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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7-4. 화해

by JORC구원열차 2009. 11. 14.

7-4. 화해

 

십자가의 성취를 보여 주는, 구원의 네 번째 이미지는 ‘화해’이다. 가정에도 분란이 있으며, 때로는 ‘적대감’이 존재하기도 한다. 화해한다는 것은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 우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전재되는 것은 원래의 관계가 있었는데 그것이 파괴되었다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화해라는 말은 ‘자기 자신과의 타협’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경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비록 성경이, 우리가 참으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때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시작이다. 이것이 ‘속죄’의 의미이다. 화해란 이전에 서로 소외되어 있던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하나’가 되는 사건을 가리킨다. 흠정역 신약성경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이제 속죄(즉 화해)를 얻었다’(롬 5:11)는 진술에서 단 한 번 등장한다. 신약성경의 화해에 관한 네 개의 큰 단락 중의 하나인 로마서 5:9-11에서, 화해된다는 말과 의롭게 된다는 말이 병행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구절과,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 되었은즉’이라는 구절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화해와 칭의라는 이 두 상태는 비록 십자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칭의는 법정에서 우리의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법적인 지위이며, 화해는 우리의 가정에서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화해는 칭의의 결과이며, 그 열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롬 5:1), 즉 화해는 오직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을 때뿐이다.

 

신약성경의 다른 두 개의 용어가 화해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우리의 강조점을 뒷받침하는데, ‘양자된’과 ‘받아들여짐’이 그 단어들이다. 양자됨에 관하여는, 예수님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라고 허락하셨으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나아갈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 사도들도 이 점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탄생한 결과라고 말한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우리의 신생보다는 우리의 양자됨에서 찾으면서, 우리가 노예가 아닌 아들이 됨으로써 가지는 특권, 곧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께 ‘나아감’(프로사고게, prosagwghv)은 화해에 있어서 또 하나의 축복이다. 이 말은 특별히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적극적인 교통을 의미하는 듯하며, 이것은 화해가 이루어진 모든 자녀가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나아감’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림’을 일괄해서 말하고 있는데, 두 번 중에서 첫 번째 경우에는, 그것을 우리의 화해에서 기인하기보다는 우리의 칭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롬 5:1-2). 그리고 두 번째 경우에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성자에 의하여 성부께 나아간다고 해서그것을 하나의 삼위일체적인 체험으로 설명하며(엡 2:17-18), 또한 “우리가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12)고 설명한다.

 

베드로도 그와 같은 계통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사 의임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프로사고, prosavgw) 하심이었다고 선언한다(벧전 3:18). 또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희생과 제사장직에 의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속죄일의 의식을 실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19-22)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화해, 하나님과의 화평, 그분의 가족으로의 입양,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맺으신 새로운 관계를 증거한다.

 

화해는 수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화목 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도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위대한 신약성경의 구절은(엡 2:11-22) 이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라진 틈을 치료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어떤 때는 바울이 어떤 화해를 가리키고 있는지 불확실할 때도 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하나님도 없는 자’였음을 상기시킨다(엡 2:12).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하나님께도 가까워지고 이스라엘에게도 가까워졌다)고 그는 말한다(14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멀리 떼어놓았던 계명의 율법을 ‘도말’하시고, 그 자신 안에서 ‘둘로 하나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신’(15절)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에 대하여 느끼고 있던 악한 감정과 냉소적 태도를 안다면, 이 화해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한 기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화해의 전부는 아니다. 에베소서의 자매 서신이며, 두 서신 간에 많은 병행구를 포함하고 있는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우주적인 측면을 첨가하고 있다. 이 위대한 기독론 구절이(골 1:15-20) 많은 학자의 주장처럼 초대교회의 찬송이었든지 아니면 바울의 글이었든지, 이 구절은 창조와 구속에서의 그리고 우주와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장엄한 진술이다. 동시에 이 구절은 골로새의 이단들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디고 하다. 이 이단들은 창조주와 물질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천사와 같은 어떤 존재들, 즉 ‘보좌, 능력, 권세, 주권’ 등을 가르친 듯하며, 아나 그리스도도 그런 존재의 하나라고 가르친 듯하다. 바울은 그런 가르침을 묵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만물’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 표현을 다섯 번 사용하고 있는데, 대개는 이 말이 우주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정사와 권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다(16절).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적으로나 지위로 보나,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분의 ‘안에서’유지되고 통합된다(17절).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서, 이는 그분이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시려는 것이다(18절).

 

바울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화해된 ‘만물’(20절)이 창조된 ‘만물’과(16-17절)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만약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던 것이 뒤에 다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되어야 한다면,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정사와 권세가 ‘화목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골 2:15)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 무장이 ‘해제되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화해되었다’라는 단어는 그 용법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 생가하고 있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능력 앞에서 자기들의 의미에 거스려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우주적 존재들의 ‘진압’이라는 F.F.브루스(F.F.Bruce)의 말은 정당하다. 지금 여기서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상황은, 그가 다른 곳에서 묘사한, 모든 무릎이 예수님께 꿇게 되며 모든 방언이 그의 주되심을 인정하고(빌 2:9-11) 그것들이 ‘하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엡 1:10,12) 통일되는 그날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발아래 놓여지는 상황과 동일한 상황일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자신에게 화해시키시며, 이방인과 유대인을 서로 화해시키시고, 심지어 우주적 권세를 무장해제 시키고 진정시킨다는 의미에서 그것들까지도 화해시키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화해가 어떻게 일어났으며, 이 화해의 위대한 드라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들이 각각 맡은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조명을 얻기 위해 네 번째의 위대한 화해의 구절인 고린도전서 5:18-21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가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단락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첫 번째 진리는 하나님이 화해의 창시자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전체 단락의 주된 강조점이다. “모든 것(δέ pάnta)이 하나님께로서 났나니.” 아마 이 ‘모든 것’은 앞 절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새로운 피조물의 ‘새 것’을 회상하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그래서 그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이 단락의 자비로운 주도적 행동, 즉 하나님이 화해를 이루심, 하나님이 주심, 하나님이 부탁하심,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심 등을 묘사한다. NEB 18절은 첫 번째 문장을 잘 번역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성자의 주도권은 성부의 주도권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 화해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잉태되었고 생겨났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화해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할 때에, 하나님이 주어이든지(그분이 우리를 자신에게 화해시킨다), 아니면 그것이 수동형일 때는 우리가 그 주어가 된다(우리가 하나님께 화해된다)는 사실이다. 결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해시키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형식적으로는 혹은 언어적으로는 이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 위에 신학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건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화해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으며,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적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적대감은 양편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그 막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항과, 이 반항으로 말미암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논거가 있다.

 

첫째로, 그 용어이다. ‘원수’, ‘적대감’, 그리고 ‘적의’라는 말 자체가 상호성을 암시한다. 로마서 11:28에서 ‘원수’라는 단어는, 그 다음에 나오는 수동형 단어인 ‘사랑을 입은’과 대조되고 있으므로, 수동형이어야 한다. 또한 에베소서 2:14에서의 ‘적대감’ 역시 상호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다른 ‘적대감’(하나님과 죄인 사이의)도 마찬가지로 상호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에 뷔히젤은 말하기를, 우리는 원수라는 말을 해석할 때,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논거는 문맥에 관한 것인데, 이 점에서는 각 구절의 문맥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문맥도 해당된다. 화해에 관한 각각의 주된 구절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든지, 아니면 그 주변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예가 가장 명확하게 눈에 띄는 곳이 로마서 5장이다. 여기에 보면,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절)라는 말 다음에 바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10절)라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그 다음에는 더욱 넓은 성경적인 문맥을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 논거는 신학이다. 바울의 논리는, 화해의 메시지가 선포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화해의 대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이 전파한 그 ‘화평’(엡 2:17)은 우리의 적의가 이미 극복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도리어 그들은 우리의 적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도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자신의 적의를 철회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레에게 자신을 화해시키셨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분께 화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밀 브루너가 이 점을 직설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화해란 두 당사자 간의 적대감을 전제로 한다. 화해, 참된 화해, 화해의 객관적 행위는 양편 사이의 적대감을 전제로 하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적이며,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만약 하나님이 화해의 창시자라면, 그리스도는 화해의 집행자시다. “저가(하나님이)...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라고 고린도 후서 5:18-19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두 진술은 모두 하나님이 화해를 위한 주도적인 행동을 취하심을 이야기하며, 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을 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화해의 우주적인 범위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 화해의 수혜자가 ‘우리’에서 ‘세상’으로 바뀌고 있으며, 하나님은 멀리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대리자로 삼아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실 때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전치사가 ‘말미암아’에서 ‘안에서’로 바뀌고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혹은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 바울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하신다(19절). 그 허물이 우리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분이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심판하시기로 하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려 하시며, 그 형벌을 우리에게 받으라고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죄악들을 어떻게 하셨는가? 이 질문의 이유는, 하나님이 그 죄악들을 용인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21절에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으로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진술 중의 하나다.

 

셋째로, 만약 하나님이 화해의 창시자이시고, 그리스도가 그 실행자이시라면, 우리는 화해의 사신이다. 18절과 19절을 상고하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각 문장의 앞부분만을 겨우 살폈을 뿐이다. 이 두 구절은 또한 각각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앞부분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 시키고 계셨다는 화해의 성취를 진술하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분이 우리에게 화해의 사역과 메시지를 맡기셨다는 것을 선언한다. 더욱이 이 화해의 사역은 그 자체가 두 단계로 되어 있다. 이 사역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계셨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서 죄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이 사역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즉 “하나님이 제시한 화해의 조건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라”는(참고, 마 5:24), 혹은 그저 “그것을 받으라”는(참고, 롬 5:11) 호소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늘 구분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화해의 일을 이루셨다. 하지만 죄인이 회개하고 믿어서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 편에서는 화해의 일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언제나 구분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또한 모든 참된 복음 전파에서도 구분되어야 한다.

 

복음을 미리 강해하지는 않고 지루한 호소만 늘어놓는 설교 역시 바른 것이 못 된다. ‘선포가 없는 호소여서도 안 되고, 호소가 없는 선포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고 지켜야 한다.

 

성전의 제사, 법적인 선고, 시장의 노예 그리고 가정의 자녀는 분명히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첫째로, 각각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필요의 서로 다른 여러 측면들을 밝히 드러낸다. 화목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하고, 구속은 죄의 노예상태에 있는 우리의 처지를 강조하며, 칭의는 우리의 죄책을 그리고 화해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적대감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소외를 강조한다.

 

두 번째로, 이 네 가지 이미지는 구원의 주도적인 행동은 하나님이 그 사랑 안에서 행하신 것임을 강조한다. 자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우리의 비참한 속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자신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선언하시며, 또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ㄴ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셋째로, 이 네 가지 이미지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피흘림을 통하여,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즉 화해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적 희생이었다. 그러므로 대속은 하나의 ‘속죄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이론들과 나란히 있으면서, 속죄를 설명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부가적인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도리어 대속은 각각의 이미지의 본질이며, 속죄 그 자체의 핵심이다. 이 네 개의 이미지는 대속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