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취는 구원뿐만 아니라 계시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계시의’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또한 세상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8-1. 하나님의 영광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서 하나의 ‘영화’, 곧 그것을 통하여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가 최고로 ‘영화롭게 되는’, 혹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셨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비록 예수님의 영광이 변화산의 사건에서 언뜻 보이기는 했지만, 그 영광이 충만히 드러나는 것은 재림과 그때 정정에 이를 그분의 왕국이 드러날 때이다. 그것은 ‘권능과 영광’의 드러남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설명에서 충격적인 것은, 미록 그분의 영광이 그분의 이적, 혹은 ‘표적’ 속에서 능력 있게 드러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현재의 연약함, 즉 성육신에 나타난 그분의 낮아지심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는 여기에 나타난 구약 인유를 놓쳐서는 안 된다. 광야에서 장막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거기에 나타난 충만히 임했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우리 가운데 ‘잠시 사셨던’(헤스케노호센, ejskhvnwsen, 장막을 쳤던)그분에게서 현시되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자비롭고 의로운 이름으로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영광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육신’과 ‘영광’을 고의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신성의 낮아지심으로 말미암는 영광의 근본적인 역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공관 복음에서는 수난이 장래의 영과에 이르는 길로 제시되는 반면에, 요한에게 있어서 수난은 또한 영화(glorification)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영역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세 번의 경우에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가리켜서 영화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셨다. 첫 번째 경우로,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어떤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땅에 떨어진 밀알이라는 비유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내용의 말씀과 관련시켜서 즉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다. 두 번째의 경우로, 유다가 다락방에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의 경우로,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신 그 밤을 마감하시면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그분의 위대한 기도를 시작하셨다. 이 세 개의 문장에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각각의 구절은 ‘지금’ 혹은 ‘때가 왔다’라는 말로 시작됨으로써 그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그 영광을 받는 일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함께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이 십자가에 의하여 계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성부와 성자는 자신들에 관하여 무엇을 계시하시는가? 자기를 낮추며 자시를 주는 사랑이 여기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거룩함에 대해서는 무엇이 계시되는가? 바로 이 거룩함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사의 죄를 져야 하며, 가야바가 올바르게 예언했던 것처럼 선한 목자가 자기 양떼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며, ‘온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보다는 하나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유익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로부터 퍼져 나오는 그 영광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비와 공의로 계시하셨으며, 또한 육신이 되신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은혜와 진리’로 보는 바 신성한 성격들이 조화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서, 칼빈은 십자가라는 ‘극장’에서 바로 이 선하심이 공연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으로 이해되었던 그것이 바울에게는 공의와 사랑이라는 그분의 성품을 증거하며 심지어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두 개의 핵심 본문은 모두 로마서에 나타난다.
“이는(즉,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삼으심은)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주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5-2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3장과 5장에서 ‘demonstrate'로 각각 번역된 이 단어가 원어에서는 서로 다른 단어이다(개역성경은 3장에서는 ’나타내다‘로, 5장에서는 ’확증하다‘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원어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동일한 영어단어로 번역한 NIV 번역자들의 직감은 바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두 언어는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분명하고도 공개적인 증거(demonstration)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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