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누가 그 대속물인가?
정확하게 누가 우리의 대속자였는가?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우리의 저주가 되었으며, 우리의 형벌을 지고서, 우리의 죽음을 죽은 것인가? 분명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8). 이 그리스도는 누구였는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이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위해 디신 죽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혹은 정단하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단순히 하나님으로서, 인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인간을 대표할 수 있었는가? 이런 문제들 외에도 질문은 더 있다. 그가 어떻게 죽을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만도 아니고 단순한 하나님만도 아닌, 유일한 신인(God-man)으로서 독특하게 구성된 그의 인격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 할 수 있는 독특한 자격을 갖춘 존재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속의 가능성은 대속자의 신분에 의하여 좌우된다.
첫 번째 제안은 그 대속자가 인간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 이해되며,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제삼의 구별된 개인으로 조명된다. 그들은 십자가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가, 그리스도에게 있는가에 따라서 십자가를 다음 두 가지 방식 중 어느 한 가지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가 개입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이 별로 베풀고자 하시지 않는 구원ㅇ을 억지로 빼앗아 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다른 한 가지는 그 사태에 개입하는 주체를 하나님으로 그리며, 그리하여 하나님이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 죄인들 대신 무죄한 그리스도를 형벌하신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서로 분리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설득하든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형벌하시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주장의 특징은 성부를 모독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을 꺼려서 그리스도를 대신 희생시키는 셈이 되든지, 혹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그리스도 때문에 할 수 없이 용서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때문에 그 노를 누그러뜨려야 하며,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지로 극복해야 하는 무자비한 괴물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propitiation, 요일 2:2)이며, 아버지 앞에서의 우리의 ‘대언자’라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이 말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노를 달래기 위하여 죽었으며, 또한 지금은 하나님을 설득해서 우리를 용서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화목 제물과 대언이라는 말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 속에서 먼저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며’(눅 1:7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함이며’, ‘모든 사람에게 구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를 인함이다.
또 다른 공식적인 해석, 즉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형벌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그 속죄 염소에게로 전가된 것과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즉 고난당하는 종에게 담당시키신 것은 사실이다(사 53:6).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고’(사 53:10), 또한 하나님이 ‘목자를 치시리라’는 스가랴의 예언을 예수님이 자신에게 적용시킨 것도 사실이다. 신약 성경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으며’(요일 4:9-10), 우리를 위하여 그를 ‘내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며’(롬 3:25),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롬 8:3), ‘우리를 대신하여 그로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고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로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그 일을 하는 데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담당하셨던 것이다.(예, 히 10;5-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형벌 하신다든지, 혹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설득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제각기 행동하며, 심지어는 서로 갈등관계에 있기라고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벌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설득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모두 주체이지 객체가 아니시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함께 주도적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버리심’(God-forsakenness)아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십자가상의 모든 일은, 속죄를 반드시 이루고자 하시는 거룩한 같은 사랑 안에서 이 두 분이 자발적으로 수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이’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다. 만약 성부께서 ‘아들을 내주신’ 것이라면, 아들이 또한 ‘자기 자신을 내준’ 것이다. 만약 겟세마네의 그 ‘잔’이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성부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며(요 18:11), 아들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택한’ 것이다. 만야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셨다면’, 성자는 스스로 ‘온’ 것이다. 성부께서는 성자가 꺼리는 시련을 그에게 가요하지 않으셨고, 성자는 성부께서 베풀기를 원치 않으시는 구원을 억지로 탈취한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형태의 불화가 있었다는, ‘그것이, 성자가 성부로부터 억지로 구원을 빼앗아 낸다는 식의 불화가 되었든지, 성부께서 성자에게 내키지 않는 희생을 강요하는 식의 불화가 되었든지’의 기미는 전혀 없다. 성부와 성자의 뜻은 사랑에서 우러난 완전한 자기희생 속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제삼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대속자(substitute)가 아니라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인가? 만약 우리가, 성부께서 실제적으로 하신 일을 무시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주도권을 높이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 역할을 완전히 뒤집어서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모든 주도권과 공로를 성부께만 돌려도 되는 것인가? 만약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직접 이루셨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군더더기가 되는 것이 아니가?
거룩한 사랑인 자기를 만족시켜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을 희생시키고 사랑으로 행하고자 하지 않으시며, 혹은 사랑을 희생하고 거룩으로만 행하고자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죽어서, 죄인이 담당해야할 심판을 담당함으로써 자신의 거룩한 사랑을 만족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가요하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그것을 당하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는 말씀에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용구’ 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키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분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되어서 죽음을 당하기 위하여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것이다(빌 2:6-8). 이 세대의 관원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분은 ‘영광의 주’였다(고전 2:8). 또한 구속받은 자들의 옷을 정결하게 씻는 그 피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의 중심에 함께 있는 어린 양의 피인 것이다(계 5:6,9; 7:9). 더욱이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죽으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을 요구한다. 그 논리는 ‘언약’과 ‘유언’의 유사성을 근거로 해서 전개된다. 유언의 내용은 유언자가 죽은 후에만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언장에 약속을 기록해 놓은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죽어야만 유산이 상속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므로, 죽음 또한 하나님의 죽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히 9:15-17).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구절이 또 하나 있다. 바울이 밀라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연설에서 나타나는 구절이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돌보도록 맡기신 그 양떼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바울은 말한다(행20:28). 어떤 사본은,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를 지칭해서 ‘주의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듯이, 이 본문이 다소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며, 번역 역시 다소 불명확한 것이 사실이다. 이 말은 ‘그가 그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문맥은 ‘하나님의 교회’와 ‘자기 자신의 피’로 읽도록 요구한다. 바울의 목적은 그 장로들에게, 그들이 섬기도록 부름받은 그 교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들을 그런 교회 위에 장로로 세우셨는데, 그 교회를 사기 위하여 지불된 값은 바로 ‘하나님의 피’였다.
비록 성경에서 이런 해석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이의 신성을 증거하기는 하지만, 그 표현들은 “하나님이 죽으셨다”고 결코 단언할 수 없는 선에서 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멀리까지 가서 찾을 것도 없다. 첫째로, 불사(immortality)는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에 속한 것이며(‘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딤전 6:16), 따라서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마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이와 유사하게,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분 중보’(딤전 2:5)가 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주 ‘성부’를 가리키며(ex,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는 성부가 아니라 성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도들은 또한 성부에 대한 성자의 자발적인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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