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제6장-하나님의 자기희생 / 6-1. 구약의 희생제도

JORC구원열차 2009. 11. 11. 08:31

제 6 장

하나님의 자기희생

 

크로포드는 “하나님이 어떤 때는 그분의 속성 중 한 가지에 따라서 행하고 다른 대는 또 다른 속성에 따라서 행하신다고 가정하는 것은...아주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동시에 그 모든 것에 합당하게 행동하신다. ...특별히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자비에서, 그분의(그리스도) 사역의 목표는 그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속함으로써 그 줄을 함께 드러내어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현시된 것은 이 두 속성 사이의 반작요(counteraction)이 아니라, 결합된 행동(combined action)의 실례인 것이다.

 

어떻게 심판을 통한 그분의 거룩과, 용서를 통한 그분의 사랑을 동시에 나타내실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대속물을 제공하여서 그 대속물이 심판을 받고, 죄인은 용서를 받게 하심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대속물’은 누구인가? 또한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준다는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정당화할 것인가?

 

6-1. 구약의 희생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의 희생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약에 나타나는 교훈의 모든 중요한 유형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프로습호라, prosforav)과 생축(뒤시아, qusiva)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바울이 말한 때와 같이 어떤 때는 그 언급에 모호함이 없을 때도 있다(엡 5:2).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 혹은 ‘자신을 드렸다’(히 9:14)고만 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 사상의 배경 역시 구약의 제사 제도이다. 특히 그분이 ‘죄를 위하여’ 혹은 ‘죄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진술(롬 8:3, 벧전 3:18)은, ‘속죄 제물’을 헬라어로 번역한 말(페리 하말티아스, periv aJmartivaς)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희생을, 구약의 ‘그림자’를 완전히 성취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그것들은 대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인류학적인 연구에 먼저 착수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들, 제단들 그리고 희생 제물들이 고대 세계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히브리의 제사 제도와 이방인의 제사 제도가 동일한 것이었다고 가정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구약에서는 다양한 경우에 제사가 그려졌다. 구약의 제사는 회개, 절기, 국가적 필요, 언약의 갱신, 가족적 축제, 혹은 개인의 봉헌과 관계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구약 계시 속에는 제사에 대한 두 가지의 근본적이며, 상보적인 개념이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개념은 인간 존재는 당연히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생각이며, 이에 대한 특징으로는 ‘화목’ 혹은 ‘교통’의 제물(이는 자주 감사와 연결된다. 레 7:12), 소제(이 제사는 모든 것이 불에 태워진다)와 세 번에 걸친 연중 추수 축제가 있다(출 23:14017).

 

두 번째 개념은 인간은 그들의 죄와 죄책 때문에 하나님과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특징은 속죄제와 속건제인데, 여기서는 속죄의 필요성이 분명하게 인식된다. 이 두 종류의 제사가,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자 하는 뇌물은 차치하고, 선물을 드리는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다른 하나는 용서와 화목을 제공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제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사들 속에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육체적 생명을 위하여 의존해야 하는 바 창조주로 계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요구하는 재판장인 동시에 속죄를 마련하는 구주로 계시된다. 이 두 지 제사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재판장과의 화목이 창조주에 대한 예배에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후자가 전자의 기초라는 인식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성전을 정결하게 할 때 번제에 앞서서 ‘온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먼저 드린 것은 신중한 의미가 담기 일이다(대하 29:20-24). 또한 가인이 드린 제사와 아벨이 드린 제사가 모두 ‘민하’(hj;n_m, 선물제공)라는 동일한 말로 불렸지만, 우리는 그들의 제사에서도 두 종류의 제물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인의 제물이 거부된 것은 그가 아벨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히 11:4). 가인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거슬러서, 속죄보다도 예배를 앞에 놓았든지, 아니면 땅의 소산은 바치기는 하되 그것을 창조주께서 주신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가 아니라, 자기가 드리는 선물인 것처럼 왜곡시켜서 드렸을 것이다.

 

대속의 개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한다는 것, 특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당함으로써 그를 그 고통에서 풀어주기 위하여 대신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름이 야훼의 책에서 지워지더라도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용서만 받는다면 기꺼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 모세의 이타심을 우리는 존경한다(출 32:32).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숫양을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다’(창 22:13). 모세가 만든 법에 의하면, 해결되지 않은 살인사건에서, 그 마을의 장로들은 먼저 자신의 결백을 선언한 후에, 밝혀지지않은 살인자 대신 어린 암소를 희생시켜야 했다(신 21:1-9). 미가는 이 대속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떻게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할지에 관하여 독백하면서, 과연 자기가 번제나 동물이나 강 같은 기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까, 혹은 심지어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제시한 대답이 종교 예식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라는 사실, 특히 그가 아들을 자기 대신 희생시킨다는 끔찍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미가가 구약의 제사 제도에 깊이 새겨진 대속의 원리를 거부했다고 할 수는 없다(미 6:6-8).

 

레위기의 처음 몇 장에 자세히 서술된 바에 의하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소제는 고기와 피가 아닌 곡식과 기름으로 되어 있어서 다른 것들과 형태가 다르므로, 이것은 주로 다른 제물들 중의 하나와 함께 드려진다. 나머지 네 개의 예물은 피의 희생이었으며, 예물을 드리는 적절한 상황이나 그 피와 고기가 사용되는 정확한 용도와 관련하여 비록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제사들은 예배자 그리고 제사장과 관련해서 동일한 기본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그 동물에게 안수함으로써, 분명하게 스스로를 그 동물과 동일시하였으며, ‘그 제물이 자기를 대신한다는 것’을 ‘엄숙하게’ 표시하였다. 안수하는 것을 ‘예배자의 죄가 그 동물에게 전가됨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었다. 어쨌든 죄에 대한 형벌은 사마이라는 인식하에, 그 동물은 예배자를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고, 죽음이 이루어졌다는 상징으로 피가 뿌려졌으며, 그 동물을 바친 자의 생명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의식에서 피의 희생 제사가 대속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피뿌림과 피흘림이 속죄의 필수적인 이유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진술은, 피를 먹는 것을 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이 본문에는 피에 대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선언되고 있다.

첫째, 피는 생명의 상징이다.

‘피는 생명이다’라는 이런 이해는 매우 오래된 생각인 것 같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생명의 피’(lifeblood)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고기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으며(창 9:4), 이 금령은 뒤에 ‘피는 생면’(신 12:23)이라는 공식으로 반복된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의 상징인 혈관 속을 흐르고 있는 피가 아니라, 피를 흘리는 것, 즉 대개 폭력적인 방법에 의하여 생명이 끝나는 것을 상징하는 피흘림인 것이다.

 

둘째로, 피는 속죄를 이루는데, 그것이 대속이 되는 이유는 ‘생명’이라는 단어의 반복에서 발견된다. ‘피가 사람의 생명을 속하는 것’은 오직 ‘피조물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생명이 버림을 당하는 것, 즉 다른 생명이 대신 희생당하는 것이다. ‘단 위에서’ 죄가 속해지는 것은 대신하는 생명의 피를 흘림으로써이다. 크로포드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그 분명하고 뚜렷한 의미대로 희생 의식의 대속적(vicarious) 성격을 가르치고 있다. 생명을 위하여 생명이 드려졌다. 즉 예배자의 생명을 위하여 제물의 생명이 드려진 것이다.” 실로 “죄 있는 예배자의 생명을 위하여 무죄한 제물의 생명이 바쳐진 것이다.”

 

셋째로, 이런 속죄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 피를 주신 것이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제사 제도를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각각의 제사를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인간의 꾀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내리신 속죄의 방편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러한 구약의 배경은 히브리서의 매우 중요한 두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첫 번째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구절이고, 두 번째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다.”(히 10:4)는 구절이다. 피가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말은, 대신하는 것이 없이는 속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생명을 위한 생명, 혹은 피를 위한 피가 있어야 한다. 대속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비중이 같아야 한다. 동물의 제사는 인간을 위하여 속할 수 없었는데,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이다(마 12:12).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벧전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