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6-4.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JORC구원열차 2009. 11. 14. 12:13

6-4.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우리의 대속자는 단지 그리스도도 아니고(만약 그리스도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제삼자가 될 것이므로), 또한 단지 하나님도 아니다(만약 하나님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성육신을 훼손시킬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서 동시에 신이시면서 인간이신 분, 또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을 모두 대표하면서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독특한 자격을 가지신 그분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성부의 주도적 역할을 간과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성자의 중보를 간과하게 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를 그리스도에게만 돌림으로써 그를 성부로부터 분리시키거나, 혹은 속죄를 하나님께만 돌림으로써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과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찬동하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께 속죄를 돌리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신약성경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 증거를 개괄하려면, 메시아 탄생에 대한 고지(告知)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메시아께 주어진 이름은 예수(‘하나님의 구원자’ 혹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탄생 안에서, 그의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즉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마 1:21-23). 누가에 따르면,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그리스도 즉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아니라, 실제로 ‘주 그리스도’ 곧 그 자신이 메시아요 주님이셨다(눅 2:11).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의 인격적인 자의식은 하나님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님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요 8:29)과 그분께 ‘순종하는 것’(요 15:10), 그리고 그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 관하여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런 복종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으므로 예수님의 뜻과 성부의 뜻은 언제나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은 상호 ‘내주’(內住) 즉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신 것, 심지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합’을 말씀하셨다.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신 속죄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할 때, 성부와 성자가 분리될 수 없다는 확신은 화해에 관한 바울의 몇몇 위대한 진술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 ‘모든 것(고후 5:17-18의 재창조의 일을 가리킴)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그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다(18-19절). 헬라어 원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를 어디에 놓느냐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화목을 성취시키는 일에서 함께 일하셨다는 것이며, 실로 하나님이 화목을 이루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 있는 다른 두 개의 중요한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임을 말해 준다. 그 두 구절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며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골 1:19-20; 2:9). 그 일은 만물을 그분과 화목시키는 것,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는 것,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는 것,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 우리를 대적하는 기록된 의문(儀文)을 폐하고 없이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것, 정사와 권세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 ‘그것(십자가)에 의하여’ 혹은 ‘그(그리스도) 안에서’ 정사와 권세를 이기는 것 등이다.

 

인간이 법을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그 잘못을 배상해야 하는 이도 오직 사람아어야 한다는 안셀름의 말은 정당한 것이다. 또한 그 배상을 요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필요한 배상을 마련하실 수 있다고 한 점에서도 그는 역시 옳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주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속에서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를 동시에 결합시키는 유일한 인물로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우리 인간은 영원토록 하나님ㄴ의 거룩한 사랑의 유일한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필요성, 곧 대속(substitution)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만족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거룩이 그분이 지정한 대속자 위에 심판으로 임함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용서 속에서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대속자가 형벌을 담당함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용서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그 대속자는 누구인가? 만약 그리스도를 제 삼자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대속자가 되시지 않는다. 서로 독립된 세 주인공, 즉 죄가 있는 자, 형벌을 내리는 재판자, 무죄한 희생자 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는 식의 형벌 대속의 모든 개념을 우리는 가장 강하게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독립된 제 삼자가 아니라 성부의 영원한 아들로서, 그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기희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이긴 것이다. 십자가는 형벌과 특사(特赦), 가혹함과 은혜, 공의와 자비가 동시에 행해지는 곳이다.

 

대속의 개념은 죄와 구원의 핵심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은 자기 자신으로 하나님을 재신한 인간에게 있으며, 구원의 본질은 인간을 위해 인간을 대신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속죄의 본질이 대속이라면, 신학적인 추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신인(神人)이요 중보자로 보는 역사적인 교리를 고수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관한 역사적인 교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신 성부도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만이, 인간이 되신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언제나 함께 있다. 만약 그리스도의 인격이 사도들이 말한 그대로가 아니라면, 그분은 사도들이 말하는 바 그분이 행하셨다는 그 일을 하실 수 없다. 속죄를 위하여 성육신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특히 성육신은, 성부의 사랑과 거룩과 뜻이 성자의 사랑과 거룩과 뜻과 일치한다는 것을 단언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시키신 것이다.

 

속죄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기독론적 측면’ 혹은 ‘세 가지의 조망’이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하나님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인간과 관계한다....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것과 똑같이 전적으로 인간이시다....바로 이것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자이신지를 설명해 준다”. 셋째로, 비록 하나님이고 인간이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다. 그분은 신인(神人)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이런 설명이 승인될 때만 그분의 속죄의 희생의 독특성이 이해될 수 있다. 주도권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으며, 이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내주어 인간이 되게 하셨으며, 또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이 인간의 수난을 담당하신 것이다....이 수난 속에서 심판받아야 할 자를 대신하시고, 또한 이 수난 속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스스로 심판을 받으신 이는 바로 그 심판자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 이것은 심판자 자신이 심판을 받는 그런 심판이다”.

 

두 번째 추론은 인격적인 것이다. 대속의 교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삼으셨다는 하나의 사실만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만족되어 반항하는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는 그것의 필연성까지도 단언한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얻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심판을 우리에게 내리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대신 그것을 당하셨다. 이것 의 유일한 대안은 지옥이다. 이 사실이 바로 십자가에 있는 ‘치욕’, ‘스캔들’, 십자가의 거침돌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만한 마음은 그것에 대하여 반항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