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제3부-십자가의 성취 / 제7장-죄인의 구원 / 7-1. 화목

JORC구원열차 2009. 11. 14. 12:16

제 3 부

십자가의 성취

 

제 7 장

죄인의 구원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사랑의 완전함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내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대신하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는가? 하나님이 자기 생에 의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이루신 것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세 가지 주된 답변을 제시하는데, 이것을 요약하면 ‘구원’, ‘계시’, ‘정복’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일은, 우리를 구하신 것이고 악을 정복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참으로 새날이 밝았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새날은 ‘구원의 날’(고후 6:2)이며, ‘이같이 큰 구원’(히 2:3)은 너무나 풍성하고도 다양하므로 간단명료하게 정의될 수 없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묘사될 때, 그의 신부와 그의 몸으로, 하나님의 양떼의 양과 그분의 포도나무의 가지로, 그분의 새로운 인간으로, 그분의 권속 즉 가족으로, 그리고 성령의 전과 진리의 기둥과 터로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구원도 ‘화목’, ‘구속’, ‘화해’와 같은 생생한 상징적 용어들에 의하여 예증된다. 더욱이 교회의 이미지들은 가시적으로는 양립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신부를 동시에 그려 볼 수는 없다.

 

‘화목’(propitiation)은 성전에서의 의식을 보여 주고, ‘구속’(redemption)은 시장에서의 상거래를, 그리고 ‘칭의’(justification)는 법정에서의 절차를, ‘화해’(reconciliation)는 가정 혹은 가족 속에서의 경험을 가리킨다.

 

7-1. 화목

 

바울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4-25).

 

요한 :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어떤 사람들은 ‘화목시킨다’는 말을,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 혹은 진정시킨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뇌물을 받으시는가? 그런 개념들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적으로 들린다.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정령들 혹은 조상의 분노를 달래는 일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그런 생각이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도 합당한 것일까? 우리는 그런 개념들로부터 탈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예수님이 그의 죽으심으로 성부의 노를 진정시키고 그분을 설득해서, 분노를 돌이키고, 그 대신 우리를 향하여 호의를 베풀도록 했다고 믿어야 하겠는가?

 

분노, 희생 그리고 화목에 대한 조야한 개념들은 분명히 거부되어야 한다. ‘진노’와 ‘화목’(진노를 달래는 것)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노의 개념에서 비속한 생각들이 제거될 때에만, 화목이라는 개념도 정화되는 것이다. 그 반대 역시 성립된다. 화목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진노와 화목의 교리에 관한 이런 불쾌감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의 어휘를 다시 조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흠정역에서 ‘화목’이라는 말로 번역된 일단의 단어군, 즉 명사인 ‘힐라스모스’(iJlasmov", 요일 2:2; 4:10), 형용사인 ‘힐라스테리오스’[iJlasthvrio", 히 2:17, 수동형인 눅 18:13; 이 말은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를 향하여 노가 풀리소서(be propitiated 혹은 be propitious)”로 번역될 수도 있다] 등에 특별히 주의를 집중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속죄 행동의 대상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 대상이라면 ‘화목’(propitiation; 하나님을 달램)이 정당한 단어다. 하지만 만약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속함’(expiation; 죄와 죄책을 처리함)이 정확한 단어다.

 

이런 재해석을 주도한 영국 신학자 도드의 로마서 3:25에 대한 주석이다. “여기서 전달하고 있는 의미는 화목이 아니라, 속함이다. 대부분의 번역자와 주석가는 이 점에서 틀렸다.” 그는 요일 2:2과 관련해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로마서 3:25은 “하나님은 자신의 희생적 죽음에 의해 자신이 죄를 속하는 수단이 되도록 계획하셨다”(God designed him to be the means of expiating sin by his sacrificial death)로 번역되었고, 요한일서 2:2과 4:10의 중심적인 어구들은 “그 자신이 우리의 죄에 대한 치료제이다”(he is himself the remedy for defilement of our sins)로 번역되어 있다. 그로부터 수년 전에 출판된 RSV의 신약성경에서는 그 세 구절에서 모두 ‘expiation'이 사용되었다.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인 화목의 교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왜 화목이 필요한가, 누가 그것을 이루는가, 화목 제물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서, 이교적인 사상으로부터 바른 교리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로, 화목이 필요한 이유는 되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령 숭배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주 사소한 일로도 화를 내기 쉬운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이 악의 모든 형태와 악의 모든 드러남에 애하여 갖는 지속적이고, 가차없고, 끈질기고, 타협없는 적대간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진노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둘째로, 누가 그 화목을 이루는가? 이교적인 배경에서 보자면, 의식을 꼼꼼하게 집행하거나 마술적인 주문을 외움으로써, 혹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의 노를 돌이키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복음은 우리가 바치는 어떤 제물이나 현물도 우리의 죄를 보상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킬 수 없다고 명백하게 단언한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레 17:11)라고 하나님이 희생의 피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이 진리는 신약성경에서 더욱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데, 화목 제물에 대한 주요 문맥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롬 3:25, NIV: presented, RSV: put forward).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결과가 아니라 속죄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될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을 진정시킨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셋째로, 무엇이 희생 제물이었는가? 그것은 어떤 물건이 아니라, 한 인격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인격자는 인간이든, 천사든, 혹은 하나님 이외의 존재로 인식된 그분의 아들이든,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분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분은 자신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성경적인 화목 교리를 변호하고 회복시키려는 것은, 성경적인 속함의 교회를 부인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화목을 속함으로 대치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하지만, 구원 속에 그 둘이 함께 속해 있는 것으로 보려는 시도를 모두 환영한다. 데이빗 웰즈(David Wells) 박사가 이것을 간명하게 잘 표현하였다.

 

“바울의 생각에 의하며, 인간은 죄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하나님은 진노에 의하여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죄가 극복되고 진노가 돌이켜지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불쾌감 없이 인간을 바라보실 수 있고 인간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속에서이다. 죄는 속해졌고 하나님은 노가 풀리셨다.”

'구원의 이정표 > 그리스도의 십자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7-3. 칭의  (0) 2009.11.14
7-2. 구속  (0) 2009.11.14
6-4.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0) 2009.11.14
6-3. 누가 그 대속물인가?  (0) 2009.11.11
6-2. 유월절과 ‘죄를 담당함’  (0) 2009.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