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도덕적 영향력’ 이론
십자가의 능력은 어떤 객관적이고 죄를 담당하는 절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주관적인 영감에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법적인 유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영향력에 있었던 것이다. 이 견해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는 프랑스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아벨라르(1079-1142)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자발적인 자기희생은 우리를 감동시켜서 감사에 넘친 사라의 응답을 유도해 내며, 따라서 참회와 회개로 이끈다는 것이다.
구속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하여 우리 속에 불붙게 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건져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자녀로서의 참된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 곳에서 두려움이 어닌 사랑이 지배 원리가 된다.
그에게 있어서 사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접적으로 그러했다. 즉 십자가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일으키며,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우리는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짐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에 의하며,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회개이기 때문이라고 라쉬돌은 주장한다.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즉시 사죄를 받는다.” “하나님은 참된 회개라는 유일한 근거에 의해서 죄를 용서하시려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회개를 이끌어내기 위한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인을 개선시키고, 그리하여 형벌의 모든 요구를 제거함에 의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명상할 때 우리 속에 일어나는 우리의 회개와 회심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중요성은, 그것이 죄를 다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속에 사랑을 일으키며, 그리하여 하나님이 처리할 죄를 없이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의 선행은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성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적 영향력’ 혹은 ‘모범’ 이론이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이 이론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로, 우리는 아벨라르와 라쉬돌에 대항하여, “당신은 아직까지 죄의 심각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안셀름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영향력’ 이론은 피상적은 치유책을 제공하는데, 이는 그것이 내리는 진단이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도덕적 영향력 이론은 그 자체의 중심적인 강조점에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은 그리스도의 사란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사랑은 십자가에서 빛을 발하면서 또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을 유도해 내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의 영감의 축도(縮圖, epitome)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현시하고 확증하고 있는가? 사랑은 자기를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참된 사랑은 아무렇게나 무분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방파제의 끝에서 뛰어내리거나,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가서 타 죽어도 당신의 자기희생이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사랑이 아니라 당신의 어리석음을 확신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물에 빠져 있거나 혹은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 있을 때, 당신이 나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나는 당신의 생동 속에서 어리석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볼 것이다. 이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도 그 자체로서는 사랑의 확증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분의 죽음이 사랑의 확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이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주셨을 때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기에 앞서서, 그분의 죽음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과 요한이 십자가에서 사랑을 본 것은 그들이 그 죽음을 각각 죄인을 위한 죽음(롬 5:8)과 죄를 위한 화목제(요일 4:10)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이해될 때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두 개의 확증을 동시에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며, 이것을 벌카우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실재와 관련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공의는 오직 실제적인 대속 안에서, 근본적인 희생 속에서, 역할을 전도시킴 속에서만 계시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15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우리를 움켜쥐다’라는 의미로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역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은 한 가지 확신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십자가의 목적과 거기서 지불된 값을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의 덕을 본 결과이며,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아서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그분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적어도 세 가지 비유에서 오직 회개만을 근거로 한, 속죄가 없는 용서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었고, 그리하여 즉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다(눅 18:9-14). 또한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이 회개하면서 돌아오자 그를 집으로 맞아들여서 다시 아들로 받아 주었으며, 아무런 형벌도 집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눅 15:11-24). 이 세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예증하고 있으며, 속죄의 필요성 대한 암시가 어디에도 없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자에 대한 대답으로 세 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로, 여기서 문제가 된 그 비유들은 어디서도 그리스도를 암시하지 않는다.
둘째로, 이 세 가지 비유는 각기 교묘하게 대조되는 두 명 배우를 가지고 있다. 성전에서의 두 명의 예배자(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세리), 왕궁의 두 명의 종(왕에 의하여 값없이 용서를 받은 종과 동료 종으로부터 용서를 거절당한 종), 가정의 두 아들(불의했지만 회개한 아들과 의로웠지만 교만한 아들).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이 비유들이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죄의 조건이지 그것의 근거가 아니다. 이 비유들은 우리의 사죄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비유 모드에서 십자가를 본다. 왜냐하면 겸손한 세리, 파산한 종 그리고 탕자에게 보여진 그 사죄의 자비는, 죄인들이 사죄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죽이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죄의 사랑 속에서 지고의 역사적인 표현을 얻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비유 가운데서 속죄가 없는 사죄는 ‘복음’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치는 비유는 탕자의 비유이다. 회개의 정신 외에 하나님의 용서를 위한 선결 조건은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라의 비견할 데 없는 표현이며, 우리를 용서하고 회복시킬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죄책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담당함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셨고, 또한 탕자의 비유는 이런 가르침과 모순되기는커녕 도리어 암시적으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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