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법 (김서택)
1. 서론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높은 봉우리들을 정복하는 루트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쪽 등선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북쪽 등선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한편 아직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발견되지 않은 루트도 있을 것이다.
성경을 해석해 내는 것은 설교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듣는 것은 -목사의 교양 강좌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오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의 사역에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작은 책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는 마치 거대한 산과 같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엄청난 산을 과연 어떻게 오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물론 누구든지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 몇 달 안에 성경 전체를 한 번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산을 비행기나 헬기를 타고 한 번 대충 훑어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높은 산의 지반 아래, 땅 속 깊이 묻혀 있다. 교인들이야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목회자는 단순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서 저 땅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진리를 캐내어야 한다.
탄광이나 금광 같은 곳에 가보면 작은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타고 끝없이 땅 속으로 들어간다. 한참 밑으로 내려간 뒤에도 옆으로 한참을 더 가야 석탄이나 원석을 캐내는 막장에 도달할 수 있다. 막장에 도착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금이나 은 같은 원석은 다시 제련을 하여 불순물을 제거해서 순수한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높은 산에서 금이나 은을 캐낸다고 하자. 무턱대고 땅을 파 들어간다고 해서 금이나 은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금이나 은이 나올 수 있는 지형이나 지맥에 대하여 연구를 해야 하고 또 그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 땅을 찾아내어야 한다.
성경은 시간적으로 무려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며, 그 시대적인 상황이나 메시지를 나타내는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법이 있고 예언의 글이 있는가 하면 또 수많은 시가 있다. 심지어는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적인 표현들도 많이 있다. 더욱이 같은 성경이라고 하면서도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있다. 이러한 책을 어떻게 통일된 입장을 가지고 - 하나의 높은 산을 넘듯이 - 정복해 나갈 수 있겠는가?
2. 성경에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
어떤 높은 산을 정복할 때 아무 준비 없이 그냥 올라가다가는 조난을 당하여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 속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먼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국어 편지가 아주 서툴렀고,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아무리 읽어도 도저히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 뜻을 다 안다고 하셨다. 부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투를 잘 이해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성경을 읽음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많은 철학자들이 욥기를 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전도서까지 읽으면 더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내는 대 서사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한 채 무턱대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남의 편지 묶음을 훔쳐서 읽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성경을 부분적으로 깊이 읽기 이전에 성경 전체를 여러 번 다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로 완성된 것이기에 전체를 알지 않고 부분만 가지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분명히 오류에 빠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경을 여러 번 전체적으로 읽다 보면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나 지리 등에 대하여 성경 자체가 많은 정보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 성경을 읽는 사람이 당황해 하는 것은 이상한 이름이 나왔을 때 이것이 사람의 이름인지 지명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을 여러 번 읽다 보면 성경의 역사적인 배경과 지리적인 상황에 대하여 눈에 선하게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데 이것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밑천이 된다. 우리가 성경을 잘 해석하는 방법은 성경의 세계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반복해서 많이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 번째로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입문서를 읽는 것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여러 가지 특이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들은 기독교 안에서만 독특한 개념을 가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속죄’라든지 ‘회개’라든지 ‘하늘나라’라든지 하는 것들은 일반인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표현들이다. 사실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을 만들었을 때 처음부터 완벽한 기독교 교리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종의 성경 입문서로 이 책을 저술한 것이었는데 결국 기독교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강요와 같은 교리서를 몇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말 성경은 ‘번역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나 신약의 그리스어가 영어나 한국어와는 상당히 다른 문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문장에서 주어 없이 동사만으로 문장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동사 안에 인칭이나 수 같은 것이 표시되고 주어는 생략된 문장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여 문장을 만들어 내려면 의역을 통해 주어를 짐작해서 넣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성경 번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해석적인 번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뜻이 모호할 때에는 영어 성경을 함께 보면 뜻이 좀 분명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의역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원래 히브리어나 헬라어 자체의 의미도 불분명한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거나 주석을 참고해야만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좋은 주석을 참고로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주석 책은 지금까지 성경 신학자들이 본문에 대하여 연구한 결실이기 때문에 반드시 참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신학자마다 성경에 접근하는 입장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주석을 선택해야 한다. 설교자가 좋은 주석을 선택하는 일 자체가 이미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는 일이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나는 설교자의 정의를 ‘성경을 해석하여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지금부터 아주 오래 전에 기록된 책일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사상이 사람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다른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를 길어 내는 것에 있다.
3. 성경 신학자와 설교자의 역할
설교라는 것은 마치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원석을 캐내어서 그것을 제련하여 금이나 은을 만든 후에 다시 가공하여 손님들이 필요로 하는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 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금반지를 하나 산다고 할 때 그 과정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금광을 발견해서 원석을 캐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원석을 제련해서 순수한 순금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순금을 구입해서 반지로 만든다.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금반지 하나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설교를 하기 위하여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그는 이미 여러 신학자들이 수고한 열매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이 이미 번역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누군가가 수고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성경에 대한 여러 주석서가 있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이 이미 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금맥을 찾고 원석을 캐내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러한 수고를 십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수고를 무시하고 늘 독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데 물론 해석을 잘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금이 아닌 것을 - 자기가 파내었기 때문에 - 금이라고 우기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 신학자들은 성경의 광맥 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원석을 캐내는 광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도구가 있다. 그 도구를 비평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평학이라는 것은 성경을 나름대로 연구해 들어가는 성경 신학자들의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적으로 여러 비평학이 생기고 있다. 이것은 곧 성경을 연구하는 도구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구 중에는 목회자에게 유익한 도구들도 있고 반대로 유익하지 않은 잘못된 도구들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에 고등 비평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여 인간이 만들어 낸 문서로 보는 것으로, 헤겔식의 변증법에 의해 성경을 철저히 분해하여 연구하였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었고 그런 성경 연구는 서구 교회를 죽이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복음주의적인 성경 비평학이 많이 발전하여 편집비평이나 정경비평등 문학적인 특성에 따른 연구 방법이 많이 개발되었다.
한편 설교자들은 성경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모두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는다.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이 독자적인 성경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는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교회를 부흥시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사용하되 독자적으로 성경 안에서 진리를 캐내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진리를 캐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가공을 하여 교인들에게 꼭 필요로 한 상품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신학자들을 과학자라고 한다면, 설교자나 목회자는 과학자이면서도 예술가이어야 한다. 캐낸 진리를 그냥 교인들에게 던지는 대신, 반드시 그들에게 필요한 완성된 제품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성경 안에서 진리를 캐내는 과정은,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물을 길어 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물은 깊은데 물을 길을 수 있는 두레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물을 길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은 마른 데 우물은 깊고 두레박도 없다면 어떻게 물을 길을 수 있겠는가? 사실 지금 많은 교회의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모두 성경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읽으며 성경으로 설교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깊은 우물에서 물을 제대로 길어 오지 못하고 여기 저기서 물을 빌려 와서 물을 마시는 꼴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설교집에서 물을 빌려 오고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잡지나 시사주간지에서 그 물을 빌려 온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빌려 온 물로는 교인들을 더 목마르게 할 뿐이다. 설교자는 신학대학원에서 3년 이상 신학을 공부하는데 이것은 앞으로 교회를 맡게 되었을 때 독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교인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지, 3년에 모든 공부가 끝난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럼 이 엄청난 진리를 길어 낼 수 있는 우물의 입구는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교회’이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단순히 인간들끼리 만나서 교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진리를 캐내어 서로 나누어 가지기 위해서이다. 설교자가 교회에서 설교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아직 어느 누구도 제대로 완전하게 탐험해 낸 적이 없는 거대한 원시림을 탐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정글 안에 들어간다면 아마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성경은 그 안에 이야기도 있고 역사도 있으며 시나 법도 , 상징, 편지도 있다. 마치 엄청난 정글과 같은 것이다. 대개 성경을 처음부터 차례로 해석하려고 시작했다가 해석이 안되는 부분이 많아서 기겁을 하고 설교를 중단한 경험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성경 자체가 거대한 원시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설교자의 영광은 이 엄청난 정글 속에 뛰어 들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엄청난 진리를 끌고 나와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 있다. 이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다.
4.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들
(1) 교리적 접근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 해석 원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전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풀어야 바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감히 성경에 인간적인 생각을 덧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교리를 발견하고, 성경 전체에서 그 교리와 관계되는 말씀을 찾아 진리를 설명하고 확정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였다. 특히 주로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했으며, 그들이 남긴 설교들은 주로 교리적인 설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한 성경(예를 들면 로마서나 에베소서)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교리적인 방법으로 본문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한 본문에서 가장 먼저 성경의 교리를 찾았다. 그리고는 성경 전체에서 그 교리와 관계되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서 본문과 연결하며 설교를 하였다. 물론 그가 한 설교 방법이 성경 인용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본문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사용하였는데, 청중들에게 본문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어느 것이 과연 가장 옳은 해석인지 연관되는 성경을 통하여 확정하곤 했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도 경고했던 것처럼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 것'(벧후 1:20)은 위험하다. 많은 사람들이 강한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을 가장 안전하게 해석하는 방법은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 방식’이다. 물론 성경에 대하여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나름대로 자신이 성장한 교단의 신학적 틀 안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걸림돌이 될 때도 있지만 안전하게 지켜 주는 보호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교리적인 성경 접근은 성경 본문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을 제한할 수도 있다. 성경에는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도 있으며 이것들이 우리 삶에 풍부한 실제적인 모범을 제공해 주는데, 교리적으로만 접근하다 보면 이를 놓칠 수 있다. 물론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잡한 일상에서 단순한 교리보다는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어한다. 그래서 성경을 교리적으로만 해석하다 보면 교인들은 설교를 딱딱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교리적 해석은 성경 자체가 말씀하는 풍성한 내용을 충분히 누리기보다는, 성경을 어떤 교리의 증거 구절(proof text)로만 사용하게 한다.
(2) 구속사적 접근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역시 구약 성경이다. 구약 성경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쓰여진 상황도 오늘과는 너무 다르고, 특히 신약 성경과의 연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본문들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대두된다.
어떤 분들은 단순히 하나의 교훈이나 예화로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복음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원래 종교개혁자들은 구약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들을 우리 신앙을 위한 모범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 생각했다. 결국 여기서 나오게 된 고민이,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연결시킬 수 있는 어떤 통일성 있는 원리가 없겠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 해석의 한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셨는데, 곧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는 말씀이다. 즉 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구속사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단순히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구약 성경 전체를 특정한 원리를 가지고 꿰뚫어 보려는 접근법이다. 최근 ‘언약’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구약 성경 전체를 보려는 시도가 있었는가 하면 (팔머 로벗슨),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각을 가지고 구약 성경을 관통해서 보는 시도도 있었다(존 브라이트 등).
원래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의 원리는 1930년대 화란에서 시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지나치게 주관적인 발트의 변증신학에 대한 반발과 역사적 본문에 대한 모범적 해석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증가하면서,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정점으로 하는 구속사적 흐름에서 보아야 바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한때 화란 내에서는 ‘구약의 역사적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모범적으로 해석할 것인가’하는 활발한 논쟁이 있기도 하였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오직 성경」). 이러한 논쟁은 이차대전이 터지고 독일군이 화란에 진군함으로써 소멸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이 논쟁 자체가 그다지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었던 원인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도 실제로는 모범적인 해석을 하고 있었고 모범적인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도 반드시 모범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방법 모두 다 쓸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나라 안에서 설교를 위한 성경 해석의 방법을 두고 이런 논쟁이 있었다는 자체가 설교학적으로 보면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속사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성경을 조직 신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신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분들은 두 가지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첫번째는 구약의 역사적인 본문을 역사의 점진성의 원리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의 역사는 단편적인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라는 정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세의 출생이라든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 등은,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켜 가는 과정에서 보아야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러므로 구약의 어떤 사건들을 볼 때 거기서 자기 마음대로 교훈을 얻으려고 하는 대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나 구원 계획을 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은 구약 성경의 뼈대를 찾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뼈대가 없이는 어떤 것도 제대로 만들어질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구속사적인 해석은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뼈대를 찾는 노력이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통일성 원리를 찾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해석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뼈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뼈대만으로 모든 것이 다 충족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생선에 있어 생선뼈는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는 생선뼈를 먹기 위하여 생선을 잡거나 사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생선뼈는 딱딱하고 맛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더 좋아하는 것은 생선뼈에 붙어 있는 살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오직 구속사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는 분들은 교인들에게 딱딱한 생선뼈만 먹이는 것과 같다. 구약의 많은 사건들은 물론 구속사적인 의미도 갖지만, 한편으로는 또 모범적이고 교훈적인 삶의 지혜를 주기도 한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 15:4). 구약의 사건들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서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주는 풍부한 교훈적인 의미가 있었고 이것은 또한 우리들에게 큰 믿음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3) 석의적 접근
성경의 내용은 신적인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말이고 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편으로는 거룩한 경전인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다양한 문학 장르로 구성되어 있는 사람의 글(Literature)이며 인간의 다른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문법에 적용을 받는다. 우리가 책에서 시를 읽을 때는 시로 그 내용을 읽고, 기행문이나 수필을 읽을 때에는 또 거기에 맞는 방법으로 읽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많은 역사적 기록이나 시 혹은 편지 등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느냐를 파악하려면 성경 한 절 한 절에 대하여 문법적으로 해석을 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을 ‘석의’(exegesis)라고 한다.
석의는 무엇보다 먼저 단어의 뜻을 살피는데, 그것이 명사인 경우에는 수나 인칭 혹은 남녀의 성을 통하여 혹은 문장 안에서 그 명사가 주어인지 아니면 목적어인지를 살핌으로써 이 명사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낸다. 한편 동사인 경우에는 시제나 태를 통하여 그리고 접속사 등을 통하여 전후 문맥을 통해서 정확한 의미를 알아내는 작업을 거친다. 그러니까 먼저 어떤 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본문에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를 하나씩 하나씩 문법적으로 해석해 나감으로써 본문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내는 것이다.
사실 강해 설교가 가능하려면 본문의 석의가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지 거기에 무슨 해석이 필요하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은 주로 법률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많이 발달해 왔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법률적인 다툼이 생겨 법정에 그 문제를 가져오면 결국 판단을 내리는 것은 법률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률 한 조항에 대한 해석 여하에 따라서 엄청난 이해 관계가 좌우된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가 해석되어져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시제나 인칭 하나의 차이에 의하여 교리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다툼도 결국에는 성경 해석으로 판가름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철자 하나의 차이로 교파가 갈라지기도 한다.
물론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은 원본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사본이나 번역본까지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서로 상이한 본문을 두고서 어느 것이 더 원본에 가깝겠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도 있고 상이한 번역본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원래 저자의 의도가 가깝겠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할 때도 있다.
최근에는 귀납법적인 성경 공부가 많이 보급되었는데 이것은 교리 공부와는 또 다른 풍성함과 기쁨을 안겨 준다. 특히 이미 만들어진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성경을 해석하는데서 오는 유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교리가 ‘남이 만들어 주는 밥을 먹는 기쁨’이라면, 석의는 ‘자기가 직접 밥을 만들어 먹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4) 케뤼그마적 접근
성경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냥 허공에 외쳐진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여러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하나 하나가 구체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선포된 말씀이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가 있지만 창세기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창조에 대한 연대나 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그 원래 목적은 아니다. 이미 오랫동안 애굽에 살아 왔기 때문에 애굽의 범신론이나 종교 다원주의에 빠져 있는 출애굽 세대에게 인격적인 하나님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강이나 가축이나 태양 같은 우상이 아니라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신 인격적인 분이심을 그들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신약의 여러 서신들을 보면 지역의 이름으로 된 교회에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개인에게 보내어졌는데 그도 그냥 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대표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케뤼그마(khvrugma)라는 말은 '선포’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 말을 쓸 때에는 (고전 1:21) 선포의 내용으로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케뤼그마적 해석’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과거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된(proclaimed)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어느 한 구체적인 공동체에 선포된 말씀의 의미를 그들의 입장에서 바로 파악한 후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의 공동체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접근 방법을, 한 편으로는 이미 선포된 진리라는 뜻으로 ‘케뤼그마적 접근’이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와 교회를 연결시킨다는 의미에서 ‘교회론적 해석’이라고 하기로 한다.
이런 입장에서 논문을 쓴 사람이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이다. 그는 자신의 화란자유대학 박사논문에서 ‘성경은 그 말씀이 선포되었던 최초의 청중 입장에서 해석되어져야 가장 바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원 도서명: Sola Scriptura). 다시 말해서 최초의 청중들이 알아듣지 못했을 해석을, 지금 성경을 해석하면서 억지로 집어넣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래에는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synoptic gospel)이라고 하여 어떻게든 서로 조화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각 복음서의 역할이 다르며 대상으로 했던 구체적인 공동체도 달랐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 보편적이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있어, 오늘 우리의 시각을 가지고 해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이다. 그러나 그 비유를 대하는 각 사람의 입장은 많이 다른 듯하다.
우선 우리에게 있어 사후의 지옥이라는 개념은 그리 생소하지 않다. 이미 불교의 영향으로 사후 세계나 지옥의 개념에 대하여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익숙한 것이 오히려 우리를 잘못된 해석으로 이끌 가능성이 아주 많다. 즉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권선징악이라는 동양적인 사고로 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이 비유를 다른 관점에서 본다.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도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는 이 비유 때문에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갔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상징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자를 당시 아프리카나 인도를 착취하던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로 생각했고 가난한 거지는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나라의 사람들로 생각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 위하여 독일을 떠나 아프리카로 간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당시의 청중들은 불교나 제국주의 같은 것은 알지도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는 자’라고 했을 때 금방 생각나는 사람들은, 바로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던 바리새파인들이었다.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종교적으로도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부잣집 문에 앉아 개와 함께 있는 자’라면,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죄인 취급을 당하던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병든 사람들이었다. 바로 예수님의 청중 안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모두 차지했다고 믿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며 죄인 취급당하던 세리나 병든 자나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교회 실정은 어떠한가? 오늘 점점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난’에 대해 기피하며 꺼리고 있다. 신앙이 좋은 것은 곧 이 세상에서도 잘되고 축복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목회자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생각이 교회를 변질시키며 복음이 복음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과거 그 말씀이 선포되었던 상황에서 이해되어져야 가장 바르게 이해될 수 있으며, 바로 그 메시지를 오늘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이 설교자가 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5) 경건주의적 접근
요즘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큐티(QT)라는 것을 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단순한 성경 읽기와 다른 점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개인의 삶에 깊이 적용시키면서 성경을 읽어 나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고 나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라는 식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이다. 결국 이 방법이 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명령이나 교훈으로 규칙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저자의 의도보다는 내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어떻게 순종할 것이냐에 그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이런 성경 묵상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경건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방법의 장점은 어느 성경이나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나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보기 때문에, 어렵고 까다로운 본문에서도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법의 가장 큰 약점은, 혼자 주관적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설교를 할 때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자기중심적으로 은혜 받은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대중을 설득시키는데 약하다는 것이다.
대신 이런 접근법은 나중에 설교가 교인들에게 적절히 적용되도록 훈련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분은 성경을 잘 해석시켜 놓고서 교인들에게는 전혀 적용시키지 못하고 설교를 끝내는 경우가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다. 설교자 자신의 삶에 먼저 깊이 적용이 되어야 교인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적 접근은 강해설교 방식으로는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설교자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그리고 설교가 교인들에게 적절하게 적용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강해설교가 제대로 되어지려면 설교자 자신이 성경을 경건적 접근방식으로 묵상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귀납적으로 성경 연구를 잘하시는 분들이 적용에 약한 이유는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잘 훈련되어 있는 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주관적인 훈련은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5.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 접근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것으로 성경 연구의 모든 방법을 다 다루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외에도 주제별 공부나 책별 공부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나, 다만 설교학적으로 설교자가 본문에 접근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중에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이 성경에 접근하는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업하는 기술자에게는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고 요리를 하는 요리사에게는 여러 가지 칼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들 역시 이 여러 가지 도구들을 자유자재로 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설교를 가장 역동적으로 만들고 어느 장르의 본문이라도 잘 감당하게 하는 방법은 케뤼그마적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방법은 최초로 성경이 선포되었던 그 상황에서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장점이다. 게다가 성경 시대의 교회와 오늘 시대의 교회를 연결시킴으로써 교회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단지 단점이라면 성경 시대의 상황을 우리가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희박하며 많은 부분을 논리적인 추론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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