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면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함께 멸망시키고자 하신다는 사실에 분을 품고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고 번민의 외침을 부르짖은 아브라함 이래로, 성경 속의 인물들과 성경의 저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지혜 문학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 중의 하나이며, 또한 욥기를 지배하는 주제다. 왜 악인이 융성하고 무죄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가? ‘죄와 죽음’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 이 둘은 거의 일괄해서, 혹은 심지어 함께 붙들어 매어져 있는 것으로 이야기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악인들이 실패하는 경우가 더 적다는 사실을 목도하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들의 운명을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변신론’(辯神論, theodicy), 즉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는 일, 불의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길을 인간에게 정당한 것으로 설명해 주는 일이 분명히 필요하게 된다.
첫째는 최후의 심판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구약의 대답이었는데, 그 실례가 시편 73편이다. 이 시편에 보면, 악인은 번영한다. 그들은 건강하고 부유하다. 난폭함과 교만과, 하나님께 대한 대담한 반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 살고 있다. 하늘에서 그들 위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도 없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이 죄를 마구 짓고도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을 질시한 나머지 자기가 거의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을 돌렸다고 시인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이성 없는 짐승’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런 만족스러운 해답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그는 ‘저희의 결국’을 깨달았다. 둘째는 신약의 신자들의 시각으로 십자가에서 실행된 결정적인 심판을 돌이켜보는 것이다.
불균등한 공의가 시정될, 궁극적인 심판의 이와 같은 확실성에 대해서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이 과거에 우상숭배를 간과하신 것은 오직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로마서는 그 독자들에게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베드로도 미래에 심판의 날이 임한다는 생각을 비웃는 ‘기록자’들에 대하여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날이 아직 이르지 않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셔서’그 인내로써 기회의 문을 잠시 더 열어 놓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변신론의 첫 번째 부분이 미래의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심자가 위에서 일어났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시대에 죄가 처벌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처벌되지도 않고,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되지도 않고 그대로 누적되도록 방치된 이유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이전에 죄를 보시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분의 도덕적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것을 처리할 때까지 인격적으로 참으셨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고전적인 구절이 로마서 3:21:26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ㅇ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주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krl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찰스 크랜필드는 이 여섯 절을 로마서 전체의 ‘중심이요 핵’이라고 했다.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1절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에 대한 간단한 연구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제는...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 구절의 어투는 거의 1:17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와 같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복은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분명하다. 복음이 처음에 형성될 때 그 속에서 의가 드러났으며, 또한 복음이 전파될 때는 언제나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분명히 의의 계시가 바울이 언급한 유일한 계시는 아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피조물 속에 계시된다고 주장하여 왔으며(1:19-20), 특히 사회의 도덕적 붕괴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1:18).하지만 피조물 속에 자신의 능력을 계시하고 사회 속에 자신의 진노를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 복음 속에서 또한 자신의 의를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 의(혹은 ‘한’)’라는 말의 의미는, 첫째로, 중세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이 의를 ‘나타내셨다’고 되어 있는 25절과 26절에서와 같이 그것은 하나님의 의, 혹은 공의의 속성이라고 설명되었다. 하지만 이해석의 난점은 하나님의 공의는 원래 심판을 가져오는 것으로서(예, 계 19:11) 이것은 복음에 계시된 ‘좋은 소식’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개혁자들에 따르면, 이 어구는 ‘하나님으로부터’(NIV)라는 의미의 ‘하나님의’(소유격), 즉 하나님이 내려 주시니 의로운 위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 외’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의가 구약의 가르침이었으므로 ‘율법과 선지자가 그것을 증거’하기는 하지만, 율법의 기능은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정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불의하며(3;10), 우리 자신의 의를 확립할 수 없기 때문에(3:20; 10:3),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주시는 은사이며(5:17), 우리는 그것에 ‘복종’(10:3)하며, 그것을 ‘얻으며’(9:30), ‘가지며’(빌 3:9), 심지어 그 의가 ‘되는’(고후 5:21)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불의한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22절) 실은 이것은 다름 아니 칭의라는 것이다.
셋째로, 최근에 와서 몇몇 학자들은 구약 성경의 어떤 구절들, 특히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구원’이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시편과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주목하고서, 자기백성을 구하며, 그들이 압제당할 때 그들을 옹호하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지적한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공의의 속성도 아니고 그분이 베푸시는 칭의의 위치도 아니며, 도리어 그분의 역동적인 구원의 활동이다. 이 해석에 대한 주된 반박은, 바울이 비록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의를 증언한다고 선언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적당한 구절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해석 중에서 두 번째의 것이 이 표현이 등장한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리며, 따라서 거의 정확한 해석인 것 같다. 반면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두 가지 해석을 반드시 전적으로 거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의로운 위치라면, 그런 은사가 주어지며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원ㅇ의 활동에 의함이며, 또한 이 전체 일은 하나님의 의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의’는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방법’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고 하시는 은혜의 행동은, “하나님이 화목 제물로 세우신(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의도하신’이라고 생각한다)”(25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는’(24절)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속전을 지불하며, 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진노를 화목시키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그렇게 하신’, 즉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이유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비록 각각의 경우에 다른 설명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사도는 거의 똑같은 말로 이것을 두 번 진술하고 있다. 첫 번째 경우에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다고 말하고 있다(25절). 두 번째 경우에서는 사도는 십자가에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고‘(26절) 그분의 의를 나타내셨다고(실은 계속해서 나타내고 계시다) 말한다.
죄, 죄책, 그리고 심판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세계에서 냉혹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과거에 죄인들을 그들의 죄에 따라서 심판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므로 그 분의 의를 입증하기 위하여 변신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의와, 죄인을 의롭게 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비를 동시에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 아들의 대속적 죽음의 결과로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신 동시에 그 아들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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