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6-2. 유월절과 ‘죄를 담당함’

JORC구원열차 2009. 11. 11. 08:35

6-2. 유월절과 ‘죄를 담당함’

 

유월절을 논의하는 첫 번째 이유는, 원래의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2)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 달을 달력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그 달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오랜 애굽의 압제와 굴레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 탈출이 그들로 하여금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애굽과 언약에 앞서서 유월절이 있어야 했다. 그들은 그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켜야’ 했다(출 12:14,17).

 

두 번째 이유는, 신약성경이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월절의 성취와 동일시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을 새로운 출애굽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36)으로 환호했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요한의 연대표에 따라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이 정확하게 유월절 양이 죽음을 당하는 바로 그 시간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심지어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그의 피로 인간들을 사서 하나님께 바친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경배를 받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것은 바울이 단언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고전 5:7-8).

 

그렇다면 최초의 유월절에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 또한 그 일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 주는가?

 

유월절 이야기(출 11-13장)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세 가지 역할로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이다.

첫째로, 야훼께서는 자신을 심판자로 계시하셨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마지막 재앙의 경고가 주어지던 때였다. 모세는 가장 엄숙한 말로 바로에게 경고하기를, 한밤중에 야훼께서 애굽을 지나가면서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처치하시리라고 하였다. 이 일에는 인간과 동물, 혹은 사뢰적 계층에 따른 차별이 없을 것이며, 모든 초태생은 죽을 것이다.

 

둘째로, 야훼께서는 자신을 구원자로 계시하셨다.

그 달의 제 10일에 이스라엘의 각 집은 어린 양(일년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택해서 그 달의 14일에 죽여야 했다. 그렇게 한 다음에 그들은 그 양의 피를 취해서 우슬초를 그 피에 담구었다가 그 피를 현관의 좌우 설주와 안방에 뿌려야 했다. 또한 그들은 그날 밤 동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었다. 피를 쏟고 뿌렸으므로 그들은 그 아래에서 피난해야 했다. 왜냐하면, 시판으로 애굽을 ‘통과’할 의사를 이미 선언하신 야훼께서 이제 피의 표시가 있는 각 집을 ‘지나침’으로써 그 집들을 위협적인 파멸로부터 지키겠다고 부언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야훼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건지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야훼께서 그들을 심판으로부터 건지셨을 때 그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경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월절 밤에 그들은 쓴 나물과 무교병과 함께 불에 구운 양고기를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즉 구원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것을 먹었다. 식사의 어떤 요소들은 그들의 이전 압제를 말해 주었고(쓴 나물), 또 다른 것들은 그들이 얻을 미래의 해방을 말해 주었다(그들의 옷차림). 그런 연후에 매년 그 절가가 오면 그 잔치를 칠일 동안 계속하게 됐으며, 또한 그들은 자녀들에게 그 전체 의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장자를 위한 특별한 의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게 구원을 얻었으므로 그들은 특별히 피값으로 그들을 사신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따라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바쳐져야 했다.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희생 속에서 유월절의 성취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분명하다.

첫째로, 심판자와 구원자는 동일한 분이다. 초태생을 심판하기 위하여 애굽을 ‘통과하신’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집들을 ‘지나치신’ 하나님이시다. 둘째로, 구원은 대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양이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가족의 장자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셋째로, 양이 피를 흘린 다음에는 그 피가 뿌려져야 했다. 즉 하나님이 마련하신 대책을 각 사람이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니은 ‘피를 보아야’ 그 가족을 구원하셨다. 넷째로, 하나님이 구해 내신 각각의 가족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값을 주고 사신 바가 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전 생애는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이다. 봉헌은 잔치로 연결된다. 구속받은 자의 생활은 축제인데, 그리스도의 감사 축제인 성만찬 속에서 이것은 하나의 예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대속의 원리에 대한 두 번째 주된 예화는 ‘죄를 담당함’의 개념이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벧전 2;24) 것을 읽을 수 있으며, 또한 이와 유사하게 그분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신’ 것을(히 9:28)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죄를 담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말은 죄의 형벌을 담당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종류의 대속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 말은, 범죄한 쪽의 죄책을 담당하고서 그를 대신하여 그 형벌을 담당하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무죄한 대속자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대속이 있을 수 있는가?

 

지난 백년 동안, ‘형벌의 대속’(penal substitution; 여기서의 penal은 ‘형벌’ 혹은 ‘징계’라는 의미의 poena에서 유래된 것이다; 콜라시스, kovlasi")을 거부하면서도 ‘대속’이라는 어휘를 계속 사용하려는 많은 기발한 시도들이 있었다.

 

존 캠벨(John McLeod Campbell)의「속죄의 본질」(The Nature of the Atonement, 1856)에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는데, 특히 인간의 죄를 담당하러 오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대하시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감당하신 형벌적인 고통’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에 기인하는 그 ‘만족’은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한 고백’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셨으며, ‘또한 그 완전한 응답 속에서 그분은 그 진노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성부의 의로운 정죄의 느낌으로 충만할’ 만큼 성부와 하나이셨으며, 또한 “그 정죄에 대하여 완전히 ‘아멘’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와 하나이셨다. 이런 방식에 의하여, ‘죄를 담당함’은 동정으로 용해되어 들어가고, ‘만족시킴’은 죄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용해되어 들어가며, ‘대속’은 대신 받는 형벌 대신에 대신하는 회개로 변하는 것이다.

 

“갈보리 위에 통나무가 보이기도 전에 하나님 안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그분의 탄생, 생애, 죽음 속에서 표현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이 사랑의 희생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속죄는...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변화로서, 우리는 그 변화에 의하여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관적인 속죄’(즉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노를 푸시는 것이다.’

 

구약의 용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에 의하면, ‘죄를 담당한다’는 말은 죄인을 동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또한 그들의 회개를 표현해 준다는 의미도 아니며, 혹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혹자의 주장처럼 대신 핍박을 당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또한 사적인 견제에서 혹은 사회적인 견제에서 죄의 결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특별히 죄의 결과인 형벌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그 표현은 레위기와 민수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자기의 허물, 혹은 죄를 담당하리라”고 말하는 데 사용된다. 이 말은 그들이 ‘책임을 질 것이다’ 혹은 ‘죄로 인해 벌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어떤 때는 형벌이 구체적으로 명시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있다. 범죄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며, 신성 모독의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이 ‘너희의 죄악을 지고’ 광야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민 14:34). 만약 결혼한 남자가 아내의 어리석은 맹세 혹은 서약을 무효화시키지 못하면 ‘그녀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그가 진다’(민 30:15).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다“. 또한 주후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후에, 만약 그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완전히 황무지가 되었을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열조는 범죄하여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애 5:7).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누우라고 말씀하시고 극적인 상징적 수법으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겔 4:4-5). 속죄 제물도 죄를 담당한다는 견지에서 이야기된다.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이 사실에 관해 말했다.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레 10:17). 일년에 한 번 돌아오는 속죄일의 예식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회중 전체의 죄를 속하고자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숫염소 둘’을 잡는다(레 16:5). 그 중 한 마리는 희생되어 통상적인 방식대로 그 피를 뿌리지만, 살아 있는 염소에 대해서는 대제사장이 그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었던’(21절)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냈으며,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지고 무인지경’(22절)으로 나아갔다.

 

크로포드는 이렇게 해석했다. 각각의 염소는 동일한 희생의 서로 다른 측면, 즉 “하나는 속죄의 수단을, 다른 하나는 속죄의 결과를 보여 준다”. 이 일에는 속죄일의 공적인 선언, 즉 화목은 오직 대속적인 죄의 담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선언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또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히 2:17)으로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그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는 희생 염소(히 9:7,12)와, 백성의 죄를 지고 떠나는 속죄 염소(히 9:28)로도 보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의 유명한 ‘조의 노래’에서 이사야는 열방을 가슴에 품을 사명을 띤 한 사람,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하고 죄를 담당하며 죽어야 할 한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태는 그 종의 사역의 조용함과 부드러움에 대한 첫 번째 노래를 예수님께 적용했으며, 베드로는 초기 설교에서 네 번에 걸쳐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 혹은 ‘거룩한 종’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님께 적용되는 구절은, 특히 그 종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이다. “구약의 구절들 중에서 이사야 53장만큼 교회에 중요한 구절은 없다”고 예레미아스는 썼다. 신약의 저자들은 여덟 개의 특정한 구절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구절을 인용하였다. 1절(‘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이 요한에 의하여 예수님께 적용되었다(요 12:38). 마태는 4절(‘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의 진술이 예수님의 병 고침의 사역에서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마 8:17). 우리는 양같이 제 길로 갔다는 것과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구절(5,6절)이 베드로에 의하여 반복되고 있으며(벧전 2:22-25), 이 단락에는 또한 9절(‘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과 11절(‘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이 인유되고 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고, 공의와 생명을 빼앗긴 예수님에 대한 구절인 7-8절을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읽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빌립이 그에게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행 8:30-35). 이와 같이 그 장에 있는 열두 개의 구절 중에서 여덟 개의 구절, 즉 1,4,5,6,7,8,9,11절이 매우 구체적으로 예수님께 적용되고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자신의 이사야 53장 언급을 여러 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장의 단어 하나를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멸시를 당하리라’, ‘빼앗길’,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등이다. 또한 그분은 예비적으로 기름을 바르는 절차도 없이 예수님이 설명하신 대로, 범죄자처럼 ‘묻힐’ 것이었으므로, 베다니의 마리아는 그분의 몸에 향유를 부어 ‘내(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다른 인유로는, ‘제물을 나누는’ 강한 자에 대한 그분의 묘사, 재판장들 앞에서의 그분의 의도적인 침묵, 범죄자들을 위한 그분의 도고, 그리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림 등이 있다. 만약 이런 구절들까지도 받아들인다면, 이사야 53장에서 2절(“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을 제외한 모든 구절이, 어떤 때는 몇 번씩 반복해서, 전부 신약에 인용되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세례 시에 예수님은 자신이 와서 죄를 담당해야 할 그 사람들과 자기를 의도적으로 동일시하셨으며, ‘모든 의를 이루겠다’(마 3:15)는 그분의 결심은 자기가 죄를 담당하고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사 53:11)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되겠다는 결심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하늘에서 들린 천부의 목소리, 즉 하나님 자신은 자기 아들을 ‘기뻐한다’는 그 목소리 또한 예수님이 종이사라는 것을 밝혀 주셨다고(사 42:1) 했다.

 

빈센트 테일러(Vincent Taylor)도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최초의 사도의 설교에서 이미 “지배적인 개념은 죽음의 수욕을 당하고 높임을 받으신 조의 개념이다...”라고 지적했다. 최근의 튀빙겐의 마틴 헹겔(Martin Hengel)교수는 이와 동일한 결론을 내리면서, 이사야 53장은 예수님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이사야 53장이 예수님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해에 얼마나 근본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가? 그것은 바로 그분의 죽음은 죄를 담당하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첫 번째는 ‘대속물에 대한 말씀’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여기서 예수님은 ‘인자’ 예언과 ‘종’예언이라는 서로 상이한 예언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인자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며, 모든 백성이 그를 섬길 것이다(단 7:13-14). 반면에 종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길 것이며, 수난에 의하여, 특히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놓음으로써 그의 섬김을 완성할 것이다. 두 번째 말씀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던 때 하신 말씀으로서, 거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 53:12의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라는 말씀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길 수 있었는데, 이는 그분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체 장의 핵심은, 단순히 예수님이 멸시를 받고 버림을 당하며 압제와 고통을 당하고 도살자 앞에 끌려가는 양 같으며 산자의 땅에서 끊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불법을 인하여 찔릴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실 것이고, 그는 죄인과 동류로 취급될 것이며, 그가 죄인들의 죄책을 담당하리라는 것이다.

 

죄를 담당하는 성격을 지닌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이런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이제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단순한 진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위하여’라는 단어는 ‘휘펠’(uJpevr, 위하여)로 번역될 수도 있고, ‘안티’(ajnti, 대신하여)로 번역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구절은 ‘훼펠’로 되어 있으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8), 혹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고후 5:16) 등이 있다. ‘안티’가 사용된 구절은 오직 대속 구절(ransom verse)들 즉 마가복음 10:45(직역;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적으로 주기 위하여’)과, 디모데 전서 2: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 여기서 ‘위하여’는 역시 ‘휘펠’이지만, 전치사 ‘안티’가 명사인 ‘안틸뤼트론’<ajntivlutron, 구속, 대속물>속에 들어있다)이다.

 

좀 더 넓은 의미인 ‘휘펠’(위하여)도 문맥상 ‘안티’(대신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이라고 할 때, 혹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인 빌레몬을 ‘위하여’ 즉 빌레몬 대신으로 로마에 머물면서 자기를 돕게 하기를 원한다고 했을 때(몬 13절) 등이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관한 가장 노골적인 두 진술에서도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상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으며(갈 3:14),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죄 없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죄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저(그리스도)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고후 5:21).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를 보여준다. 즉, 우리로 그분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그분이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고, 우리로 그분의 의로움과 함께 의롭게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죄와 함께 그분 자신이 죄가 되셨던 것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런 전이를 ‘전가’(imputation)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려고, 즉 우리에게 그것을 ‘묻지’ 않으려고 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것을 대신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려 하시기 때문이다.(고후 5:19).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의미는, 비록 품성과 행동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 성장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품성과 행동 면에서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의로운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구약의 모든 자료, 즉 피흘림과 피 뿌림, 속죄제, 유월절, ‘죄를 담당함’의 의미, 속죄 염소와 이사야 53장 등을 재검토하고 이것들이 신약에서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것을 수고해 보면, 우리는 십자가를 재속적인 희생(substitutionary)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