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7-2. 구속

JORC구원열차 2009. 11. 14. 12:17

7-2. 구속

 

‘속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에서, 그것이 구입 행위가 되었든 속적을 지불하는 것이 되었든지, 산다 혹은 다시 사들인다(buy or buy back)는 의미를 갖는다. 구속 이미지에서 강조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건져 주시는 행동을 필요하게 만드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 즉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된다. ‘화목’은 십자가에 의하여 진정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초점을 맞춘다. 한편 ‘구속’은 십자가에 의하여 죄인이 속함을 받아야 하는 바, 죄인의 궁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속전’(ransom)이라는 단어는 정확하게 사용된 것이다. 헬라어 ‘뤼트로오’(lutrovw, 대개 ‘속하다’로 번역됨)와 ‘아폴뤼트로시스’(ajpoluvtrwsi", 구속)는 ‘뤼트론’(luvtron, 속전 혹은 해방의 값)에서 생겨난 단어이며, 이 단어는 노예를 매매하거나 해방시켜 주는 일에 대해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거의 기술적인 용어였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의하여 ‘속함을 받거나’(redeemed) '건짐을 받은‘(delivered)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전을 지불하신‘(ransomed)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재산, 동물, 사람, 그리고 국가가 모두 값을 지불함으로써 ‘속해졌다.’ ‘친족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매각된 재산을 다시 사서 돌려주는, 즉 그 가족 혹은 지파가 재산을 계속 보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권리(의무)는 보아스와 예레미야의 경우에서 예증되었다. 동물에 관해서 보면, 모든 생축의 초태생은 당연히 야훼의 것이었다. 하지만 나귀와 부정한 동물은 소유자가 속할 수(다시 사들일 수) 있었다. 이스라엘 개개인의 경우, 국가적인 인구조사 시에 각 사람은 ‘생명의 속전’을 내야 했다. 저당 잡힌 재산을 회복하거나, 도살자에게서 동물을 건져내거나, 혹은 사람을 노예 상태나 심지어 죽음에서 구해 내기 위하여 누군가 필요한 값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러면 국가의 경우는 어떤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와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서 건지신 것을 묘사하는 데 구속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 구속자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인데, 여기서도 여전히 ‘구속하기’ 위해서 ‘속적이 지불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최초로 대답을 제공한 사람이 웨스트코트 주교였던 듯하다. “강한 힘을 행사했다는 사상, ‘구속’이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상은 사방에서 나타난다.” 워필드는 이것을 확장시켰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속은 하나님의 힘을 크게 사용하신 결과이며, 그런 의미에서 비싼 대가가 치러진 것이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힘에 대한 왜곡한 언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또한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인 것 같다.” 하나님은 ‘편 팔’과 ‘능한 손’(개역; ‘큰 재앙’)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속에는 언제나 값을 지불하는 일이 수반되며,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때도 예외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워필드는 “값을 지불함이 없는 구속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받지 않고서 물건을 판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첫째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으나 반드시 구속되어야 하는 인간의 곤경은 어떤 것인가?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빚, 포로, 노예, 유배 그리고 형벌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사람들이 속함을 받을 수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적을 지불하신 그 굴레는 도덕적인 굴레이다. 이 굴레가 어떤 때는 우리의 ‘불법’ 혹은 ‘죄’로 묘사되고(왜냐하면 두 개의 핵심적인 구절에서 ‘구속’은 ‘죄사함’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범법자들에게 율법이 선언하는 바 하나님의 심판으로 율법의 저주로 묘사되며, 어떤 때는 ‘너희 조사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포로 상태에서 놓여나는 것이 우리의 구속의 완성은 아니다. 그 이상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타락의 모든 황폐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금까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구속되어야 하는 바 그 곤경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어떤 값이 치러짐으로써 우리가 구속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신약 성경의 이미지는 그 값이 누구에게 지불되었는지를 명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지만, 그 값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값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그분이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갈 4:4-5).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말이(고전 13:3) ‘노예의 표시를 찍히는’ 것을 의미하는 듯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은 ‘노예를 구속하기 위하여 노예 상태로 들어가는 극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고 예레미아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성육신 다음에는 속죄가 있다. 이 속죄를 이루기 위하여 그분은 ‘자기’(딤전 2:6; 딛 2:14), 즉 그분의 ‘목숨’(프쉬케; yuchv, 막 10:45)을 주셨으며,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죽으신 것이다(갈 3:13).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하신 비싼 값을 표현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그 자신’이나 그분의 ‘목숨’이 아니라, 그분의 ‘피’다.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베드로는 기록했다(벧전 1:18-19). 히브리서는, 희생 제사의 이미지에 깊이 젖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이셨을 뿐만 아니라, 제물이셨음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피로...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그것이 그분의 죽음을 가리킨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 가지 단언, 곧 레위기 17:11-14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혹은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는 단언, 그리고 신명기 12:23의 “피는 생명이다”라는 더욱 직접적인 진술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놓임을 받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처음에는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고 다음에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피는 그 육체의 생명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이든지 동물이든지, 만약 피가 육체로부터 분리되면 육체 속의 물리적 생명은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흘림이라는 것은 생명이 육체의 짐에서 해방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육체 속에서의 생명의 종말을 의미한다. 피는 육체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영적 생존의 증거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생명을 버리심으로써 우리가 얻게 된 유익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구속’ 이미지는 세 번째의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속함을 받아야 하는 그 곤경, 그리고 이것에서 우리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된 속전 외에도, 이 구속 이미지는, 속전을 지불하고 사들인 것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게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이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우리 주님의 주되심(Lordship)은 그분이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감독자들에게 삼가는 심정으로 교회를 돌아보라고 하였다(행 20:28). 만약 교회가 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 역시 교회를 위해 수고할 값어치가 있지 않겠는가? 교회를 사기 위하여 지불된 값이 고귀하게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일은 특권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논조인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부끄러운 행위로써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벧후 2:1) 자들에 대해 말하는 어감 속에서 분노를 감지할 수 있다. 주께서 그들을 사셨으므로 그들은 주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분을 인정해야지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음행을 피하라는 바울의 엄격한 명령은 인간의 모은 어떤 것이며, 그것을 소유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교리에 근거해 있다. 한편으로 그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려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는, 의심스럽다는 듯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한편으로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미래에는 하나님에 의하여 다시 부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세 번에 걸쳐서 즉 창조에 의하여, 구속에 의하여, 그리고 내주하심에 의하여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닌 이상,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오용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순종과 자제에 의하여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으므로 이제는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에도 종노릇 할 이유가 없다. 과거에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며, 그분에 대한 봉사는 참된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