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칭의
샌데이(Sanday)와 헤드람(Headlam)은, 칭의란 “단순한 죄의 용서, 값없이 주시는 용서”라고 썼으며, 더 최근에 예레미아스는, “칭의란 사죄이지, 사죄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칭의와 사죄는 분명히 상보적인 두 개의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사죄는 우리의 부채를 탕감하며, 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의 위험한 상태를 면제시켜 준다. 한편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위치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모든 복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구언의 은혜의 모든 경륜의 중심이요 주축이며, 패러다임이며, 본질인 것으로 보인다. 이 교리는, 마치 아틀라스(Atlas)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음적인 지식 전체, 곧 하나의 세계를 그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리의 탁월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한 많은 반대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로, 구원에 관한 모든 이야기에서 율법적 범주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근거는, 그런 범주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와 왕으로 제시하며, 따라서 그분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방식이나 그분이 우리와 맺으시는 인격적인 관계를 바르게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미지의 법률적인 느낌은 ‘화해’와 ‘양자됨’(여기서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아버지시다)이라는 좀 더 인격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게 된다.
둘째로, 다른 비판자들은 이 교리를 바울의 독특한 법적인 정신에서 기인된 그의 특정한 표현법으로 보고 무시해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바울의 말은 사도의 말이고 따라서 권위를 갖기 때문에 바울을 무시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칭의의 개념은 바울에 의하여 발명된 것이 아니었다. 이 개념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고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에는 의롭고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인데 이는 ‘그가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사 53:1).
셋째로,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신치의 교리를 로마 가톨릭이 거부하는 이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의 교리를 세 가지 제목, 즉 칭의의 본질, 칭의에 선행되는 것과 그것을 일으키는 것, 칭의에 뒤따르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 공의회는 칭의는 세례 시에 발생하며, 거기에는 사죄와 새롭게 됨(renewal)이 포함된다고 가르쳤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든 원죄와 자범죄에서 깨끗게 되며, 또한 그에게는 동시에 새롭고도 초자연적인 의가 주입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전 은혜(God's prevenient grace)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은혜에 자유롭게 동의하고 협력함으로써 스스로 변화해서 그들 자신의 의에 이를 수 있도록’ 사전에 인도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세례 이후의 죄들은, 그것이 은혜를 상실하게 만드는 ‘죽음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칭의의 범위 안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죄들은 참회, 고백과 고해성사에 의하여, 또한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옥에 의하여 정결케 되어야 하므로, 이런 것들과 다른 선행들은 영생을 위한 ‘공로’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회들은 이런 가르침으로부터 충분히 혼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양편 중 어느 편도 상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상대에 대하여 신랄하고도 논쟁적인 태도를 취했다. 오늘날에도 근본 문제인 구원의 길이 여전히 치명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한스 큉은 분명히 어느 정도 괄목할 만한 말을 했다. 비록 그의 논문이 그가 별로 공감하지 않는 루터와 트렌트 공의회의 일치점을 입증하기보다는, 바르트와의 일치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것이 애석한 일이긴 하다. 27장에서 그는 성경에 따라서 은혜를 정의하기를 ‘은혜로움’(graciousness), 하나님의 ‘호의’ 혹은 ‘관대한 자비’(generous kindness)라고 했다. “문제는 내가 은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이다”. 28장에서 그는, 칭의는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하며”,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는 “법적 상황과의 연결이 언제나 나타나다”고 한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법적인 사건’, ‘놀랍도록 은혜로운 구원의 의’다. 그러고 나서 31장에서 한스 큉은 ‘솔라 피데’(오직 믿음에 의해서)의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며, 또한 루터가 로마서 3:28의 본문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첨가한 것은 전적으로 바르고 전통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그것이 ‘루터의 발명이 아니라’ 이미 다른 번역본에도 나타났던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트렌트 공의회는 그것과 모순되는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솔라 피데’ 공식에 관한 한 근본적인 일치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근거로 해서만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 더욱이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는, 인간은 어떻게 하더라도 절대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는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인간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의 활동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칭의에 복종할 뿐이다. 인간이 할 일은 없다. 인간은 믿을 뿐이다”.
의롭게 된 죄인이 ‘전적으로, 완전히 의롭다’고 한 수사적 문장에서 위험한 모호성이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의롭다’는 말이 ‘용서를 받고, 받아들여지며,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라면, 실제로 우리는 즉시,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대로의 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의로운 자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참된 의미이다.
‘의롭다’는 말이 만약 ‘새롭게 되다, 살리심을 입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면, 여기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은 즉시 우리를 그분이 선언하시는 그런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이 경우에 ‘의롭다’는 말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말하고 있는 것은 칭의가 아니라 중생이기 때문이다.
‘의롭다’는 말이 만약 ‘의로운 품성을 가지다’ 혹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다’라는 의미라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언이 그것을 즉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시작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치의가 아니라 성화이며, 이것은 일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에 관한 신약성경의 정반대의 태도를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넌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을 아는 고로”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을 좇아...하셨나니”. 우리는 이런 본문들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명백한 선택의 여지를 피할 수가 없다. 행위가 아닌 은혜, 율법이 아닌 믿음,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 자비인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협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방법, 즉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 사이에서의 선택만 있을 따름이다. 또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믿음은 그것이 또 하나의 행위가 아님을 분명하게 강조해야 한다. 그렇다.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말은 단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믿음 그 자체는 결코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 믿음의 가치는 오직 그 믿음의 대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요, 그분을 붙잡는 손이며, 그분의 생명의 물을 마시는 입이다.
로마가톨릭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이다. “당신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죄인을 의롭게 하실 때 그분이 그 사실을 ‘선언’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여전히 치의는 법적인 선언이고 도덕적인 변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의는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지 우리 속에 ‘침투’하거나 우리에게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외투를 입듯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계속적인 죄성을 은폐시킨다고 주장하는가? 칭의는 우리의 위치를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우리의 성품과 행위는 그대로 놓아둔다고 주장하는가? 개혁자들이 가르쳤듯이 의롭게 된 각각의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사람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아라고 주장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칭의란 법적인 허구, 아니 당신과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장난 혹은 엉터리 거래이며, 당신의 속 사람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당신은 실제로는 변하지 않았으면서 변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기 위해 얄팍하게 가장된 면허증이 아닌가?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어떤 때는 용어를 부주의하게 사용하였으며 그리하여 선행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인ㄱ상을 주어 왔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이 그분의 죽음과 연합해서 세례를 받았음을 그들이 알지 못했는가? 이와 같이 그분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을진대 어떻게 더 이상 죄와 함께 살 수 있겠는가?(2-3절).
이 대답에서 바울은, 칭의가 구원의 유일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구원과 칭의는 동일하다’는 식으로 그 둘을 동등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원’이란 단어는 포괄적인 단어로서 거기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어서 그 측면들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그림에 의하여 예증되며, 칭의 또한 그 여러 가지 측면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구속도 그 측면들 중의 하나로서, 죄책뿐만 아니라 죄로부터의 철저한 건짐을 증거한다. 또 다른 측면에는 재창조가 있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중생 혹은 신생도 그 측면들 중의 하나로서, 이것은 성령의 내적인 사역이며, 중생 이후에 성령께서는 그 은혜로 신자 속에 거하면서 신자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성화의 과정을 진행시키신다. 이 모든 것은 함께 발생하는 일이다. 중생이 칭의의 측면은 아니지만, 중생과 칭의는 구원의 측면이 되며, 둘 중 어느 하나는 이루어지면서 다른 하나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위대한 단언은 몇 개의 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그 요소에 있어서, 한편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고, 다른 한편은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입음’이다(딛 3:5-7). 의롭게 하시는 성자의 일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일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랑의 선행이 칭의와 신생의 필연적인 증거로서 뒤따라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결코 ‘행위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행위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나무와 그것의 열매를 거론해서 일의 순서를 정확하게 예증하였다. “나무가 먼저고 그 다음이 열매다. 왜냐하면 사과가 나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사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앙이 먼저 사람을 만들고 다음에 그 사람이 행위를 표출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성자의 사역과 우리 안에서의 성려의 사역, 즉 칭의와 중생이 분리될 수 없는 쌍둥이라는 사실을 굳게 잡는다면, 칭의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를 받고 복직되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외적이고 법적인 선언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칭의와 정죄에 대한 어휘는 구약성경에서 통상적으로 등장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재판장을 향해 그들에게 제세된 소송 사건을 처리할 때 “무죄한 자를 석방하고(즉 의롭다고) 유죄자를 정죄하라”고 지침을 내렸다(신 25:1, 개역-‘의인은 의롭다 하고 죄인은 정죄할 것이며’로 번역). 모든 사람은 야훼께서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한다’는 사실과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출 23:7; 잠 17:15). 선지자 이사야는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 관원들에게 불 닽은 진노를 선포했다(사 5:23).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한 바울의 변호를 요약하기 위하여 필요한 네 개의 핵심어구는, 칭의의 원천, 근거, 방법, 그리고 효과이다. 첫째로, 우리의 칭의의 원천은,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즉 우리가 전혀 누릴 수 없는 그분의 호의로 말미암는다는 표현에서 제시된다(롬 3;24).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이 확실하므로(롬 3:10),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다는 것도 동일하게 확실하다.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롬 3:20). 그러므로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롬 8:33). 오직 그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분은 그 일을 ‘값없이’)롬 3:24,도레안, dwreavn, 거저 주시는 은사로, 무료로), 즉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은혜 때문에 하신다. 톰 라이트(Tom Wright)의 명쾌한 경구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죄가 없으면 칭의가 필요 없다. 반면에 은혜가 없으면 칭의의 가능성이 없다.”
은혜와 의는 별개의 것이다. 칭의는 의와 관계된 것이다. 우리가 “은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칭의의 원천에 재해서 말하는 것이지, 그것의 정당한 근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정당한 근거가 없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의에 모순되게 행하시는 셈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칭의의 근거를 이야기하는 바울의 다른 핵심표현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5:9)이다. 칭의는 특별 사면(amnesty)의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특별사면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원칙이 없는 용서이며, 악행을 간과하고(아니 심지어 망각하고‘amnestia’는 ‘건망증’이다) 의의 시행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칭의는 의의 행동, 곧 은혜로운 의의 행동인 것이다. 그 말의 동의어는 ‘하나님의 의’이다(롬 1:17; 3:21). 지금은 이 말을 하나님이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아라고 설명해 둘 수 있을 것이다. 패커 박사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이 천상의 법정에서, 재판장으로서의 자신의 의를 손상시키지 않고 죄인을 석방하면서 정당화된 칭의를 죄인에게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악인을 선하다고 선언하거나 혹은 그들이 결국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죄인을 법적으로 의롭다고, 즉 그들의 불법에 대한 형벌을 자기 자신이 아들 속에서 당하셨으므로 죄인들은 그들의 불법으로 인한 처벌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칭의, 구속 그리고 화목의 개념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롬 3:24-25).
셋째로, 우리의 칭의의 수단은 바울이 즐겨 쓰는 표현인 이신칭의(justified by faith)라는 말에 의하여 표현된다. 은혜와 믿음은 서로 불가분적으로 함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칭의의 원천이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칭의의 근거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수단일 뿐이다.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는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믿음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는 그 신앙의 대사의 고귀한 가치 때문이다.”
‘오직’이라는 말이 로마서 3:28의 헬라어 원문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루터가 바울의 표현을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준수가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고 옮긴 것은 루터의 바른 직감이었으며, 또한 바른 번역이었다.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그의 글의 요점은 율법의 해위를 완전히 배제하고 믿음만을 칭의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남겨 놓으려는 것이었다.
넷째, 우리의 칭의가 가져다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바울의 표현에서 추론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음을 가리킨다. 칭의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 그리고 이 연합이 가져다주는 온갖 유익을 떠나서 별개로 생각될 수 없다. 그 첫 번째 효과는 예수님의 메시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하여 의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참된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나아가서 어떠한 인종적, 사회적, 성적(性的) 장벽도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26-29의 주제이다. “칭의는 개인주의자의 헌장이 아니라, 우리가 언약의 공동체에 속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라고 강조한 톰 라이트의 말은 참으로 바른 지적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주신 바, 이 새 공동체는 ‘선한 일을 사모해야’하며, 또한 그 구성원들은 선행에 힘을 쏟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갈등도 없다. 바울은 유대화주의자(Judaizer)의 자기 의(self-righteous)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글을 쓰고 있었고, 야고보는 지성주의자의 죽은 정통에 대항하여 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모두 참된 신아의 행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행위를 일으키는 신앙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님이 개막을 알리신 새 시대에 이미 살고 있는 종말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칭의가 종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칭의는 최후의 심판에 속하는 판결을 지금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는 소망의 공동체로서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셨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위리의 죄 있는 품성의 모습으로 보내사 속죄제를 삼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를 정죄했던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이 정죄를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한 번 의롭다 하심을 입으면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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