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하나님의 사랑
세상의 재난은 이 증거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증거는 바로 십자가이다. 요한일서에서 두 구절을 인용함에 있어서 첫 번째 구절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세상은 무엇이 참된 사랑인지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은, 정도와 특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랑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난 요한은 어떠한 숨은 동기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단 하나의 순수한 사라의 행동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격이 없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사랑의 정의를 찾고자 할 때 사전을 찾은 것이 아니라 갈보리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의 두 번째 구절은 더욱 분명하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힐라스모스, iJlasmov")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확증으로서 십자가의 대속적 성격(힐라스테리온, iJlasthvrion)을 거론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라의 나타남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은 결국 똑같은 것이다. 참된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시며 우리를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9절). ‘살리려 하심’(9절)과 ‘화목제’(10절)라는 두 단어는 매우 핍절한 우리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요한에게 배우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관심이 악과 고통의 문제에 계속해서 집중되며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공개적이고도 가시적으로 드러난 십자가를 벗어나서 그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십자가를 하나의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비극에 빛을 비춰 주는 비극이다.
바울도 또한 로마서 5장의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쓰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 번 언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랑의 실제를 확신할 수 있는 상보적인 두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5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8절)는 것이다.
복음의 가장 만족스러운 측면 중의 하나는, 그것이 주관과 개관, 역사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하나님의 아들의 일과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조합시키는 방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분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그 사랑을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증거는 우리도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될 때 우리가 의롭게 되고, 화목되고, 구속되고,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 때문이다(롬 8:15-16).
하지만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독특한 것(sui generis)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랑이 다른 데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 확증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주셨다. 물론 8절에서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만 단언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맥은 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이 메시아가 누구였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10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아들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셨듯이 우리에게 한 사람을 보내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수태 고지를 할 때 마리아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천사를 보내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큰 특권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경우에 사람과 천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삼자를 보내신 셈이 된다. 하지만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출생하는 자시 아들을 보냄으로써, 하나님은 피조물인 제삼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논리이다. 만약 성부께서 다른 어떤 사람을 보내셨다면 어떻게 그분의 사랑이 확증될 수 있었겠는가? 결코 확증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본질상 자기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자기 아들을 주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주신 것은 자기 자신을 주신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또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롬 8:32).
둘째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려고 주셨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셔서(바로 자기 자신을 주신 것) 우리를 위하여 육신이 되게 하며,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하여 살고 베풀고 섬기게만 하셨다 하더라도 이것은 놀라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육신은 그분이 자기를 주시는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영광에 대하여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짐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7-8). 이는 자신을 완전히 주시기 위한 것,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며,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두려운 자리에 이르도록까지 자기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육신이 죽었으며, 또한 그 영혼은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죄와 죽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죄를 범하는 자와 죽음을 당하는 자가 동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죄에 대한 형벌을 자신이 당함으로써 그 형벌을 집행한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무죄한 자가 되었고, 죽을 수 없는 이가 죽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경험에 수반된 두려움과 고통을 상상할 길이 없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주셨는데, 이것은 곧 우리 같은 아무 자격도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죄인’아라는 말은, 과녁을 맞추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롬 3:23) 우리 같은 실패자를 가리키면서 바울이 가장 먼저 사용하는 단어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불경건한 자’였다(6절).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리지 않았으며, 또한 우리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롬 3:18). 바울이 우리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세 번째의 통칭은 ‘원수’라는 말이다(10절). 우리는 원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권위에 대항했고, 그분의 사랑을 거절했으며, 그분의 율법에 저항했기 때문이다(롬 8:7). 바울이 우리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한 마지막 네 번째의 단어는 ‘연약하다’라는 말이다(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였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절망적이었다. 바울은 7절에서, 비록 따뜻하고 친절하며 매력적인 선을 가진 사람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의가 싸늘하고, 준엄하며, 가까이 하기 어려운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논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같이 죄가 있고 불경건하며 반항적이고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독특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사람의 선물의 가치는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이 얼마만큼의 값을 지불해야 하며, 그것을 받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에 의하여 평가된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으므로 그녀를 위하여 칠년을 봉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신 것은 원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거다”(롬 5:8, NEB).
캐논 반스톤(Canon William Vanstone)은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겨 두는 것이나 감춰 두는 것이 없이 자기를 내줌으로써 완전히 소진되는’ 것이다. 즉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성이 없는 노력 속에서 소진되는, 즉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 채로 발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내주어서 죽게 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하는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반응의 여하에 따라서 자신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지, 아니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를 기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죄인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내줌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아들을 박대하고 돌아설지도 모를 위험 앞에 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로부터 생겨나지 않거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어떤 신학도 참된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모든 기독교 신학과 모든 기독교적인 삶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죽으면서 던지셨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신학은 ‘그리스도의 임종의 외침이 들리는 범위 내에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그분의 유기의 외침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이해하게 되는가? 우리가 거기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랑 속에서, 버림받은 인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의 십자가의 상징은, 제단의 두 촛대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문 밖의 버림받은 자의 처소인 해골이라는 곳에서 두 도적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장 심한 적대감과 구별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우리는 이 무서운 경험 속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비록 형태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양도(surrender)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 고통을 당하신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자께서는 죽임을 당하시고, 성부께서는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맛보신다. 여기서의 성부의 고통은 성자의 죽음만큼 중요하다. 아버지를 잃는 성자의 고통과 아들을 잃는 성부의 고통은 서로 비견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와 동일시하신 대항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버림받은 자, 즉 단순히 범죄자뿐만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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