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5-4. 하나님이 스스로를 만족시키심

JORC구원열차 2009. 11. 11. 08:27

5-4. 하나님이 스스로를 만족시키심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기 전에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섯 가지로 표현했다. 어떤 사람은 마귀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마귀를 전복시킨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 명예 혹은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을 말하고, 마지막으로는 ‘세상의 도덕 질서’를 만족시키는 것을 말한다. 각각 정도는 다르지만 이 모든 공식화된 표현은 어느 정도는 참이다.

 

하나님에게 ‘만족’의 필요성은, 그분 외부의 어떤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 속에서, 그분의 불가변적인 성격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재적인 혹은 본질적인 필연성이다. 하나님이 순응하셔야 하며, 하나님이 만족시키셔야 하는 법은, 그분 자신의 존재의 법칙이다. 소극적으로 말한다면, 그분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며’(딤후 2:13), 자신과 모순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딛1:2)(거짓이 없다; 압슈데스, ajyeudhv"). 하나님은 결코 방자하거나, 예측이 불가능하거나, 변덕을 부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시 89:33). 적극적으로 그분은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다(신 32:4). 즉 자신에게 참되시며 언제나 변함없는 그분 자신이신 것이다.

 

성경은 몇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관성(self-consistency)에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특히 그분이 죄인을 심판하셔야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진실되시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그러하다.

 

그 첫 번째 실례가 분노를 격발한다는 표현이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의하여 ‘격발되어’ 분노나 질투, 혹은 그 모두를 갖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하나님 안에는,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거룩한 불관용이 있다. 하나님은 결코 이유 없이 자극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것은 오직 악이며,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이셔야 하므로, 반드신 악에 대하여 진노를 발하셔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악에 대해 진노를 격발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의 존경을 상실할 것이다. 그때는 그분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불사른다는 표현이 있다.

그 불이 ‘불붙음’, ‘활활 타오름’, ‘소멸함’, ‘다 태워 버림’에 관하여 이야기 한 동사들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도 ‘분노로 불붙는다’는 말이 사용된 것이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이 진노로 ‘불탄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분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분노가 ‘격발되는’ 때다. 결국 우리는 ‘그분의 분노의 불길’ 혹은 ‘그분의 질투의 불길’이라는 말을 읽게 되는 것이다. 지기 백성의 완고한 반항을 ‘더 참으실 수 없었을’ 때 야훼께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셋째로는, 만족이라는 어휘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어야 한다는 진리, 하나님의 내재적 성품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진리,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성품에 의한 요구들은 하나님 편에서의 적절한 행동으로써 만족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확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으뜸 되는 단어가 ‘카라’(hl;K;)인데, 에스겔은 특히 이 단어를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완성되다’, ‘끝내다’, ‘이루어지다’, ‘성취되다’, ‘다 소모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여러 다양한 문맥에서 등장하며, 어떤 것이 파괴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완성되든지 간에 거의 언제나 ‘종국’을 의미한다. 에스겔을 통하여 야훼께서는 유다를 향하여, 그들 ‘위에’ 혹은 그들을 ‘대하여’그분이 진노를 ‘성취’, 혹은 ‘만족’, 혹은 ‘소모’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하신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겔 7:7-8). ‘쏟고’(pouring out)와 ‘이루어서’(spending)가 함께 나타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쏟아진다는 것은 다시 모아질 수 없으며, 소모된 것은 그대로 끝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애가 4:11에는 이와 동일한 두 개의 표상이 짝을 이루어서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hl;K;)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실로 야훼의 진노는 ‘소진’ 될 때에야 ‘끝이 난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악 때문에 그들에 대한 질투의 분노가 ‘격발된다.’ 일단 불이 붙으면, 그 진노는 ‘활활 타오르며’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그분은 그 진노를 ‘풀어 놓으시며’, ‘쏟으시며’, ‘소진시키신다.’ 이 세 개의 어휘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분의 내부에서부터 또한 그분의 거룩한 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그리고 이 진노는 그분의 품성과 완전히 조화되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일관성을 강조하는 네 번째 방법은, 이름이라는 어휘(language of the N믇)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 행하신다. ‘그는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신’ 것이다. 그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출 34:6). 비록 그분이 언제나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우리를 다루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그분의 계시된 본성과 일관된 방식으로 행하신다. 에스겔 20:44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4장은, 야훼께서는 지금도 그러하시지만 앞으로도 그분의 이름, 즉 자기 자신에 충실하시리라는 인식을 매우 철저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시기는 비참한 가뭄의 상황이다. 우물에는 물이 없고, 땅은 갈라졌으며, 농부들은 당황하고, 동물들은 정처를 잃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1-6절). 그런 극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7절). 다른 말로 하면 “비록 우리가 우리의 어떠함을 근거로 해서 당신께 일하라고 호소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당신의 어떠하심을 근거로 해서는 그렇게 호소할 수 있나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기억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과 변함없는 성품에 일관되는 방식으로 행하실 것을 애걸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덧붙인다(8-9절). 심판은 없고 평화만 있다고 한쪽으로 치우친 메시지를 전하던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13-16절), 예레미야는 ‘칼, 기근 그리고 염병’(12절)을 예언하였다. 하지만 그는 또한 심판 이후의 회복을 보았으며, 야훼께서는 그에게 ‘주의 이름을 위하여’ 행동할 것을 말씀하셨다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다(21절).

 

에스겔 36장에서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922절). 그들은 야훼의 이름을 더럽혔으며, 야훼의 이름이 멸시를 받게 했으며, 심지어 이방 국가들에 의하여 그 이름이 모독을 받게 했다. 하지만 야훼께서는 열방이 그분이 야훼시오 살아계신 분임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21-23절).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움직이신다는 것은, 단지 자기 이름이 오해되는 것을 막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에 참되게 행하기로 결심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기 일관성에 관한 성경의 이런 모든 자료에 비춰 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하고자 하지 않으시며, 또한 실제로 할 수도 없으신가?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인간, 특히 타락한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참된 인간성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