야 한다.

 

복의 근원이라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의 원산지가 따로 있음을 절감해야 한다. 이점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는 경험을 아브라함은 맞이했다. 멜기세덱과의 만남이다. 멜기세덱은 하늘의 제사장이다. 다섯 왕과의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승리하게 된 것은 모든 것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임을 안 멜기세덱 제사장은 그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14:17-20).

 

멜기세덱은 하늘을 대변하여 아브라함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하늘의 복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통로로써 그를 인정했다. 여기에 부응하여 아브라함은 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 복의 출처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그 자체에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이 방패요 상급이다(창세기 15:1).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선택되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그에게 의인으로 간주되는 근거가 된다. 약속을 믿는 의인이기에 상대적으로 악인은 그 앞에서 괴멸되어야 한다. 의로운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승리가 지상에서는 아브라함 자신의 승리로 보여진다. 승리의 원인은 의에 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위상에서 최초로 한 기도는 곧 의의 효과에 대한 것이다. 자기 조카 롯은 지금 멸망의 도성에 살고 있다. 그는 의인의 숫자에 관심 둔다. 의인이 악인과 더불어 멸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기어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해야 한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의가 조카 롯의 의가 되기를 바랬다.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그리고 의인의 자격으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구원에 도움이 될 것으로 바란다. 창세기 19:29에서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하나님이 들의 성읍들을 엎으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여기서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한 결과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성 안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우연이다.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창세기 19:1)의 말씀처럼 롯과 천사를 우연히 마주치게 하신 것이다. 롯의 착함 이전에 아브라함과 관계된 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복이었고 또 의의 전달이었다.

 

이렇듯 기도란, 복의 중개인이 그 복을 제3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등장된다. 구원받은 자는 자기의 현 위치에서 그 어떠한 본인의 종교적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 말로 제3자의 축복기도가 전달되는 경우에만 구원이 이루어진다. 모든 구원의 공로와 근거는, 복의 중매인을 통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

 

비슷한 경우가 창세기 20장에도 나온다. 함부로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이라고 여기고 쉽게 사라와 동침하려고 했던 아비멜렉왕은 난데없이 하나님의 경고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라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 가족이 죽게 될 것이요 만약 그 사라의 남편이 기도하게 되면 너는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결국 아브라함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니 닫혔던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가 다 열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저주가 풀린 것이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전달되는 의의 가치와 복의 근원을 말해주고 계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우대하는 자에게 복이 오고 아브라함의 가치를 무시하는 자에게 저주가 온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의가 계시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위상은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굵어진다. 그만큼 심판의 범위가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살던 지역에서 가나안 넓은 지역으로 펴져나간다. 가나안 지역에 전에 노아의 기도에 의해 이미 운명이 결정 난 지역이다.

 

축복의 계통이 저주의 계통을 반드시 지배하게 됨을 증명해주는 무대구실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 사람의 기도는 그 자체가 인류역사이다. 셈의 후손이 함과 가나안 후손을 지배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일관된 의도는 땅위에서 성취된다.

 

애굽에서 노예 상태로 있던 히브리인들은 사실은 아브라함과 관련된 복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현실은 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오히려 저주 상태의 연속이었다. 아브라함 백성은 창세기 15장의 체결된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한 사명을 지닌다.

 

그 사명이란 가나안 땅의 죄악이 관영할 때, 그들을 징벌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러나 애굽 안의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사명을 따지기에 너무나 힘든 굴레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낼 필요성이 있음을 알고 계셨다. 동시에 그 애굽에서의 탈출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가나안 족속의 악을 징벌할 수 있는 의도 소유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사명이 출발선에서 새로운 기도 의미가 추가된다. 그것은 바로 '부르짖음'이다.

 

출애굽기 2:23-25에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애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 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라고 되어있다.

 

위의 대목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부르짖음을 들으시고'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 하사' 라는 두 부분이다.이 둘을 연결시켜야 한다. 부르짖는다고 그들의 구원자를 보내시는 게 아니다. 전에 그들을 가지고 하시고자 했던 계획이 있었다. 그 대상에 한해서만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파견하신다(출애굽기 3:7-8에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그 히브리인들이 고역 속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부르짖을 자이겠는가. 조상의 하나님을 찾겠는가. 그들은 당장 그들의 신상에 미친 고통에만 신경 쓰는 자들이다. 조상의 하나님의 계획에는 안중에도 없다. 한 발자국도 애굽에서 떠날 의사가 없는 자들이다.

 

심지어 그들 히브리인들은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바로 왕의 심사를 더욱 뒤틀리게 만들어서 밉상이 되어 고통이 더욱 가중되게 한 작자들이니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의 행동을 주시 하사 자제하도록 기도를 했다(출애굽기 5:19-22).

 

출애굽기에서 계속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구원이라는 것이 그들의 부르짖음에 있는 게 아니라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언약 계획을 위해 계획적으로 그들에게 고통이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것이다. 달리 방도가 없어서 조상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에게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는 그들의 모습과 그 상태가 장차 가나안 땅의 악의 무리를 징벌할 때, 자신의 의를 담아 낼 수 있는 기본 태도로 여겼던 것이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9:4-5).

 

" 결국 하나님께서 안일한 자기 백성에게 고통으로 압박하셨고 그 고통으로 인해 백성들이 언약을 기억하여 부르짖었다. 또한 그 부르짖음으로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 하사 구원자를 보내 사 그들과 대면케 하지만, 그들의 부르짖은 속마음과 구원자의 입장이 서로 이질적이라는 사실이다.

 

애굽 탈출과 가나안 정복과 약속의 땅 쟁취는 결코 히브리인들의 부르짖음이나 그들의 신앙심에 공로가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전에 체결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일관적인 구원 의지와 의에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그 일관성 있는 성취 과정 중의 하나가 자기 백성의 더러운 속물 근성을 폭로케 하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출애굽 경험, 이것은 대대로 히브리민족이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경험이어야 한다. 후손들에게 넘겨줄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출애굽의 그 사랑을 재현해줄 것인가? 여기에 등장한 것이 율법이다. 율법이란, 애굽의 압박 시절의 정치적 고통을 하나님의 의로움의 압박으로 전환시켜서 출애굽의 상황을 항상 현실 속에 늘 살아나도록 하는 조치이다.

 

히브리민족의 부르짖음과 고통은, 조상들 간의 체결된 일관된 약속으로 해결될 수 있었지만 그 약속 속에는 히브리민들의 의나 공로나 노력이 포함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오직 아브라함 약속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만이 구원의 근거이어야 한다. 이 사실을 함유해야 후대까지 출애굽의 의의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된다.

 

과거의 구원이 현재 날마다의 구원이 되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엄중하고 거룩한 율법이 주어져 그 속에서 히브리민족으로 하여금 의라는 차원에서 '부르짖음'이 배겨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세 언약에서의 기도이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주어야만 구원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이유는(출애굽기 33:19), 히브리인 그들도 역시 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원이 안겨지게 된 배경에는 '의인의 희생'이라는 아벨의 표상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희생 제사에 관여하는 거룩한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은 의의 국가로서 타민족과 차별된다. 제사법에서 나타낼 수 있는 의의는, 하나님의 긍휼이다. 모압 선지자 발람이 그토록 저주하려도 성사될 수 없었던 이유는, 여호와께서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민수기 23:21).

 

이 긍휼이 여전히 살아있는 국가 사회는 곧 하나님의 의가 살아있는 거룩한 국가이다. 그래서 이 국가야말로 타 국가를 정복할 자격이 된다. 옛날 다 같이 노예 상태였던 시절, 그들이 애굽 나라에서 나그네였고 고아였다. 따라서 그들은 애굽인들에게 구박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학대한 그들은 곧 하나님과의 적이 되고 반면 조상의 약속의 근거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 학대받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이 들어갈 자리가 부여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원칙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 후에도 지속된다.

 

모세 언약을 어긴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지고 모세 언약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내려진다. 이 약속에 충실해야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된다. 만약 공동체 내에서 긍휼이 사라져서 약한 자와 고아나 과부가 그 억울함을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어 언약대로 학대자에게는, 애굽에게 주어진 저주가 내려지게 된다(출애굽기 22:20-27).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유지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이방 민족의 나쁜 영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차츰 이방 민족으로 변질되게 한다. 그들의 생활상과 종교는 힘의 축적을 기대하는 기도와 간구였다. 하나님께서 몇 번이고 사사들을 보내지만 나중에 사사마저 힘을 사용하는 영웅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왕 체제를 부러워한데서 비롯된 사고방식이다(사사기 8:22-28).이런 시국에서 [한나]라는 여인은 참다운 제사장을 원해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이 응답되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 기도한다.

 

"가난한 자와 자식이 없는 자나 낮은 자를 역전시켜 오히려 부요한 자나 세상 권세 잡은 자를 오히려 영원히 지배하는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즉 하나님의 참다운 의는, 불의한 배경에서는 항상 억압받는 형태로 등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여건을 완벽하게 뒤집게 해서 의인에 대한 보복을 하시는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마치 아벨의 의에 대한 가인에게 철저하게 저주하고 복수하는 형식과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흑암의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되어야 한다.'의인의 희생'이 이제 단순히 제사 의식을 통해서 구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왕으로 삼는 백성과 특정인을 왕으로 삼는 무리들 간의 갈등에서 발생된다. 거룩과 속됨이라는 구분도 제사장이라는 직분이나(사무엘상 4:21)

 

제사 형식에서(사무엘상 13:9/4:11) 판가름 나지 않고, 여호와 왕에게 절대 순종 여부에 따라 이루어진다(사무엘상 15:22).순종이라는 새로운 통치 방식은, 기존이 율법 준행의 주체에 대한 부정과 거부의 뜻이 담겨있으며 동시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인물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한 인물의 율법 이행을 가지고 나라 전체의 운명을 결정 짓게 하는 통치 방식이다(사무엘상 12:23-25).

 

축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이 세운 중보자가 간직할 의와 관련 있다. 우리의 왕이 바른 왕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왕이 하는 대리 기도가 늘 이스라엘이 국운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왕이 하나님의 종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나그네와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배척하지 않고 긍휼을 베푸는 정치를 해야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 되심을 충분히 보여주어야 될 책임 있는 왕이어야 한다. 이런 왕은, 실제로 언약민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언약민의 대표자로서 이스라엘의 왕 자리에 등극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희생을 체험한 의의 왕'이 되어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순수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를 아는 왕이 보좌에 영원히 있는 한, 이스라엘은 영원히 세상 나라를 통치하는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된다. 다윗은 알고 있다. 영원한 왕의 보좌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것과 그 자리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께서 앉아 셔야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고집한 것이다. 왕은 철저하게 하늘의 왕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하늘의 왕의 지속적인 통치가 가능하여 언약대로의 모든 내용들이 땅에서 성취되기를 비는 것이다(사무엘하 22장).오직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열왕기상 8:27-50).

 

성전이란, 하나님 사역의 증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호 의사표시를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왕은 성전을 성전답게 보전할 책임이 있다. 만약 왕이 충성치 못하면 성전이 파괴된다. 솔로몬 이후, 나라는 남쪽과 북쪽 둘로 나누어지는데 문제는 성전은 여전히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어느 쪽인가 한쪽은 기도의 통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성전을 향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신 언약 성취를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도의 중심처가 남쪽나라의 것이 되었다. 자동적으로 북쪽나라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의 정통성에서 멀어졌다. 즉 세상 나라가 된 것이다.하나님의 진노함으로 연이은 왕들의 흥망성쇠를 통해서 퍼부어진다.

 

호세아 13:11에 이런 말씀이 있다."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렇게 되니 북쪽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기도 통로를 우상적으로 제조해 낼 수밖에 없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제정하신 다윗언약을 기피한 댓가이다.

 

북쪽의 여로보암왕은, 북쪽 사람들이 성전을 그리워하며 마음이 남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하여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고 산당도 짓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세우고 절기도 임의의 날로 정해버린다.

 

유사종교가 새로 탄생한 셈이다(열왕기상 12:25-33).여기서부터 선지자의 활약이 분주해진다. 약속의 땅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위배한다는 것은 곧 저주를 의미함을 왕들에게 알려준다. 특히 엘리야는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결과 3년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야고보서 5:17).

 

왜 비오지 않기를 기도했을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고생하고 목말라하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기존의 이스라엘 체제를 비호하고 호응해주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언약에 순복하는 새로운 언약 국가만이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즉 소위 여호와를 외친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그 국가가 하나님의 긍휼을 담고 있지 아니하면 애굽으로 인정해서 하나님의 저주의 상대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선지자의 기도의 내용은, 결코 자기 민족 자기 국가 위주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 편에 서있는 기도 내용이다. 엘리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했을 때 비로소 그 땅에 비가 내렸다. 바로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가 후대의 모든 참된 선지자의 모델이 된다. 선지자들이 행한 기도와 계시는 인간 편익 위주가 아니다.

 

이스라엘이든 유다나라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비웃고 파괴하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적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저주받고 심판 받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자기 민족의 고유적인 종교적 기득권을 포기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의식이나 종교 제도나 전통들은 언약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기존 국가의 번영과 임금님에 대한 무궁 안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삯을 받는 거짓 선지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또한 민중들을 달래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미가 3:10-12에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 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도다"라고 되어 있다. 소위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까지 오히려 이런 자들을 옹호하고 나서는 것이다."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예레미야 5:31). 지도자와 백성들이 다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상태에서 성전도 의미를 잃게 되었다. 외부 민족의 발길에 짓밟히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아직도 자기네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여기고 부지런히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이 어리석음을 지적하기 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말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와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예레미야 7:4-7).

 

금식 기도회를 성대하게 개최해서 나라와 민족과 성전을 위하여 기도해 봤자 선지자의 계시에 의하면 오히려 죄만 더 축적될 뿐이다(이사야 1:15/58:4-7). 기존의 조직체에게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과 곡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사모하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기도가 터져 나오게 된다.

 

그 내용은 '여호와의 날'의 도래이다. 언젠가는 메시야가 오셔서 기존의 모든 거짓된 것을 심판하시고 오직 약속만을 믿는 의인들만 (하박국 2:4) 구원이 되리라는 그 날을 선지자들은 하늘에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들 선지자들이 소개하는 여호와의 날은 기존 종교 집단에게는 캄캄한 날이요, 그들이 남발한 구원의 축복들은 망상의 조각들인 것이 드러나는 날이다(아모스 5:18,20; 8:9; 요엘 1:15; 2:1,11,31). 선지자들의 고통,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애굽 땅에서 고통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스라엘 혹은 유다라고 불리는 이방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나라는 오직 메시야의 나라뿐이며 인자의 나라뿐이다(다니엘 7:9-14). 비록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다할지라도 오직 구원의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하박국 3:17),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이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속히 멸망되기를 기다리는 기도를 드린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 인해 그런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그들의 기도의 전부였다. 이점에 대해서 신약에 좋은 예가 나온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비유로 설명하고 계시다. 불의한 재판관이 있는 어느 도시에 불쌍한 한 과부가 있어 그 재판관에게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시기를,"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셨다.'택한 자의 원한' 이것이 종말 시의 기도의 요건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선택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고수하다가 원한을 갖게 되는 핍박자가 된다. 바로 이러한 원한에 대한 복수를 해주신다는 것이다. 마치 아벨사건의 재현이다.

 

이러한 기도의 원리는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진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 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요한계시록 6:9-11).

 

순교 당하고(히브리서 11:35-37) 또 순교 당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다(히브리서 11:38). 그리고 죽임 당한 자의 수가 차면 그때 비로소 메시야가 이 땅에 도래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대로 심판이 이루어져 안식의 세계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외형적으로는 어떠한 형체로도 드러나지 못했지만 '의인의 희생'이라는 모습으로 남은 자들 속에 살아 있었다(다니엘 3:25). 그 고난의 줄기를 따라 메시야가 도래했다.

 

고난 받는 메시야는 다음과 같이 민중들에게 외쳤다."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기존의 종교의식이 이루어진 성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기도의 통로는 오직 예수님뿐이며 유일한 기도하는 집이다(마태복음 21:13/요한복음 2:19).

 

천사들이 야곱의 머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한 것처럼, 지금은 인자 되시는 예수님만이 응답의 통로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은, 언약의 완성형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46-55에 나와있는 마리아의 찬양이 이를 증명해 준 자. 이분이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실 분이고 교만한 자를 흩으실 분이고 부자를 공수로 보낼 자이시다. 뿐만 아니라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우는 분이시다. 그 동안 하늘의 긍휼이 막혔던 세대에게, 완성된 긍휼이 예수님을 통해서 쏟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예수님의 기도에 의한 것이다(마태복음 11:27). 기존의 기도는 모두 인간의 눈을 의식하고 또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헤아릴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하던 기도였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기도한다고 응답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기도는 먼저, 아버지께서 자기들에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시다는 신뢰를 전제로 하고 나오는 기도이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기도란,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겨지기를 바라는 기도이어야 한다. 이 목적에 따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마태복음 6:5-8).

 

우리가 평소에 지니고 있는 뜻이란, 하늘에서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지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지할 것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당시의 약자로 되돌아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는 출애굽 사건의 재현이다. 다시금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 하사 우리 속에 아버지 뜻만이 담기기를 요청해야 한다. 아버지의 뜻은 오직 긍휼과 사랑의 실현이다.

 

하늘의 용서가 땅에서 적용되는데 있다. 이 지상에서 약한 자라는 인식에서 시작하여 타인에게 하늘을 용서를 전하는 용서받는 자가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본질이다. 여기서 인간의 자의에 의한 뜻은 거부된다. 오직 아버지의 뜻만이 기도의 내용으로 담겨야 한다.

 

율법이 요구한 완전과 온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요청을 해야 한다. 넓은 길보다 좁은 길 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찾아야 하고 두드려야 한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그 나라와 의만 찾게 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이미 율법의 완성으로 확정된 아버지의 뜻에 의해 우리의 사적인 뜻은 밀려야 한다.우리의 뜻은 미완성적이고 비긍휼적이고 비언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이런 식의 기도마저 거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켰다. 십자가란, 예수님이 몰고 온 아버지의 완전한 뜻에 대한 거부 몸짓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율법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대신하고 완성한다는데 대해서 격노했다. 모든 율법이 자기를 겨냥해서 부여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요한복음 5:37-40,46)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수님을 단지 율법해석자로만 봐주었다. 선지자의 한 사람 정도의 가치로 한정되기를 바랬다(마태복음 16:13-15).

 

여러 율법 해석 중의 하나로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참고하는 선에서 머물려고 했다. 그분을 랍비 정도로 인식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손에 의해 율법을 준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기도도 그 중의 하나처럼, 자신의 성스럽고 진실된 기도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있는 율법을 준수하고 있는 자라는 인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충분히 기도 응답을 요구할 근거가 된다고 여기는 의는 율법 준수에서 발생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율법을 앞장세운다. 마치 복에 앞에 두고 사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그 율법의 자리에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선언과 함께 자기를 세워놓기를 바라셨다.

 

율법이 순간 예수님 안으로 흡수된 것은, 인간이 자기의 행함으로 쟁취할 복이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겨 복종하든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다시 그 자리에 멋지고 정교한 법 체제를 세우든지 해야 한다. 그 예수님을 넘어뜨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의 종교 행위에 대해서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

 

기도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타인의 이름으로 대신 기도 드려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어 한다. 기도의 발판이 자기에 없다는 것을 믿으려 하질 않는다. 땅에서 외치면 하늘에서 필히 들어준다는 주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모세 율법을 제대로 알면 예수님 자기가 하늘에서 온 자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했다(요한복음 5:45-47).

 

결국 예수님의 의의를 모른다는 말은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 전체를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율법을 모르면서 그것 지켜 자체적으로 기도 응답의 근거로 삼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나로 말미암고서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 비유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버지께서 잘라서 불에 태워버린다는 사실을(요한복음 15:6).

 

예수님은, 인간들의 기도를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소용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오셨다. 그 어느 누구도 자체적인 기도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다만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해서 의를 생산하고, 그 의에 근거한 기도를 올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를 부르짖을 따름이다.

 

모든 게 언약적이고 약속의 일관성에 부합되어야 한다. 구약의 성도나 남은 자들이 오직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은 것과 같은 원리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약속은 예수님을 지향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예수님 본인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8:56-59).예수님 이외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만한 분은 없다. 모든 인간은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 이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 이외에 그 어떤 기도도 듣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 안에서(요한복음 15:7),혹은 성령 안에서(에베소서 6:18), 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요한복음 15:6).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아버지의 뜻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이다(로마서 8:26-27). 그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탐욕이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다. 성령이 함께 계시는 성도는, 성령님께서 그 탐욕을 끊고자 하신다. 여기서 성도의 갈등이 발생된다.

 

성도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의 본래적인 뜻과 주님의 뜻 사이에서 당황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만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안다(로마서 7:22-24). 그래서 성령님께 호소하게 된다. 성도가 실패한 자리에서부터 성령님은 사역하신다. 실패한 그 성도 안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부족하고 죄인 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고 따라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충만함을 알게끔 한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물론 성도의 그런 사랑 체험도 늘 일시적이다.

 

돌아서면 또 자기 본색을 드러낸다. 육체의 소욕자가 된다. 그래서 성도는 일생을 다하도록 자기의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의 바램은 성도가 날마다 자기의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는 것이다(갈라디아서 5:16-26).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소욕이란 무엇일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항상 마찰이 일어난다고 했다. 성령은 곧 십자가의 진리의 영이다. 성령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해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일이다(요한복음 16:8-11).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죄관, 의관,심 판관이 완전히 전도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이 성령님의 사역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가 육체의 소욕이다. 그러니 육체의 소욕에 대한 고찰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통해 확실히 밝혀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 허영심'이다. 유사 천국을, 종교적 사업을 통해서 도입하고자 하는 허영심이다.

 

이미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 있는데 무슨 천국이 이 지상에 필요한가? 미완성과 완성과의 사이에 십자가가 끼어있어, 세상은 성도 편에서 보면 무가치한 것이고, 세상은 십자가 안에 있는 완성체가 무가치하게 보인다(갈라디아서 6:14).저희들은 육체를 자랑하고 성도는, 저들과 헤어지게 하는 십자가를 자랑거리로 한다(갈라디아서 6:14).

 

구약에서의 율법은, 주의 이름의 능력을 지상에서 보존하고 반복해서 확인하는 작업에 동원된 것이다. 제사장이나 왕은 희생 제물을 근거로 해서 주의 이름을 불렸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보장해 주었다(출애굽기 20:24/신명기 12:11). 주의 이름은 구약 때. 구원의 방식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요엘 2:32/시편 20:5-8).주의 이름은, 다른 나라의 왕을 대신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왕이란 지배자 이전에 그 나라를 구원하는 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왕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기 위한 장소는 하나님이 따로 정하셨다(신명기 16:2).

 

그리고 그 제단 위의 제물과 제사 방법도 지정해 주셨다. 그 장소는 한마디로 말해서 기도하는 장소이다. 하나님께 기도가 가능한 장소는 필히 구원의 권능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장소이어야 한다. 주의 이름이 지상에서 펼친 대 활약상에 의해 차지하게 된 장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공간마저 범죄로 인해 물들었을 때는, 주의 이름은 공간에서 특정 가문으로 이동해서 함께 하게 된다. 이 가문이 다윗이라는 왕 가문이다.

 

이 왕 가문에 후손에 주의 이름으로 나실 분이 있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이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긴밀한 계약 관계에 놓인 분이다. 그 계약은, 백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과 약속 관계에 있다. 만약 그 왕이 온전한 의를 행하면 그 백성은 덩달아 왕 때문에 구원이 주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학수고대한다.

 

이러한 주의 이름과 관련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도 백성의 반열에 들어설 수 없다. 그래서 주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대신 희생해야 한다(이사야 53:4-6). 막바지에 이른 예수님의 기도는 '의인의 희생'을 왕 자격으로 치뤄내야 한다. 그래야 주가 된다.

 

하늘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희생을 요구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한 기도의 최종점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담지 않는 주의 이름의 기도는 존재될 수 없다. 그것은 소용없는 가짜이다.

 

주의 이름으로서의 기도는,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의 영속성을 위한 것이다. 결코 인간의 뜻이 여기에 포함될 수 없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서의 예수님이 수행하고자 했던 내용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주의 이름에 걸 맞는 기도가 된다. 주는 무엇이나 가능한 자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 단, 주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요한 일서 5:14). 주의 자리란, 구약 때의 여호와의 자리이다.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자격으로 이제 세상을 지배하시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하시던 똑같은 일을 하신다.

 

구약의 여호와께서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자 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에 약속을 걸으셨다(출애굽기 33:19). 예수님도 동일한 일을 하신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러한 예수님의 일에 거슬리면서까지 자기 뜻을 버리지 않는 자는 괴멸될 것이다. 은혜의 반대말은 공적 사상이다.

 

긍휼의 반대말은 자체적인 노력이다(로마서 9:16-18).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이유도 여기 있다. 인간들의 노력과 열성과 달음박질로 인해 구원이 될 수 없기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 결과이다(로마서 8:34). 성도가 온전히 구원될 수 있는 이유가 결코 성도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기도하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7:25).

 

예수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기도에서 이탈되는 기도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고 계시는가 하는 점은, 과거 지상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이 관심을 가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잡히시기 직전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였다(1절). 창세전에 이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화 가운데 계셨다(5절).그런데 그 아드님께서 지금 지상에 계신다. 지상에서도 아들은 영광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결국 아버지에게도 영광이 된다. 지상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서 소유로 남겨진 사람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오신 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그것이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아는 것이다(3절).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붙여준 자들은 오직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다. 그것만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에서, 자기에게 보내준 자를 위하여 나머지를 할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저들도 자기에 같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운명인 것을 저들이 알아서, 예수님께서 악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저들도 악에 빠지지 않기를 바랬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말을 믿는 또 다른 자들로 있을 터인데 그들도 또한 예수님 자기와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20절).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예수님이 나타난 진리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이 아버지께서 보낸 당사자인 것을 알아서 본인이 영광을 받고 그리고 그 영광으로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간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상에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했던 그 자들까지도 영화롭게 되어, 아들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써 모두가 하나가 되는데 그 목적은 이들로 하여금 아들과 아버지를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이렇게 보면, 하늘의 하나님의 계획이란 하나로 축약된다. 오직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그것만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래서 이 취지를 아는 성령께서 성도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하는데 그 내용은,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데 있다.

 

그 아들의 형상이란,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서 확보하고 있는 몸의 영광체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의 특징을 오직 아들만이 고집하고 제시할 수 있다.그래서 기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알림'에 모아진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기도하는 주체를 예수님으로 정했다는 것은 그 내용 또한 그 주체의 정신에 부합되어야 하고 일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도 기도 속에 포함시켜서는 아니 된다. 인간은 그 본성상 자기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만을 영화롭게 하는데 전 일생을 투자해오고 있다.

 

이런 존재들에게 자기 말로 제3자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이다. 여기에 성령이 덮쳐온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십자가 사건을 폭발시킨다.

 

갈라디아서 2:20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은 곧 과거에 발생된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되고 그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현재화되면 예수님의 믿음도 또한 현재화되어서 십자가 사건을 계속 발생시키게 된다.

 

바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현재화된 십자가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된다. 성도에게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은 오직 십자가상에서만 가능하다. 다른 만남의 장소는 전혀 없다. 현재 자신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계시를 배척하고 무시하는 인식이다.

 

이미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그 이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을 배제하고서는 일하시지 않는다. 주님의 작업은 상대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이루어진다. 자기가 살아있는 상태에 있다고 여기면서 기도하는 것은, 자기 기도이지 주님의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성도보고 기도를 하라는 것은 네가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기도를 통해서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일이 인간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그 안에서 살려내는 그 작업에 국한된다. 그래야 예수님이 죽음조차 이기신 주님이라는 사실이 온 우주에 충만할 게 아닌가!

 

'예수님 안'이란 곧 '십자가 안'이란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육체는 분명 존속된다. 그런데 그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성도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전달되는 예수님이 믿음이 살아 움직인다는 그런 뜻이다. 죽어가는 생명, 이것은 생명이 아니다. 후패해 가는 육체, 이것은 살아있는 몸이 아니다.

 

예수님은 쇠하지도 않고 죽음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 생명을 생명이라고 간주한다. 단 성도의 현 육체는 그 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현재화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성도는 이를 의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나 죽어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기도해야 된다(빌립보서 1:20).

 

십자가 사건을 피해 나가는 성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십자가 사건 안에서 늘 다시금 체험되는 사실은, 나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기도이기에 다시금 나는 날마다 죽어야 하고 오직 그 현장에 살아 계신 주님께서 나의 육체를 도구로 사용 하사 오직 예수님만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이런데 이러한 작업이 억압이나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사랑'(갈라디아서 2:20)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은혜의 기쁨 안에서 수행된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굴욕감이나 저항감을 유발된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명백한 가짜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기쁨과 즐거움과 온유와 절제와 사랑과 충성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양선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열매가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기도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가 못된다. 그리고 성령에 의한 기도는 그 모든 목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 무일한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계시하는 작업과 그리고 모든 일은 주님 홀로 지금 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환경을 갖게 된다. 국가라는 환경과 특정 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족이라는 환경과 교회라는 단체를 두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만을 발생시키는 기도이다. 현재 반복되는 십자가 안에서의 기도라면 절대로 이런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위하여 관심 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 있는 자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심이 붕괴되면 나머지 환경도 유명무실해진다. 정말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만이 살아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필연이다.

 

예수님 그분만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그분이 주신 모든 계시, 즉 그분의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가족관, 국가관만을 고집하게 된다. 바로 현실적으로 악한 세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을 남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아버지 뜻만을 옹호했다. 그래서 참된 성도라면, 이 세상에 널리고 또한 층층이 쌓여있는 모든 유사종교와 모든 율법 체제가 어서 속히 무너지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목사가, 자기 교회가 번창할 수 있는 어떤 비법이나 비결의 하나로 "기도 열심히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때부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사는 자이다. 고도의 종교테크닉을 의존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정신 상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 기도는, 그리스도를 살해했던 그 인간들의 잘못과 실수와 원천적 죄악성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세상을 고발하려 하는 기도에 국한 되어야 한다. 왜 예수님이 죽어야만 했었는가? 그 원인 찾기를 독촉하면서 회개를 요청하는 기도이어야 한다. 이것만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인간들의 현 체제에 대한 미련과 애착과 탐욕 같은 것들이 잘못된 기도를 확산시켜 놓고 있다. 그 잘못된 기도의 근원은, 가짜 예수 그리스도관을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짜 하나님이 그들 머리속에 박히게 된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통치하여 제대로 주님으로서 역할을 기대하는 기도가 아닌 기도는, 허공만을 채우는 입김일 뿐이다.

 

기도는 본능이다. 자기를 초월하려는 몸짓이다. 참된 기도는, 자기 기도를 죽이는 기도이어야 한다. 십자가 안에서 한 발자국도 이탈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늘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려 주기를 요청해야 한다. 구약 때,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기도를 듣지 않고 아벨의 기도를 들은 주시는지 그 이유를 늘 명심해야 한다.

 

왜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조카 롯을 구원했는지 그 법칙을 수용해야 한다.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싶거든 자기의 뜻도 죽이고 자기의 생명도 미워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가 벌리는 기도 재능에 매료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자기의 의부터 죽이는 식으로 기도는 시작되어야 한다. 응답은 이미 고정적이다. 평소에 기피했던 성경의 내용만이 응답으로 주어질 뿐이다.

 

주님의 능력이란 오직 말씀 실현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새삼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방해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아부터 먼저 주님 앞에서 자빠지도록 기도하자.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니 그저 도구로만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자.

 

이로 인해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하시는 기도에 방해물이 제거되는 것이다."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을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야고보서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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