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십자가와 상급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와 함께 죽을 사람을 찾는 표지판이다. 그 표지판에다 자기를 매달아 죽이는 자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이 세계가 예수님이 준비한 세계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제공하는 세계이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바 있다(창세기 15:1). 그런데 그 상급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 되는 상태를 과연 아브라함이 충분히 수납했을까?
상급이란, 의로운 자가 악한 자와 싸워서 그 승리한 보상으로 주는 것이다. 상급의 개념 안에는 반드시 전쟁을 치룬 자에게 있게 된다. 따라서 상급을 받으려면 먼저 의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이 악인에 대한 전쟁이기 때문에 악인들이 상상하는 그런 상급론도 함께 무너져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상급론은, 악인들이 지니고 있는 상급론을 무너뜨리는 이론이어야 한다.
상급이 싸움의 결과로서 방패와 함께 등장해서 주어진다는 것은 창세기 15:1에서 드러났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역사적 싸움을 최초로 반영하는 구절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투쟁이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이름을 생명(하와)라고 지어줌으로써, 여자의 후손 편에 서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하와의 후손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상급이 된다. 방패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무기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힌 치마는 뱀의 후손들로부터의 공격을 변호하고 비호하는 방패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치마를 교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담과 여자는 자체적으로 만든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죄짓고 난 연후의 최초의 행동이 자기가 자기를 가리는 행위이다. 수치를 느껴 치마를 만들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각자 분리와 자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남녀가 치마를 만들어 하체를 가린 것은, 한 몸으로 만든 관계를 깨어져 두 몸처럼 느끼면서 살게 된 것이다.
신체상 서로 차이나는 부분이 수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한 몸 의식에서 멀어진 것이다. 게다가 죄에 대해서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자기로부터 죄책이 떨어져 나가기를 바란다. 자기는 하나님과 원수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이러한 변명은 자기 방어에서 비롯된다.
자기 방어란 죄 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 싶은 염원을 담고 있다. 죄지은 결과를 감추려 함으로써 죄 안 지은 자로 행세하려 한다. 이것을 치마를 만들어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러나 범죄 후 중심은 늘 감추어야 될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작업은, 중심을 가리는 본능의 사주를 안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범죄 후 나름대로 상급관이 세워진다. 즉 상급의 근원을 중심으로 결정하지 말고 외모로 결정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등장되는 것이다. 우선 범죄의 탓을 딴 데로 돌리게 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죄가 전가되는 방향에 따라 외모가 더욱 비참해지는 저주를 받게 된다. 죄의 최종 전가가 뱀에 떨어지면서 뱀부터 벌이 주어진다. 그리고 죄에 대한 공격이 뱀에 집중된다.
죄 도모의 최초 관계였던 여자와 뱀이 서로 원수 사이로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죄의 근원적 본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죄는 바로 하나님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후손이 그것을 폭로시켜 줄 것이다. 뱀의 후손과 대결하는 것은 여자의 편에서 나타난 하나님 자신이다. 자신을 '여자의 후손'으로서 등장하신다.
여자와 남자를 하나님이 자기 전쟁에 참여시키시는 이유는, 죄에 연류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 어떤 아픔을 안겨 주게 되었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자의 후손은 뱀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상처를 입는다. 이러한 여자의 후손의 고통은, 여성과 남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될 징벌 안에 함께 있음으로 인해 뱀의 비천성으로부터 노출된 채 공격당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여자의 후손이 오히려 뱀의 후손의 정수리 침으로써 결국 승리가 보장된다. 그리고 주어지는 것은 생명의 상급이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에서 가죽 옷을 지어서 그들을 가리게 하므로 합당한 방비를 제공하고, 죄책으로부터의 멀어진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앞으로 시작되는 전쟁은 생명 있는 자와 생명 없는 자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생명 편에 서서 아담과 하와에게 치마를 입혀 줌으로써 죄에 대한 승리와 방어를 약속하신다. 즉 여자의 후손은, 아담과 하와에게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후손에서 하나님이 태어나기를 바랐다. 생명이라는 자기 이름에 합당한 자손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드디어 가인을 얻었다. 그 가인이 하나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가인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거절하므로 말미암아 생명은 달리 주어짐을 암시한다. 생명은, 죄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아벨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죽음의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된다. 아벨이 지닌 운명 속에서도 제단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운명으로 보여준다. 죽음이 생명이 되어 일어나는 경우를 보이는 것이다.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이 가야 될 운명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벨의 계통은 생명의 후손이다. 하나님의 후손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란, 죽음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다. 생명은 죽음 안에 들어있었고 거기서 일어난다.
생명 있는 자와 생명 없는 자의 싸움은, 지상에서는 오히려 기존의 생명이 버리움 당하는 자와 기존의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유지하려는 자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가인의 후예들은 기존의 생명을 지탱하는 체제를 건설하지만 아벨의 계통은, 죽음의 연속 가운데서 생명의 탄생을 보인다.
이로써 죄라는 것이 지상에서 어떤 형태로 등장되는가가 확연해 진다. 즉 죄란, 살려고 하는 의지이다. 반면 의란, 죽음 안에 있는 생명에 기대를 거는 삶을 말한다. 뱀과 여자의 관계는, 죄와 생명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가인 계통과 아벨계통의 투쟁사로 구성되어 간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이 두 계통의 성격은 가인 쪽이 오히려 지상에서의 생명 추구에 나서고 아벨 쪽은 죽음 속을 들여다본다. 자신들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 속까지 들어온 약속된 분의 죽음을 그들은 생명이라 부른다. 이것이 생명이 되므로 말미암아 기존의 생명은, 생명을 포장한 죽음임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전쟁은, 어느 쪽이 참된 생명인가를 판가름하는 전쟁이다. 지상에서 번성하여 살고자 했던 가인의 후예들의 삶과 생명의 질은 아벨의 계통의 노아에게 나타난 약속에 의해서 거짓임이 드러났다(창세기 7: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로서 멸망을 시켜 버린다. 그러나 노아의 생명은 방주 안에서 보호받는다. 왜 노아는 비호를 받았는가?
방주 안에서 정결한 짐승이 동승했기 때문에 노아는 그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자신과 가족의 삶의 근거를 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흠향하시고(창세기 8:21), 그 희생 제물의 죽음을 근거로 물로서는 세상을 멸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신다. 이제부터의 노아의 생명은, 하나님께 보호받은 생명이다. 이 생명의 질을 보다 더 근원적으로 밝히는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노아의 그 가족의 생명의 질에 도전하는 세력이 시작된다. 함과 가나안 계통이다. 이 함과 가나안 계통은, 셈과 야벳의 계통에 의해 정복당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두 세력 간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함의 계통이 바벨탑을 세우자 하나님은 헐어 버리고 그리고 그들을 각지로 흩어 버리셨다.
가나안 민족이 살고 있는 그 땅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아브라함 족속이 정복하게 되는 프로그램이 등장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약속의 인물인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 약속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었다. 그 희생 제사에 나온 위력은 원수의 성문도 활짝 열어서 적을 굴복시키게 된다(창세기 15:17; 22:17).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방패요 그리고 상급이라고 했다. 전쟁을 통해서 획득되는 전리품은 모두다 하나님의 희생의 결과이다. 거룩한 죽음 안에 있는 생명이, 기존의 생명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땅을 누릴 자격을 갖는다. 생명의 흐름은, 희생정신을 보이는 쪽으로 물꼬가 트인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난 자식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리고 이 쌍둥이는 태에서부터 서로 싸운다. 이들은 상호간의 투쟁으로 운명 지어진 자들이다. 이 투쟁을 통해서 한쪽은 승리자가 되고 다른 한 쪽은 패배자가 된다(창세기 25:23).
문제는 이들 일가족 전부 다 힘으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구분하려는데 있다.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신분을 사용하여 일방적으로 승리자를 결정지으려고 했다. 반면에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은, 꾀와 상대의 약점을 기화로 축복의 권한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정한 승리자는 따로 있었다. 그는 누구이며 무엇에 근거해서 승자가 된 것인가?
일단 축복의 대상이 된 야곱은 형으로부터 살의를 느끼고 도망가게 된다. 길 가다가 노숙하게 되는데 꿈에 사다리가 등장하면서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리고 그 사다리 위에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28:13-15).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야곱의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먼저 복의 근원이 되어 있어야 한다. 사다리 위에서 말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 했으니깐 야곱이 취할 복의 근원지로써의 자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동일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에서의 복이란, 희생 제물에서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희생에 눈이 열려져야 하고 그런 경험을 가져야만 한다. 바로 이런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그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는 천사를 야곱 주위에 보내는 것으로 확실해진다.
그런데 지금의 자세는 어떠한가? 여전히 힘을 의존한다. 그의 속임수는 여전하다. 전에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식을 잉태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갈과 관계해서 이스마엘을 잉태한 적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일단 그 자식이 앞으로 장차 자기의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복의 증거라 오인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에 태어난 약속의 자식의 이름이 이삭, 즉 웃음으로 지어진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인간의 비웃음의 요소를 내포시키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공로와 자랑을 삭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성만 부각시킨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곱이 가진 11 아들은 사실상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야곱과 똑같은 성품을 지닌 두 아내 상호간의 질투와 시기와 미움의 산실이었다.
이 야곱의 두 아내의 쟁투는 마치 야곱과 형 에서의 쟁투와 흡사하다. 양쪽 다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야욕에서 경쟁적으로 자식을 11명을 낳게 되는데 그래서 이 11명의 자녀는 그 위에 인간의 야곱적 탐욕이 담겨있다. 그리고 야곱이 재산의 축적을 위해서 무진장 열심히 삼촌 집에서 고생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털터리였다.
여기에 그 야곱적인 성품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야곱은 삼촌을 속여 실한 가축을 자기에게로 몽땅 빼돌리는 편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야곱의 본처 라헬은 자기 아버지의 우상까지 훔쳐내면서 야곱의 처로써 손색이 없다. 힘으로 뺏고 속이고 하는 이런 야곱의 속성은 여전하다. 이로써 야곱은 형 에서에게 이긴 승자인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많은 받아 낸 것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런 것은 어디까지 여전히 힘 차원이다. 많은 재산과 식구를 거느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일행 앞에 천사들이 나타난다(창세기 32:2).이 천사들은 바로 사다리를 통해서 보내진 천사가 틀림없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시기를 "네가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천사의 무리는 어떤 특수한 임무를 띠고 있는 듯했다. 야곱은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다. 즉 이 땅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적과 싸우기 위해 파병된 천사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천사들이 왜 야곱을 먼저 만나야 하는가? 야곱은 자신을 복의 근원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원수는 에서의 무리라고 보았다.
이 둘 사이는 영원히 싸워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야곱의 행렬에 에서의 무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떨어졌다. 야곱은 주요한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얍복 강 건너 편으로 돌리고 자기는 최후의 배수진을 친다. 밤이 깊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야곱에 달려들어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 야곱은 결사적으로 그 사람과 싸운다. 야곱은 그 사람이 왜 자기를 죽이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야곱에게 힘으로는 부치는 듯했다. 힘으로서는 도저히 야곱을 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정체는 밤이 끝나면서 드러난다. 이 사나이는 밤의 사나이였다. 즉 낮이 되면 떠나야 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야곱과 상관하면서 밤에 나타난 적이 있던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전에 벧엘에서 자기에게 내려온 그 천사 중의 한 분이었다.
자기에게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려온 천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축복의 상대를 그분은 죽이려고 했을까? 그것은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잘못된 복의 근원 인식을 지닌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힘의 원리 속에 태어나서 싸우고 살도록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희생물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나타나셔야 하는 그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꼭 희생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야곱이 모델케이스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원수 뱀의 후손들은 힘을 의지하고 복을 받아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식을 철저히 표방하면서 살아온 자들이 바로 야곱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에게 희생이라는 개념은 없다.
단지 힘으로 쟁취하고 속여서 자기의 복으로 간주하는 삶의 방식만 있었다. 거룩한 죽음 속에 있는 생명이 축복의 본질임을 그들은 몰랐다. 하나님께서 뱀의 후손과 어떻게 전쟁을 벌리시며 또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 내시는지 그들은 무지한 자들이었다. 천사는 떠나기에 앞서 초인적으로 돌변한다.
야곱에게 지는 그런 인간적 차원의 힘은 회수되고 초인적인 폭력이 야곱에게 가해져 그 동안 밤새 천사의 공격을 버티어냈던 그 힘의 근원지를 부숴버린다. 야곱은 이제 힘없는 약한 존재가 되었다. 형을 비롯해서 아무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비로소 야곱은 자기가 맞상대한 인물이 결코 지상의 존재가 아님을 알고 죽음을 의식한다.
이 순간 자기 힘으로 끌어 모은 재산과 자식은 결코 축복이 못됨을 직감했다. 어쨌던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자기는 복의 대상이 아닌가. 야곱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그러나 그 천사는 기어이 야곱으로는 더 이상 힘을 축복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원수로서는 살려두지 않는다. 야곱을 살리기는 살리되 여자의 후손의 속성이 담겨있는 모습으로 살려낸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뱀의 후손을 이기는 사명자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원수의 성문을 제대로 열만한 인물로 바뀌어서 태어나게 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과거와 앞으로의 운명이다. 이 운명 안에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 기능이 들어있게 된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뀜으로 인해 새로운 차원에서 싸움꾼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야곱 사상과 싸워야 한다. '야곱' 시절에 알고 있던 신은 우상이었다. 그 우상적 입장을 정복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가진 입장이다. 그 속에는 천사의 살려둠의 축복이 내장되어 있다.
이것이 정복의 근거이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 안에서는 죽은 야곱이 들어있다. 동시에 야곱보다 더 약한 존재로 야곱에게 다가왔던 하나님의 희생도 들어있다. 이 희생으로 많은 잡신들과 인간들을 이기게 된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축복으로 주므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팽창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인물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상에서 일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야곱은 이 이스라엘에 담긴 축복의 내막을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신다."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는 이름을 말해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에는 이스라엘 외에 다른 이름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름을 주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기능자를 말한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을 시작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오해하기를 자기가 마치 복을 받는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즉 자신이 복을 소유해서 받아 뭔가 일을 하게 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 축복이 야곱이라는 인간을 소유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것만이 축복의 대상이지 야곱은 축복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그 어떤 인물이 바로 축복되어야 하고 팽창되어야 하고 확산되어야 한다. 야곱은 단지 그 일을 위한 도구로 채용된 것뿐이다. 즉 이스라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 이것이 야곱의 위치였다.
그러니 장차 올 축복의 사람이 앞당겨 야곱을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장차 올 그 분은 희생정신을 가지고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잡신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이기게 될 것이다. 어쨌던 야곱이 이런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 것은 모두 약한 힘으로 야곱에게 접근했던 연약한 하나님의 희생정신에 있었다. 이 희생정신에 의해 야곱은 힘을 포기하는 인생이 된다. 이게 복의 사람이다.
야곱 속에 있는 그 정신으로 인해 야곱의 나라는 가나안 땅에서 적들을 이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이기 때문이다. 힘 의지하다가 힘의 근원마저 무너져 버린 야곱, 그런데 그 약한 모습의 야곱이 뱀의 후손들을 이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펼쳐진다. 더 이상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장차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희생에 모든 것을 사람에게 참으로 하나님은 방패가 되시며 상급이시다.
야곱이 에서를 이겨 승자가 되는 것은 섬김으로 가능했다(창세기 33장).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을(창세기 25:23) 야곱은 낮아지신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배워야 했다. 그 낮아지신 분이 사실상 주님이 되시는 분이다(창세기 27:29).복이란 섬김과 희생으로 전달된다. 야곱이 이점을 알았다.
얼마 못 가서 본처 라헬이 마지막 자식 베냐민을 놓고 죽어 갈 때, 라헬은 슬픔의 아들이라 이름 짓기를 요구했지만 희생정신을 이미 알고 있는 야곱은 오히려 그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로 짓는다(오른손의 아들). 즉 오른손 즉 능력이란 이런 희생의 슬픔과 죽음 속에서 새로이 잉태되는 것이다.
구원의 능력은 교회들의 교세 확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오직 그 피가 능력이다(고린도전서 1:18; 2:2). 이제부터 야곱이 싸움은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를 대상으로 한다.즉 힘을 의지해서 그 자체적 힘을 근거로 생을 연장하며 살려는 자는 모두다 야곱의 적이요 하나님의 원수이요 가인 계통의 사람이요 뱀의 후손들이다.
이 이스라엘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해서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게 이스라엘 국가이다. 이 이스라엘 국가를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른다(출애굽기 12:41). 단순히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다. 그리고 세력 확장을 꾀하여 국력을 신장하기 위한 군대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천군 천사와 같이 똑같은 기능을 해야만 하는 군대이다(열왕기하 6:17).
거룩한 군대이며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군대이며 따로 성별 되고 선택된 군대이다. 그러나 이런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가 택하신 이스라엘과 먼저 싸우신다. 희생정신이 사라진 이스라엘은 이미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국가이다. 힘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을 몽둥이와 지팡이로 사용하여 오히려 이스라엘 치게 된다(이사야 10:5).
이스라엘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한 국가가 아니라 일하기 위한 국가이다. 기능이 생존에 우선하기에 기능이 떨어지면 이스라엘도 망하는 나라이다. 적으로 삼아야 하는 뱀의 후손적인 국가를 대하면서 우호조약을 맺거나 협상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짓이다.
야곱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의 정신을 이해 못하는 이스라엘이나 이방 나라는 모두가 하나님의 적이며 뱀이다. 모세는 비러 이 뱀같은 애굽나라와 대결하기 위한 사명자로서 부름을 받는다(출애굽기 4:3). 그러나 그도 전에 야곱같은 시절이 있었다. 애굽나라의 지혜와 재능과 힘과 폭력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코자 한 것이다(출애굽기 2:12; 사도행전 7:22-26).
애굽 나라가 성립되는 그 원리로서 애굽 나라에서 빠져 나오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빠져 나온다 할지라도 그 나라는 여전히 애굽 나라이다. 애굽 나라라서 하나님이 적이 되는 게 아니라 애굽 방식을 가진 그 모두가 하나님의 적이 된다.
모세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아 나가던 모세도 할례 하지 않았던 아들 때문에 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출애굽기 4:24).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얼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피를 내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으셨다. 일시적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적이었다. 피 밖에 있었다.
아내가 모세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나에게 참으로 피 남편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은 애굽의 아들과 비교되어진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여호와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지만 여기에 비해 애굽의 장자는 죽임을 당한다(출애굽기 4:22-23)
하나님의 장자란, 하나님을 뵈어도 죽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길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것은 그의 아들이 하나님 소속이 아니라 모세에게 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장자를 구원하려 가면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장자 됨을 인식 못하고 있었다.
아내가 할례를 행하므로 말미암아 그 모세의 아들은 모세 계통에서 떠나 하나님 계통의 사람이 된다. 그 와중에 개입되는 의식인 할례는, 더러운 세상의 혈통을 끊는 의식이다. 할례 행한 자가 하나님이 아들이 되는 이유는, 이삭이 제물이 되는 할례언약 때문이다.
난지 8일 만에 할례 행한 그 이삭의 희생에 근거해서 그들이 죄 사함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계열 속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장자가 된다. 하나님이 할례 받은 장자들의 구원의 근거가 희생에 있음을 나중에 마지막 재앙 때 드러난다.
할례 때 흘린 그 피는, 본인들이 이 세상에서 이삭과 같은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피이다. 그리고 수치를 제거한 피이다. 이제 이삭과 같은 운명으로 제물이 되는 어린 양을 보고 그 속에 있는 생명에 모든 것을 던져 넣는 자들, 이들이 진정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내는 장자가 된다.
세상을 향해 전쟁에 나선 하나님은 진정 이들 편이다. 거기에 비해 어린 양의 피의 의미를 모르는 애굽은 군대를 동원에서, 여호와의 군대라 불리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했다. 이스라엘은 쫓겼고 애굽은 추격했다. 그러나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모세는 처음부터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에 나섰다(출애굽기 4:20).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그가 해야 하는 사명의 본질을 기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세를 보고 지팡이를 던져 보라고 했다(출애굽기 4:2). 그 지팡이는 곧 뱀이 되었다. 모세는 무서워하며 피하고 만다. 하나님은 모세보고 그 뱀을 잡으라고 하신다.
모세는 머리를 잡지 않고 시킨 대로 꼬리를 잡았다. 그러자 뱀은 금세 모세 앞에서 없어지고 모세 손에는 전처럼 지팡이만 들려있다. 전에는 모세가 단지 지팡이를 움켜잡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후에는 애굽이라는 뱀이 모세 손에 움켜잡혀 있다. 모세의 사명은 여기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뱀을 잡은 손 자체도 새롭게 변해야 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품에 넣어 보라고 했다. 넣었다. 다시 빼보니 문둥병이 하얗게 번져 있다. 이것이 모세가 구원해야 될 이스라엘의 위상이다. 저주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다시 손을 품에 넣고 빼보라고 하셨다. 시킨 대로하니 그 손은 저주로부터 벗어나 깨끗한 손이 되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치료 하려고 하신다. 그래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다(출애굽기 15:26). 모세의 지팡이는, 뱀의 후손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자기 백성에 대한 치료, 이 두 가지의 사명을 보이는데 사용될 것이다.
그 뒤 과연 뱀 같은 애굽을 마주하면서 모세와 아론은 10재앙을 통해 줄기차게 지팡이는 사용했다(출애굽기 7:9,10,17; 8:5,16; 9:23; 10:13). 홍해 가까지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결정적으로 섬멸하는데도 계속 지팡이가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이 무사히 애굽 진영에서부터 승리하면서 탈출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 어떤 애굽적인 방식의 국가 체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겁낼 것 없이 승리가 보장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팡이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권능이 어떻게 하면 계속 지속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은, 이스라엘을 치료하고 있는 궁극적인 근거를 지팡이가 연결해서 보여준 일로 통해 밝혀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자 하나님은 모세보고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고 하신다. 이것은 곧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데 그 반석은 보통의 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서있는 반석이다(출애굽기 17:6).
이스라엘이 맞아 깨어져야 할 것을 하나님 자신이 깨어지는 것이다. 모세와 다투는 것은 곧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다(므리바). 그들은 물이 없는 것을 보고 과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의 동행을 하나님의 동행으로 간주하지 못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자(맛사) 하나님은 자신의 동행을 반석이 깨어지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터져 나온 물은,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중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 깨어진 반석은 이스라엘의 원망이 결국 하나님 자신을 희생으로 몰아넣은 이유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원망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이스라엘은 대신해서 하나님 자신이 깨졌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스라엘은 치료받으면서 이곳까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희생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 새로 생긴 국가를 중심으로 뱀의 후손들 징벌에 나선다. 이스라엘이 치르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에 근거해서 승리로 가져오는데 그 방식은, 적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는' 방식이다(출애굽기 23:31).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는 모든 전리품들은,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들이다. 따라서 그 전리품을 수납하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된 입장에서 받게 된다. 하나님의 전쟁의 특색은 진멸하는데 있다.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전멸시킨다(신명기 2:34; 7:2,16,23,24; 13:5; 20:17; 여호수아 8:26; 10:28,40; 사사기 1:17; 사무엘상 15:3; 스바냐 1:2,3). 그 진멸의 전쟁에 이스라엘이 개입해서 수행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사적인 감정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의 감정 차원이다.
그 하나님은 질투를 하고 계시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 구현이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약 정신을 아는 자이다(민수기 25:10-13).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 계약대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상급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약이며 그 실현체이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계약적 사랑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감정 싸움에 동참시켜 왔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상황은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세상을 진멸하는 시점이다. 이사야 40:10에 보면,"보라 주께서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
상급은 반드시 보응에 대비되어서 주어진다(이사야 62:11). 저쪽에 보응이 있다면, 그 보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진멸 전쟁에 참전한 자에게는 상급이 주어진다. 그 상급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전쟁을 벌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상이 없게 된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상이 없다라는 말은 심판 받는 신분이라는 뜻이고 상이 있다라는 말은 심판에서 제외되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에 대한 파산 선고이다. 도끼가 나무뿌리 부분에 이미 놓여 있다. 공식적으로 전 인류에 대해 전쟁을 시작했다. 소탕작업에 나선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로마서 5:10; 골로새서 1:21).
이러한 원수 관계에서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화목관계가 제공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만이 기쁜 소식으로 받아 드리는 쪽은, 기존의 인간 세계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게 된다. 이들은 선지자 외침에 민감해 있다.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있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저주받은 자에게 은혜와 무상의 용서와 긍휼이 떨어진다고 했다(이사야 61:1-3).
슬픔에 있는 자가 즐거워하고 근심으로 가득한 자가 찬송으로 가득한 날이 온다고 소개했다. 또 치표하는 광선을 기다렸던 자이다(말라기 4:2). 그리고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는(말라기 4:6) 이러한 은혜의 해를 기다리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환희의 복음으로 영접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즐거워하는 자는 옛날 선지자 모양으로 핍박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처럼 하늘의 상이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12). 즉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비참한 대우를 자초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등장해서 보복하시고 복수하시는 그 날이 오기에 끝까지 하나님 나라만을 고대하게 된다. 상이란, 보응과 함께 등장된다. 상 받는 쪽이 있으면 이 외의 자들은 보응을 받는다. 상도 안 받고 보응도 안 받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세상을 부정하고 불로써 심판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가 상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강론하셨다. 현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사는 자에게는 상이 없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사랑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46). 하늘나라는 하늘나라다운 삶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식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의식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누가복음 14:12-14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구제를 해도, 기도를 해도, 금식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들은 하늘나라에 상이 없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위와 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자기네들이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상을 차지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법 지킴으로 보상으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멸망의 이유에 대해서 전혀 무지몽매한 자들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진정 알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 본질의 회복 불가능성이다.
상한 심령, 이것은 성신이 오지 않고서야 치유되질 않는다(시편 51:11). 이미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육체의 행함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죄의 열매를 가지고 상을 받겠다는 시도에 불과하다. 벌 받을 짓을 해놓고서는 어처구니없게도 상을 달라는 것이다. 상이 어디에 근거해서 주어지며 무엇 때문에 제공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상이란, 상을 주시는 쪽의 취지가 계속 남아있는 대상에게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상 수여자의 판단과 결정은 상 주는 쪽의 권한이다. 만약 선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가 있다면 선지자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상을 수여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분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된다(마태복음10:40-42).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 이외에는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을까?
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풀어서 둘 씩 짝을 지어 세상으로 보내어 진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마가복음 9:41)고 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일을 제대로 구분하여 그들에게 대접하는 것에는 곧 상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곧 하나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 그리스도로 집중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은(요한복음 6:29), 역사의 종말 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상 받을 사람은, 종말 때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된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 3:8에 보면,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다. 상 받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자체에 있지만 상을 받게 되는 위치와 정황은 사람마다 다르게 된다. 어떤 이는 심다가 상 받게 되고 어떤 이는 물 주다가 상 받게 된다.
이처럼 상 받는 자의 하는 일이 가지각색인 이유는, 상이라는 것이 결코 자기의 하는 일을 근거로 받게 되는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상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현 인간사고의 근원성을 노출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이유가 인간들의 근원적인 죄질을 폭로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면 상급 개념에 대한 고발감이다.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의 자체적인 재질과 재능과 수완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이런 저런 점을 고려해서 상급도 인간의 노력에 상응에서 차등을 두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무지에 대항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상을 공개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 나라는 뱀의 나라를 쳐 부시는 나라이다. 뱀은 인간세계를 선악의 체제 위해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 선악 체제란, 은혜의 체제를 붕괴시켜 없애버리는 것이다. 인간들의 자체적인 선을 축적하여 그 선으로 하나님과 같은 선의 세계를 이룩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서 배제시켰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알아야 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선악 체제의 구성하고 있었다.
이 체제는 악마에게나 적용될 체제이다. 인간은 선악의 아들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아들이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인간들이 타락하고 난 뒤에 인간들은 선악 체제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 악을 행하게 되면 가차 없는 저주와 심판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과연 완전한 선을 인간이 손수 행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 하셨다(마태복음 19:17). 따라서 인간이 완전한 선을 행하려면 하나님을 완전히 빼다 박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독자 선언을 해 버렸다. 이것은 그 어떤 형태로도 하나님의 방식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는 말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제사 수납에 대해 못마땅해 하면서 안색이 달라진다. 하나님은 이것은 악이라고 불렸고 너는 그 덮쳐 오는 악을 이겨야 한다고 당부했다(창세기 4:7).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악의 사자가 되는 것이었다. 악이 인간의 본질 부분을 차지해 버린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충동과 합치되기 때문이다.
신이란, 독자적인 체제를 구성하기 마련이고 특히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자기가 홀로 영광으로 회수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상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취지를 무시하고 인간 자신의 수고와 땀과 희생과 노고를 바탕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고집 부리는 것이다.
인간들 개개인이 작은 신들로 군림하기 때문에 상이라는 것이 마땅히 차등이 있는 것으로 당연시하게 된 것이다.하나님이 특별히 법을 제공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 성향은 더욱 더 노골화되었다. 천하고 더러운 강도나 창기나 세리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행위로서는 축적된 선이 없기에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바리새인들이 종교계 인사들은 늘 말씀과 율법에 전폭적으로 몸을 던져 넣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도 상이 푸짐하다는 것이다. 과연 이 둘 중에 누가 의인이며 의인에 해당되는 상을 받을까?
누가복음 18:9-14에 다음과 사실이 나온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자기에 기초한 행위에 그 어떤 의와 선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치 세리처럼. 세리가 의인된 것은, 그가 자기를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한 그 순수한 고백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에게는 그 어떤 선과 의의 아무런 기초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인이 된 것은 외부에서 날라온 의가 그 속에 심겨진 경우일 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우성치는 그 세리의 심령은 정말 상한 심령 그 자체를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누가 봐도 그 속에 선이나 의로움이 없음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바로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실체를 바로 알려 주는 일이었다. 세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의 관계만 염두에 두고 기도할 따름이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했던 인간은 이 세리처럼 선악 체제 속해 있지 않았었다. 하나님은 본래의 인간만을 원하신다.
이런 자들의 모임이 하늘나라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일을 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똑같이 자신들 속에는 선이나 의가 전혀 없음을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때의 심판주로 오신 분에게 긍휼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상이 있다.
심은 자가 물주는 자와 견주면서 누가 하늘나라에서 상이 더 큰가를 비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다 자신의 속에는 꺼낼 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라게 하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고린도전서 3:6)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었을 뿐이다.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이다(고린도전서 3:22-23). 오직 모두 다 그리스도만 보여질 뿐이다. 상 받는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어야 한다(고린도전서 3:11).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력을 훼손할 만한 것은 모두 다 타버린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공력을 보여주는 자는 상을 받는다.
부질없는 자기 자랑은 모두 다 해로 돌아올 것이다. 결국 그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지 자기 공력이 아님이 드러나게 된다(고린도전서 3:13-15). 하는 일의 다양성이 상호 간에 우월 비교로 드러나는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성향들로 인해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새로 구성하신다. 즉 다양성 중에서 단일성을 바라 볼 수 있는 백성들은 자기 나라의 사람으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의 공력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의 설명하면서 무상개념을 도입한다. 왜 자신은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상으로 받은게 있기 때문이다. 그 상은 복음을 전하는 직분이다.
복음을 무상으로 전하므로 말미암아 복음 자체에 참예된다.9:23에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결국 사도 바울이 말한 썩지 않는 면류관, 즉 상이란 복음과 그 세계를 말한다.
에베소서 4:4-8에 보면,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요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뱀과의 전쟁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어 주신 이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물과 은사는 그 승리하신 한 분이 출처가 되어 나와야 마땅하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라는 대목은 왜 교회가 한 몸이어야 하는 이유를 뒷받침해준다.
성도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은,그리스도 한 분의 수고의 결과이다. 그 분이 용사가 되셔서 적들을 사로잡고 자기 백성에게는 승리의 댓가를 선물을 주셨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직접 전쟁에 참여 하지 못한 집안에 있는 부녀자와 형제에게도 같은 노획물이 돌아가는 원칙과 맥을 같이 한다(시 68:12;민 31:27;수 22:8). 따라서 선물을 주시는 분이 한 분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면 각자의 상급에 차등이 있을 수 없다. 모두다 동일하게 한 분으로부터 받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승리의 댓가가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주가 도시는 그분의 영이시다. 성령의 선물은 비록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특징은 모두 한결 같이 오직 선물 주시는 그 한 분의 당사자로 모아지게 된다. 하나로 모아지는 은사가 아니면 가짜 은사이다.
은사 받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은사는 주님께서 선물로 준 성령이 아니시다. 따라서 상이라 하는 것은, 은사로 주의 일에 참여된 모든 자에게 돌아간다. 그 모든 공로는 주님의 사역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이상 성도가 결코 될 수 없다.
따라서 은사 받지 않은 성도는 없고 주의 일에 참여되지 않는 성도도 역시 없게 되며 결국 상이 없는 성도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성도는 모두 상이 있다. 더 나아가서 상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기 때문에 상에 차등이란 있을 수 없다.
혹시나 경솔하게 생각해서, 성도가 주의 일에 나태해 버리면 상에도 차등이 나는 수가 있지 않는냐에 걱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는 이유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직접 성도 개개인을 위해 친히 기도하시기 때문이다(로마서 8:26). 성령 하나님의 기도는 효능은 완벽하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무응답으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로마서 8:27). 반드시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되어 있다. 아들의 형상에도 무슨 차등이 있는가? 모든 성도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상을 향하여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 상은 '부름의 상'이기 때문에(빌립보서 3:14) '불러주심' 그 자체가 상을 받을 근거가 된다. 상은, 그 상을 지향하도록 불러준 그 분에 의해서 제공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상은 과연 무엇인가?
골로새서 3:24에 보면,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유업의 상'이란 곧 상의 내용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유업이다. 유업이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내용이 성취 완성될 때 생겨나는 그 무엇이다.
무엇이 생기는가? 고린도전서 6:9에서,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유업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마태복음 25:34; 로마서 8:17; 고린도전서 6:10; 15:50; 갈라디아서 5:21; 히브리서 11:9; 야고보서 2:5; 요한계시록 21:7).
그런데 이 유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로서 제공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방패와 상급은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레위 지파에게서도 유산은 오직 하나님 그 자체였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여호수아 13:33).
레위 지파에게도 기업은 이었지만 어쨌든 땅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지파에 대해서 장자의 위치에 있었다(민수기 3:12-13), 장자란, 아버지의 속성을 담아 보여주는 운명을 가진 자들이다. 즉 희생의 속성을 보이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에게 땅이 없고 하나님이 자체가 기업이 된다는 말씀은, 다른 지파와는 달리 땅에 대한 자신들의 노동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그들에게 양식을 보장하며 삶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영원한 기업의 원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 받은 자도 하나님께서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데 그 속성은 영생의 상태이다. 갈라디아서 3:14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성령의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 된다면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예수님과 같은 신분이 되어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는 그 유산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신분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도는 아들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골로새서 1:13)을 같이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상으로 주어지게 되니, 지상에 있는 자에게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 상은 썩어질 상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의 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상이 크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큰 상 따로 있고 작은 상 따로 있는 말이 아니다. 이 지상의 고난과는 족히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나다는 말이다(로마서 8:18).
성경에서 말하는 상은 결국, 상을 받는 신분과 그 내용이 모두다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 세상 적인 관점에서의 상급 개념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작업을 보다 독려하기 위한 성과급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지금 우리는 추진하고 있는 일은 상이 걸린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의 작업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선을 얻을 수 없을까 하여 우리들끼리 경쟁을 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나태한 사람은 천국 가더라도 상이 거의 없이 겨우 불 가운데 구원받게 될 것이고, 예수도 믿지만 그 바탕 위에 더욱 더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은 하늘에 큰 영광된 상이 기다린다. 그러니 여러분, 구원받았다는데서 자만하지 마시고 더 큰 상급을 위해 매진합시다!" 하는 식이다.
이 이론을 여지없이 깨어지는 경우는 요한계시록 4:10 앞에서이다.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주께서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면서 24장로들이 말로만 하고 있나? 자기가 쓴 면류관을 그분의 보좌 앞에 던지고 있음을 주목해 보라. 왜 던졌겠는가? 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그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종되었기 때문에 면류관은 하나님이 가지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모든 것은 아버지께 바치신다(고린도전서 15:24). 세상 적인 상의 개념으로 봐서는 상 부여받음과 상이 차등이 개인의 자질과 노력과 애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상은 주어지게 된다. 상의 출발선이 인간 본인이다. 거기에 비해 하늘의 상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의에 근거한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이사야 45:8).
그 구체적 내용은, 예수님의 피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처음부터도 완전한 것으로 창조 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완전함 그대로 유지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의에다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만한 같은 레벨의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상의 의의는, 상 받는 자가 상 주신 자의 영광을 위해 상을 받는다는데 있다. 상 받을 근거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주시는 분의 공로임을 증언하기 위해 상급을 받는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주신 의를 자신들이 모방하고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선악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 체제상에서는 인간은 무엇이든지 다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선과 악을 자유자재로 조정해서 행할 수 있다고 여긴다. 선을 행하고 싶어도 악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존재임을 로마서 7:22-24가 말하고 있다.
중생된 자나 중생 되지 않는 자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똑 같다. 단지 성도는 자기의 의를 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보일 수 있는 자이고, 불신자는 내 보일 수 있는 주님의 의가 없다는 차이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악마의 나라를 부숴버린 그 결과로 생긴 나라이다.
따라서 그 나라에 속한 자들은 세상 나라의 원리를 이미 청산한 자들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성이 훌륭해서 청산된 게 아니라 오직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날마다 죽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청산된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자기 의란 모른다. 단지 값없이 마신 생명수만 기억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2:17).
그 생명수는,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려 나오는 생명수이다. '어린 양'이라는 표현, 그것은 희생 제물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 희생 제물은 자기 백성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함이다.
여호수아 5:9에서 할례 의식이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려가게 했다. 이사야 54:4에서는 백성이 수치를 당치 않게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로마서 10:11에는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최초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치를 가려준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서 가죽옷을 입힌 일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의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뱀의 후손에게는 이러한 가려줌이 없이 수치가 그대로 폭로된다(유다서 1:13).이 죄악에 대한 수치는 사정없는 심판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신다(하박국 1:13). 죄에 대한 전면전, 이것이 인류가 처한 운명이다. 의가 없는 이상 하나님의 저주를 당해 낼 도리는 없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자기의 택한 백성들 속에 계시게 한다. 아브라함에게 방패와 상급으로 작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적을 공격하게 된다.
적이 가진 힘은 자체적인 악에서 나온 힘이라 결코 방패가 될 수도 없을 뿐더러 승리의 상급도 가질 수 없다. 오직 상급은 승리한 자의 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법이란, 인간 나라에서는 힘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활용하는 틀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오히려 이러한 힘을 버려야 하는 나라이다.
거기에는 힘과 힘의 만남이 아니라 불쌍히 여김과 불쌍히 여김을 받음으로 형성되는 사랑의 나라이다. 법이란, 선악 체제에서 나온 것으로 법을 계속 고수하는 자들에 대한 형벌로 작용하게 된다. 주님의 희생을 거부하는 자들은 계속 법을 고수하고 선악 체제를 지탱하려 한다. 이것은 자기 자랑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발은, 스스로 서겠다는 심보로서 마치 신처럼 굴려고 한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종교를 만드는데 법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의 수치와 죄악을 가리려고 한다. 자기를 가리는 수단으로서의 교회이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가지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려는 사람이다. 즉 사랑을 외형적으로 법으로 전환시켜 지속적인 자기 의를 제조하고 그것을 자기의 외모의 내용으로 삼으려 한다. 인간 중심에 하나님이 사랑이 도달되면, 그 사람은 다시는 외모에 관심 두지 아니하게 마련이다.
외모에는 인간들이 자기 약점을 가리기 위한 자기 과시 거리가 더덕더덕 붙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를 꾸미는 외형으로 사용하려는 사람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기가 상 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사용하려고 한다. 이 거짓된 상급론이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게 된다. 사랑을 훼손하고 막아서는 이 시도는, 주님의 희생의 터전에 자기의 노고를 수고를 심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쪽에서의 불쌍히 여김을 비웃는 이 이론은 결코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질 것이다.(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사랑을 대신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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